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오빠 믿지?
지금으로부터 약 3시간 전.
우현의 집은 평화로운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하루는 우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우현은 하루의 머리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연두는 하루의 허벅지에 턱을 괴고 하품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고즈넉한 주말이었다.
“오빠 집에 올 때마다 진짜 공간 낭비다 싶어요.”
그의 어깨에 기댄 채, 테이블에 놓인 커플 컵을 보며 말했다.
오늘 우현의 집에 오기 전 마트에 들러, 똑같이 생긴 컵을 두 개 사 온 터였다.
“그래? 필요한 건 다 있는데.”
“사람이 필요한 것만 놔두고 살진 않잖아요.”
“뭐 놔두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렇게 콕 집어 물어보면 할 말이 없긴 하네요.”
“나중에 쇼핑 한번 할까? 불필요한 것들 잔뜩 사러.”
“좋아요. 아까 오빠랑 쇼핑하는 거 좋았어요. 이렇게 커플 컵을 갖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고 싶었거든요.”
“가졌더니 어때?”
“달달하네요. 우리 진짜 커플이구나 싶어서 두근거리기도 하고.”
우현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서로의 진심을 고백한 후, 하루는 굉장히 솔직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기분을 항상 표현했고, 우현은 그게 참 좋았다.
“그리고 또 해보고 싶은 거 있어?”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뭐든 해주고 싶었다.
“음. 하나 있긴 한데.”
“뭔데?”
하루가 자세를 바로 하고 우현을 마주 봤다.
하루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불 빨래요.”
“이불 빨래?”
“영화에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커다란 대야에 이불 넣고 두 사람이 손잡고 꾸욱, 꾸욱 밟고. 그런 거요.”
우현은 영화를 즐겨 보지 않았기에, 그 광경이 어떤 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루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보니, 상당히 괜찮을 광경일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보자. 이불 빨래.”
그리하여 하루는 방에 있는 이불을 싹 걷어와 커다란 욕조에 넣었고, 물을 틀고 세제를 뿌렸다.
둘은 바지를 걷어붙이고 욕조에 들어가 이불을 밟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천이 맨발과 다리에 감겨 오는 느낌이 생소했다.
하루가 까르르 웃었다.
“아, 이게 재밌다.”
이쪽을 밟으면 저쪽이 부풀고, 저쪽을 밟으면 이쪽이 부풀고, 그러다가 조금 미끄러워서 벽을 짚기도 하고, 서로의 손을 잡기도 하고.
그래, 재밌었다.
두 손을 마주 잡고 이불을 꾹꾹 밟는 거, 참 재미있고 설레고 즐거웠다.
처음에는 그랬다.
다 밟고 나서 첫 번째로 헹굴 때도 그랬다.
그러나.
“하아. 하아. 왜죠? 이유가 뭘까요, 오빠?”
“모르겠어. 나도 첫 경험이야.”
아무리 헹구고, 또 헹궈도 비눗물이 완전히 빠지질 않는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헹굼질을 하느라, 몇 시간째 욕실에 갇혀 있었다.
“그만할까?”
우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여자가 칼을 빼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데.”
“무는 충분히 썰었다고 봐.”
하루가 고개를 들었다.
힘이 들어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역시 그렇죠? 충분히 썬 거겠죠?”
“넘치도록 썰었어.”
“하지만…….”
하지만, 이라니.
우현은 이 끝나지 않을 이불 빨래가 계속될 것 같아, 긴장한 마음으로 하루의 입술을 응시했다.
“오빠가 오늘 덮고 잘 이불이 없잖아요.”
“하루야.”
“네?”
“오빠 믿지?”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오빠 믿지?
이 말은 섬에 놀러 갔다가 배도 끊기고, 방도 하나밖에 없어서 단둘이 자야 하는 순간에 하게 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이 무의미한 헹굼을 어떻게든 끝낼 필요가 있었다.
“네, 믿어요.”
“그래. 나는 어떻게든 잘 수 있어. 정 안 되면 연두라도 덮고 잘게.”
‘연두’라는 이름이 나오자, 욕실 밖에서 걱정스럽게 대기하고 있던 연두가 문을 박박 긁었다.
그 소리에 욕실 문을 돌아보던 하루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우현이 하루를 잡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허우적거리던 하루의 팔을 잡았지만, 우현의 다리에 이불이 얽혀 있다는 걸 간과했다.
한쪽 다리에 감긴 이불을 벗어나지 못해, 우현도 중심을 잃고 말았다.
“으앗!”
하루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우현은 얼른 하루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려 했지만, 중심을 잃은 상황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하루가 먼저 뒤로 넘어갔고, 그 위를 덮치듯 우현이 앞으로 엎어졌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욕조 가득 이불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뒤로 넘어진 하루가 이불에 감싸였다.
“으아, 깜짝 놀랐어요. 얘들 덕분에, 우린 살아남았어요.”
하루의 말에 우현이 웃었다.
“그러게. 방금 전까진 얘들 때문에 꼼짝없이 죽겠다 싶었는데.”
하루가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넘어지면서 튄 물이 하루의 볼에 묻어 있었다.
우현은 손을 들어 하루의 볼을 살짝 닦아냈다.
하지만 우현의 손도 젖어 있었기에, 하루의 볼이 더 젖을 뿐이었다.
하루가 우현과 눈을 맞췄다.
맑은 눈동자에 우현의 얼굴이 비쳤다.
그 눈동자 안에 담긴 우현은 참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눈동자 안에 담길 수 있는 한, 항상 이런 표정일 거라고, 우현은 생각했다.
우현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하루도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다.
도톰하게 닿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그저 입술만 닿았을 뿐인데도 아랫배 부근에 힘이 들어갔다.
우현은 젖은 손으로 그녀의 볼과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벌어진 그녀의 입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입안을 탐색하는 동안 섞이는 타액이 감미로웠다.
입술을 핥고 고른 윗니를 더듬다가 잠깐 얼굴을 떼었다.
감겨 있던 하루의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가는 광경이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긴 속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맑은 눈동자는, 이 세상에 오롯이 우현밖에 없다는 듯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랑해, 하루야.”
우현은 하루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그와 진심이 통한 후, 우현은 사랑한다는 말을 아주 많이 해주었다.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하루는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요.”
우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즐거워서 웃을 때 눈이 초승달처럼 휜다.
그런 눈을 보는 게 좋았다.
우현의 얼굴이 다시 가까워져서 또 키스를 하려는 줄 알고 눈을 감았는데,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은 하루의 입술이 아닌 귓불이었다.
그는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귓불을 잘근 깨물었다가 핥았다.
생경한 전율이 귀에서부터 척추로 빠르게 번졌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은 귀인데, 이상하게도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하루는 한 손으로 그의 팔뚝을 꽉 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한참 동안 하루의 귀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느긋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입술이 하루의 목덜미에 낙인을 찍듯 눌려왔다.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 입술의 감촉에, 하루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불을 헹구느라 힘들었을 때보다 더 숨이 차올랐다.
눈을 뜨자 그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사랑스러워서, 하루는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찔러 넣었다.
그걸 허락으로 받아들인 듯, 그의 움직임이 더 깊어졌다.
목덜미 어딘가에 그의 이가 박히는 순간, 하루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모순된 감각이 전기처럼 빠르게 전신을 강타했다.
움찔하는 하루의 어깨를, 우현의 커다란 손이 움켜쥐었다.
그가 어깨를 누르는 힘에 하루의 상체가 욕조에 더 깊이 눕혀졌다.
젖은 이불이 하루를 감쌌다.
그는 양팔 사이에 하루를 가두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열기가 서려 있었다.
은밀하고 뜨거운 열기가 하루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무섭지 않다고, 하루는 생각했다.
오빠 믿지?
그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이 남자를 믿는다.
하루는 우현의 전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남자와 함께인 것이, 이제는 두렵지 않으니까.
이 남자와 함께할 미래가, 이제는 무섭지 않으니까.
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의 목을 감싸고 살짝 끌어당기자, 그는 하루가 원하는 대로 끌려와주었다.
괜찮아요, 라고 말하려 했다.
괜찮아요, 오빠. 나는 준비가 됐어요.
하지만 입술을 벌리는 순간.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예상치 못한 순간의 소음에, 우현과 하루는 벌떡 일어났다.
아니,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불에 감겨 허우적거렸다.
허우적거리는 와중에도 젖은 몸이 맞닿아 있다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아래에서 일어나려고 꼼질거리는 하루의 육체가 우현을 더 자극했다.
우현은 저 밖에서 초인종을 누른 불청객이 얼른 가버리기를 바랐지만.
딩동-
또 초인종이 울렸다.
아무래도 잡상인은 아닌 모양이다.
잡상인일 리가 없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아파트는 아니니까.
우현은 간신히 일어나 욕조를 빠져나왔고, 두 손으로 하루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우와, 오빠. 힘이 엄청 세네요.”
감탄하는 하루의 모습에 또 아랫배가 욱신.
아, 미치겠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엽고 섹시하고 눈부신 거지?
조금만 덜 사랑스럽고 덜 귀엽고 덜 섹시하고 덜 눈부시면 내가 이렇게 이성을 잃는 일이 없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우현은 하루의 손을 잡았다.
“조심해서 나와. 미끄러지겠다.”
“우리 엄청 미끄러졌죠. 오빠도 그렇게 허당처럼 미끄러질 줄 몰랐는데.”
하루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딩동-
초인종이 또 보채듯 울렸다.
“누굴까요?”
“재현이겠지.”
이럴 때에 찾아와서 제집처럼 초인종을 누를 사람은 재현밖에 없었다.
“어쩌죠? 우리 지금 엄청 젖었는데.”
“옷 가져다줄게. 난 방에서 갈아입으면 돼.”
“민망하다.”
“뭐 어때? 우린 연인이고, 이 정도야 연인이라면 당연히 하는 일 아냐?”
“당연히요?”
“응, 당연히. 앞으로도 할 거야. 당연히. 더 많이 할 거야. 당연히.”
우현의 단호한 말에 하루가 얼굴을 붉혔다.
우현은 그런 하루를 향해 빙긋 웃어주고는 욕실을 나왔다.
현관문을 열자 우현을 본 재현이 눈을 크게 떴다.
“옷 입고 샤워했어?”
“뭘 좀 하다가.”
“뭘 해야 집에서 이렇게 옷이 다 젖어? 혼자 물놀이라도…….”
재현이 말을 멈췄다.
그의 시야에 거실 테이블에 놓인,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머그컵이 들어온 것이다.
“아, 미안. 형수님이랑 같이 있었구나.”
“괜찮아. 이불 빨래를 좀 하고 있었어.”
“이불 빨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재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이불 빨래.”
“그, 욕조에 담가놓고 발로 밟고, 그러는 거? 설마?”
“어, 바로 그거.”
“어…… 아, 그래. 어, 재밌었겠다.”
“응, 재미있더라. 들어와라, 거기서 그러지 말고.”
“아냐,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이미 분위기 다 깨졌으니까 들어와.”
재현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 강우현이 이불 빨래를 하고, 그 강우현이 저런 농담까지 하다니.
‘아니, 마지막 말은 농담이 아니겠지.’
아무래도 방해하지 말아야 할 순간에 온 것 같다.
‘아, 내가 생각이 짧았어. 주말인데 같이 있을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재현은 자신을 탓하며 미안한 마음을 품고 거실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신나서 반겨주는 연두를 쓰다듬는 동안, 우현은 방에 들어가 옷을 챙겨 나와 욕실로 향했다.
재현은 신혼부부의 집에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민망했다.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컵이 자꾸만 심장을 쿡쿡 찔렀다.
아직은 컵 두 개.
하지만 이제 곧 똑같은 물건들이 하나, 둘씩 늘어갈 것이다.
컵 두 개, 그릇 두 개, 칫솔 두 개, 슬리퍼 두 개…….
그리고 어느덧 그게 아주 당연한 일상이 되리라.
그건 참 좋은 일이었다.
아주 잘된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가슴을 찌르는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는 함부로 찾아오면 안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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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고 나서 우현이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욕실을 나갈 수가 없었다.
‘으아, 어떡하지?’
지금 하루가 입은 옷은 우현의 옷이었다.
이걸 보면 재현이 어떻게 오해할지 뻔했다.
생각해 보니, 우현과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인 적이 많지 않았다.
특히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 후에는 한 번도 다른 사람과 같이 만난 적이 없다.
우현과 단둘이 있을 때는 도발적인 척도 하고, 귀여운 척도 할 수 있는데 남들 앞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하루가 욕실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재현은 우현에게 아파트에 들어오면서 본 것을 말하고 있었다.
“형. 아파트 앞에 유명지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