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93화 (93/119)

#(93) 어른의 사정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 들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무심코 휴대폰을 들어 확인한 하루는,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님]

옆에 있던 나희가 이쪽을 돌아보기에, 하루는 얼른 액정이 안 보이도록 휴대폰을 아래로 내렸다.

“대리님, 전화 좀 받고 들어갈게요.”

“응, 그래.”

다행히 나희는 [어머님]이라는 글자를 못 본 것 같았다.

하루는 휴대폰을 황급히 회사 밖으로 나갔다.

그러는 동안 전화가 끊겼다.

다시 걸려올 줄 알았는데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내가 다시 걸어야 하나?’

지난번 강 회장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할 때, 우현 몰라 김 여사와 번호를 교환했었다.

언제 한 번 연락이 올 줄은 알았는데도 긴장이 되었다.

‘왜 이렇게 긴장되지? 그냥 고객님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우현은 자기 가족과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우현의 가족을 대하는 게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아니, 재현이한테는 편하게 대할 수 있는데. 오히려 요새는…….’

재현이 하루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늘 형수님이라고 부르고. 나도 호칭을 바꿔야 하나? 뭐라고 부르더라?’

도련님.

‘으아! 그건 너무 이상하다. 어떻게 도련님이라고 불러? 아니, 지금은 호칭이 문제가 아니라…… 어머님께 전화를 드려야겠지?’

하루는 심호흡을 하고 김 여사의 번호를 눌렀다.

김 여사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있는 힘껏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 같다.

회사로 들어가던 사람들 중 몇 명이 이쪽을 돌아봤다.

저 중에 같은 부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며느님, 안녕하세요.]

김 여사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요. 일하는 중이죠?]

“아니요, 점심시간이에요. 무슨 일 있으세요?”

[음. 혹시 언제 시간 날 때 있어요? 며느님이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예, 저는 아무 때나 괜찮아요.”

긴장해서 그렇게 대답했다가 문득 떠올렸다.

언제 홀로서기 일이 들어올지 모른다.

“아, 오늘도 괜찮고요.”

오늘은 우현과의 데이트도, 홀로서기 일도 없었다.

[그래요? 그럼 오늘 저녁때 볼까요?]

“우현 오빠도 같이요?”

[아니, 우리 둘이요. 데이트해요.]

단둘이 보다니!

긴장됐지만 애써 그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네, 좋아요.”

약속 장소를 잡은 후 전화를 끊었다.

하루는 자기가 제대로 응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와, 이거 되게 긴장되네.’

애인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이 긴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모르는 아줌마, 모르는 아저씨 만난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아니었다.

이거 진짜 심장 떨리는 일이다.

하루는 회사에 들어가려다가 생각을 바꿔 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영이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요새 쇼핑몰이 잘 되어서 바쁜가 보다.

“김미영 팀장. 나, 어떡하지?”

[왜? 무슨 일 생겼어?]

“오늘 저녁에 우현 오빠 어머님 뵙기로 했거든.”

[응? 갑자기?]

“응. 하실 말씀이 있대.”

[헉! 강우현 씨랑 셋이 보는 거지?]

“아니, 단둘이.”

[헉! 혹시 그런 거 아냐? 우리 아들이랑 어울리지 않으니 이 돈 받고 떨어져요!]

“헉!”

이번에는 하루가 헉 소리를 냈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재현이 좋은 사람이라서, 재현이 기쁘게 하루를 받아들여서, 다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식사 자리에서 분위기도 좋았었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자리에서만 좋은 척 한 거고 사실은 아닐 수도 있었다.

“하긴. 나랑 우현 오빠는…….”

집안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아니, 애초에.

‘나는 집안도 없지.’

하루는 쓴웃음을 삼켰다.

[돈 준다고 하면 한 100억 달라고 해. 100억 주면 떨어져준다고.]

하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미영이 말했다.

“그러다가 진짜 100억 주면 어떡해?”

[그럼 받고 헤어져. 사랑 별 거 없다, 하루야. 알잖아. 다들 돈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살다 보니 돈이 진짜로 중요한 거. 100억 있으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어.]

미영이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무튼 오늘 어머님 만나야 하는데, 옷을 뭐 입지?”

[지금 뭐 입었는데?]

“그냥 면바지에 니트 티셔츠랑 오리털 점퍼.”

[그럼 그냥 그러고 나가.]

“에이, 어떻게 그래? 잘 차려입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저번에 잘 차려입었잖아. 그리고 오늘은 네가 회사에서 일하다가 나온다는 것도 아실 거고. 앞으로 평생 봐야 할 사람인데, 만날 때마다 꾸밀 수는 없잖아.]

평생.

그 말에 우현과 자신의 관계가 실감이 났다.

얼마 전까지는 ‘1년’이라는 제약을 뒀었는데, 이제는 평생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딱 맞춰서 죽기.

그런 얘기도 했던 게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현이 자신과 평생 함께하리라는 것을, 하루는 믿었다.

“그래, 그렇겠다. 그냥 화장이나 좀 하고 나가야겠다.”

[응, 그렇게 해. 너무 긴장하지 말고.]

“벌써부터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긴장 안 하는 건 무리야.”

[넣어둬. 어차피 똑같은 사람인데 뭘 그렇게 긴장해? 그냥 옆집 아주머니 만난다고 생각하면 되지.]

지금 미영이 하는 말은, 예전에 미영이 남자친구 부모님 만나러 간다고 할 때 하루가 해준 말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휴대폰 너머로 미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너도 알겠지? 내가 왜 긴장했었는지.]

“응.”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런 놈 엄마 때문에 그렇게 긴장했나 싶다니까. 옆집 아줌마보다 못한 사람인데!]

‘그놈’이 생각나는지 미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루는 미영이 ‘그놈’에 대해 한풀이를 하기 전, 얼른 감사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 6시간 후, 그의 어머니를 만난다.

+++

“뭐래?”

옆에서 통화를 듣던 은서가 눈을 빛냈다.

미영은 휴대폰을 내리고 은서와 시선을 맞췄다.

“은서야. 하루가…… 평생이라는 말에 반박을 안 했어.”

“진짜?”

“응, 진짜.”

“웬일이야!”

“이러다가 진짜로 결혼하겠어!”

“어떡해! 이러다가 내년에 결혼하는 거 아냐?”

“올해 할지도 몰라!”

“웬일, 웬일!”

미영과 은서는 손을 맞잡고 꺅꺅거렸다.

아직 하루는 결혼의 ‘결’ 자도 꺼내지 않았건만, 하루의 두 친구의 머릿속은 결혼식에 뭘 입고 갈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위치를 알기 위해 식당 이름을 검색했을 때부터 그러지 않을까 싶었는데, 외관부터 고급스러운 일식당이었다.

자갈이 깔린 길을 걸어 들어가 입구로 들어가자, 어둑한 로비에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하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얘기를 들은 건지,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하루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먼저 도착했을 줄 알았는데, 김 여사가 먼저 와서 하루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내가 일찍 온 거예요.”

김 여사가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루는 김 여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선 뭔가 시킬까요?”

“네. 그런데 전 이런 데 와보질 않아서 어떻게 주문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하루의 솔직한 말에 김 여사가 빙긋 웃었다.

“그럼 내가 시킬게요.”

김 여사가 옆에 있는 벨을 눌렀다.

종업원에게 메뉴를 주문한 후, 김 여사가 하루에게 말했다.

“갑자기 이렇게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우리 며느님도 많이 바쁠 텐데.”

김 여사는 단둘이 있는데도 ‘며느님’이라고 했다.

미영 때문에 ‘내 아들과 헤어져!’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닙니다. 요새는 그렇게까지 바쁘진 않아요. 조만간 바빠질 것 같지만요.”

“그래요.”

“아, 어머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오늘 두 번째로 뵙는 건데.”

“그럼 그럴까? 이름을 불러도 되니? 아니면 새아가라고 부를까?”

김 여사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새아가라니.

하루는 얼굴을 붉혔다.

“어머님이 부르고 싶으신 대로 불러주세요.”

“그래, 하루야.”

김 여사는 잠시 하루를 지켜봤다.

볼을 붉힌 하루가, 김 여사의 눈에는 귀엽게 보였다.

우현이 왜 이렇게 하루에게 푹 빠져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딸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들밖에 없는 김 여사는 딸 가진 기분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우현은 김 여사를 어머니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재현은 애인을 소개시켜준 적도 없었다.

김 여사도 아들의 애인을 단둘이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하루야.”

“예, 어머님.”

“일단 먹을까?”

어느새 상이 차려졌지만 둘 다 긴장해서 손도 대지 않았다.

“네, 좋아요. 맛있게 먹겠습니다.”

“그래.”

김 여사가 젓가락을 들자, 하루도 젓가락을 들었다.

예의가 있는 아이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지난번 식사 자리에서도 느꼈는데, 참 잘 자란 아이구나 싶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울 무렵, 김 여사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하루야. 오늘 보자고 한 건…… 설날 연휴에 혹시 계획이 있니?”

“계획이요? 아뇨. 딱히 없는데요.”

하루는 명절을 가족들과 보내지 않았다.

친구들도 가족을 만나러 가기 때문에, 명절은 늘 혼자였다.

“그럼 우리 집에 오지 않을래?”

“예?”

“설날에 같이 보내고 싶구나. 재현이에게도 말해두긴 했는데, 내가 직접 초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아, 물론 거절해도 돼. 불편하면…….”

“아니에요, 어머님. 좋아요.”

“그러니?”

“네, 좋죠.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요. 정말 좋아요.”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우현이가 집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단다.”

“아.”

하루는 입을 다물었다.

“우현이는 오기 싫어할 수도 있어. 혹시 데리고 와줄 수 있니?”

조심스럽게 묻는 김 여사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김 여사의 편을 들기엔, 우현도 안쓰러웠다.

하루가 보기에는 김 여사가 좋은 사람이지만, 우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하루는 알고 있었다.

하루의 새아버지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우현도 나와 같은 상황이지 않을까?

이 사람들도 그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만 친절하고 상냥한 게 아닐까?

명절에 초대를 받았다는 데에 들떠서, ‘새아가’라는 말에 설레서, 우현의 마음을 잊고 있었다.

그는 늘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데.

하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김 여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죄송해요, 어머님. 실례가 안 된다면, 우현 오빠가 가족들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걸 알아야 우현 오빠를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루에게선 지금껏 긴장하고 있던 모습이 깨끗이 사라지고, 우현을 지켜야 한다는 각오만 느껴졌다.

그래서 김 여사는 하루가 우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 인기 많던 우현이 왜 하루를 선택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아주 오래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왜 이런 눈빛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그때 왜 이렇게 당당하게 나서지 못했을까?

그때 그랬더라면, 우현과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틀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김 여사는 서글픈 눈으로 하루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현이는 아무 잘못이 없어. 잘못은 우리 어른들이 했고, 어른들의 사정에 그 아이가 너무 많이 휘둘렸지. 우현이는 너무 어렸고,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서 이제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

김 여사와 헤어진 후, 집으로 향하는 길.

하루의 머릿속에는 김 여사에게 들은 슬픈 진실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제야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 우현의 표정이 달라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우현을 씁쓸하게 지켜보는 가족들의 눈빛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아무도 잘못이 없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들 우현 오빠한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

이제 우현은 성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야기하기 힘들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우현은 더 상처를 받을 테니까.

더는 가족을 미워하지 않게 되더라도,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우현의 가족들은 우현이 더 깊은 상처를 받을 것이 걱정돼서, 자신들이 미움을 받는 쪽을 택한 것이다.

하루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나도 우현 오빠한테 어떻게 말할 수가 없는 부분이잖아. 어째야 하지? 이럴 땐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거야?’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려 하고 있었다.

하루가 한 발 내디딜 준비를 하는 그때.

모두가 맞은편 신호를 보고 있는 그때.

신호가 바뀌기 전 지나가기 위해, 버스가 속도를 높인 그때.

팟-!

누군가 하루의 등을 밀었다.

그리고.

끼이이이익-!

버스의 바퀴가 바닥을 찢는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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