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오롯이 널 위해.
“혀니 형이요. 음. 글쎄요.”
도경은 ‘혀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혀니’에 대한 기억은 그가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어서, 그와 함께 있으면 무척 즐거웠다는 기억뿐이었다.
“사람을 되게 행복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육원에 살면 힘든 일이 많았을 텐데, 그런 내색이 전혀 없었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가끔 아이들이랑도 열심히 놀아줬어요.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다.
하루를 위해 ‘혀니’를 찾기 위해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가 얼마나 굉장한 사람이었는지 알게 됐다.
고등학생인 ‘혀니’가 초등학생 아이들과 놀아주는 건 아주 귀찮은 일이었을 수도 있는데, ‘혀니’는 항상 누구보다도 제일 신나게 놀았다.
“동네 애들이 보육원 애들을 따돌리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부모님들이 그런 애들이랑은 놀지 마, 뭐, 그런 식으로 얘기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노는 데 걔들은 안 끼워주고 그랬죠. 그런데 혀니 형이 끼면서 달라졌어요. 혀니 형, 정말 흥미로운 놀도 많이 알고,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알았거든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혀니도 노력했을 것이다.
자기의 보육원 동생들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
“노력했겠죠. 우리들이 좋아할 만한 얘기도 만들어내고, 우리들이 신나게 몰입할 만한 게임도 만들어내느라. 그래서 그 형이랑 같이 놀았던 시간이 참 즐거웠어요.”
아이들을 잘 지켜보는 사람이었기에, 하루가 가족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눈치챘을 것이다.
“우리가 놀이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혀니 형은 하루를 벤치에 앉히고 이야기를 들어줬어요. 가끔 하루는 울었죠. 우리 앞에서는 절대 안 우는데.”
자기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주는 사람.
하루에게 그런 ‘어른’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우리한테는 되게 어른으로 보였으니까요. 어른들은 다들 하루 부친 편이었는데, 혀니 형은 하루 편을 들어주니까 하루가 되게 안심이 됐을 거예요. 그래서 혀니 형이 부러울 때도 있었죠. 나는 하루가 울면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버리는데, 혀니 형은 여러 가지 말로 위로도 해주고, 하루를 웃게도 해주니까.”
도경이 피식 웃었다.
“나는 진짜 혀니 형 못 이겨요. 그래서 하루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는 것도 빨랐습니다. 혀니 형 정도 되는 남자가 아니면, 하루 마음을 얻기 힘들겠다 싶었죠.”
도경의 말에 우현이 심각하게 물었다.
“난 어떨까요? 이길 수 있을까요?”
불안하게 묻는 우현의 모습에, 도경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간신히 웃음을 삼키고 진지하게 우현의 얼굴을 뜯어보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일단 외모는 합격인데.”
“다른 건요?”
“집안도 뭐, 왕자 형이 더 낫겠죠?”
“그리고 또요?”
“아니, 왕자 형. 뭘 그렇게 불안해하십니까? 왕자 소리도 들으신 분이. 하루는 혀니 형한테 왕자라고 해준 적 없어요.”
우현이 얼굴을 붉혔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이렇게 전부 다 가진 남자가 얼굴을 붉히는 광경은 무척 재미있고 귀엽다.
“자신감 좀 가지세요, 왕자 형. 하루의 왕자님은 왕자 형뿐입니다. 전 왕자 형처럼 잘난 사람이 이렇게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네요.”
“나도 놀랍습니다. 이상하게 하루 앞에만 서면 자신감이 사라지거든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놈인 것처럼 느껴지죠. 실제로 잘난 것도 없지만.”
회의적으로 중얼거리는 우현을 보며, 도경은 생각했다.
‘이 남자, 진짜 하루한테 푹 빠졌구나.’
이 모습을 하루에게 보여주고 싶다.
+++
도경은 괜찮다고 했지만 우현은 도경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차를 돌렸다.
도경과 과거 보육원 직원들을 나눠서 만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는 돈을 썼지만 이제부터는 직접 움직여야 한다.
그들이 아무한테나 입을 열지는 않을 테니까.
‘서둘러야 해.’
‘혀니 오빠’에 대한 도경의 설명을 들은 후, 하루가 ‘혀니 오빠’를 찾으면 그에게로 홀딱 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질투보다는 하루의 마음이 중요했다.
하루의 과거에서 ‘왕자 오빠’가 떠난 것도 큰 아픔이었겠지만, ‘혀니 오빠’가 쫓겨난 일은 기억상실을 유발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혀니 오빠’를 찾으면 무언가 달라질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하루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했던 기억.
자기 때문에 ‘혀니 오빠’가 살 곳을 잃게 되었다는 죄책감.
그런 것들로부터 하루가 자유로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하루가 더 괴로워질 수도 있지.’
중요한 건, ‘혀니 오빠’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였다.
‘혀니 오빠’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아동성추행 누명을 뒤집어쓰고 동네에서도, 보육원에서도 쫓겨났다.
심지어 사고로 다리를 하나 잃은 채였다.
몸에 장애가 생기면 일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과연 잘 살아남았을까?
혹시 지독한 현실을 탓하며 나쁜 길로 들어서지는 않았을까?
아니, 살아 있기는 할까?
‘혀니 오빠’를 찾더라도 그의 현재를 확인한 후, 하루에게 알릴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만약 도저히 하루에게 알릴 상황이 아니라면.
‘그때는 내가 하루의 과거를 전부 책임질 거야.’
물론 지금도 그럴 생각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서둘러야 해.’
명지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몰랐다.
희정의 말대로 돈과 권력보다 더 소중한 건 하루였다.
이 돈도, 권력도 하루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명지 때문에 하루의 마음이 다칠 것 같다면, 그때는 모든 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를 보호해야 했다.
결국 명지가 원하는 건 우현의 뒤에 있는 배경이니, 우현이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면 더는 우현과 하루를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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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회장이 어두운 눈으로 도경을 응시했다.
“그게 정말인가?”
“예, 회장님. 그러니까 하루 뒷조사는 하시면 안 됩니다. 만약 하루가 강 회장님 댁과 어울리지 않아 내치고 싶다 생각하신다면,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하루 뒷조사는 여기서 멈춰주세요.”
강 회장이 도경에게 “우리 손자 약혼녀와 친구 사이더구나.”라고 말을 꺼냈을 때, 도경은 놀라지 않았다.
이쪽 세계의 사람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되는데, 묻는 순간 약점을 보이게 될 것 같은지 뒤에서 은밀히 조사를 한다.
우현이 하루를 크리스마스 파티에 데려가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를 한 후, 다들 하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현이나 하루에게 물어보면 될 일인데, 그러는 대신 뒷조사를 선택했다.
아마 상대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아야 이길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왔기에 생긴 습관이겠지.
머리로는 알지만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강 회장은, 이 집안은 조금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구나.”
강 회장이 더 조사를 할까 봐, 그러다가 혹시라도 하루의 가족들을 건드리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도경은 강 회장이 하루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전부 털어놨다.
“도경아.”
“예, 회장님.”
“나는 우현이와 그 아이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럴 생각으로 뒷조사를 한 것이 아니야.”
“그러십니까.”
“그저 진짜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진짜요?”
“결혼을 하겠다는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누가 그런 얘기를 가짜로 하겠습니까?”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약혼은 가짜였다.
“우리 어른들이 어렸던 우현이한테 상처를 많이 줬지. 그래서 우현이는 마음을 닫아버렸어.”
강 회장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강 회장은 도경이 마음에 들었는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래서 도경은 가족들과 우현 사이에 무너뜨리지 못할 큰 벽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혹시 이 아이도 사랑을 하면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까, 사랑을 하게 되면 제 애비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재산을 받고 싶으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도경은 우현이 하루와 사귀기 전, 끊임없이 연애를 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윤도경 씨. 나는 바로 이럴 때를 위해 권력이 필요했습니다. 언젠가 하루를 다시 만나게 됐을 때, 하루를 지키기 위해.
지난밤, 우현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하루를 지키기 위한 힘.
그걸 얻기 위해 우현은 이제껏 마음에도 없는 연애를 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우현이는 제 어미를 잃고 한동안 로봇처럼 살았단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밥을 먹으라고 해야 먹고, 학교를 가라고 해야 가고.”
“…….”
“그러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학교가 끝나면 어딘가에 갔다가 늦게 돌아오더구나. 한번 따라가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듯 강 회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참 귀여운 여자아이랑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얘기를 하는데. 웃더구나, 우현이가. 집에서는 아무 표정도 없던 우현이가 그 여자아이 옆에서는 열심히 웃더구나.”
그랬을 것이다.
그래야 왕자 오빠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도경은 왕자 소리를 듣고 싶어서 노력했다고 했던 우현의 말이 떠올라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 아이였구나, 하루가.”
“네, 회장님.”
“이번에는 진짜구나.”
“네, 회장님.”
“그래, 네가 하는 말이라면 틀림없겠지.”
강 회장은 도경을 이상할 정도로 신뢰했다.
강 회장이 도경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걱정 마라, 도경아. 이제는 되었다. 건드릴 것도 물어볼 것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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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설날에요?”
재현이 눈을 크게 떴다가 얼른 덧붙였다.
“안 돼요,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그래, 역시 안 되겠지?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명절에 오라 하면, 그 아이가 부담을 느끼겠지?”
김 여사가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곧 민족 대명절인 설날이다.
평소의 김 여사는 명절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우현이 독립을 한 후, 명절에 집에 오는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 여사는 혼자서 쓸쓸하게 명절을 보낼 우현을 걱정하곤 했다.
그런 김 여사가 유독 요번 설날 이야기를 꺼낸다 싶었는데, 하루를 부르고 싶어서였나 보다.
“당연히 부담스러워하죠. 요새는 결혼 전에 예비 시댁에서 부르면 시월드라고 헤어지기도 하고 그런대요. 안 그래도 어려운 시댁인데 결혼 전부터 그러면 진짜 부담이죠.”
김 여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명지 때문에 피곤한 상황에서 예비 시댁까지 나서면, 하루가 많이 곤란해질 것이다.
유명지.
-그년, 완전 미친년이더라. 하루랑 똑같이 화장을 했더라고. 난 처음에 걔가 하루인 줄 알았어.
얼마 전, 희정이 찾아와서 명지를 만난 일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댔다.
명지의 존재 때문에, 재현에게 ‘너, 하루 좋아해?’라는 질문을 했던 걸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이럴 때는 희정의 단순함이 참 고맙다.
‘아, 그래. 그렇지.’
문득 떠오르는 계획이 하나 있었다.
어쩌면 설날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명지를 초조하게 만들어야 해. 그래야 더 빨리 움직일 거고, 서두르다 보면 분명 실수를 하게 될 거야.’
재현은 울적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는 김 여사를 응시했다.
“어머니, 생각해봤는데요. 설날에 형수님을 불러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어머, 그래?”
김 여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그리고. 하나 드릴 말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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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헉. 헉.”
욕실 안을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 하아. 오빠…….”
“허억…… 허억…… 하루야…….”
“어떡해요, 미안해요.”
“아니야. 하아. 괜찮아. 괜찮아.”
“안 괜찮아요. 어떡해.”
하루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욕조를 내려다봤다.
“괜찮아. 이건 아무 문제도 안 돼.”
우현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지만, 그의 표정은 ‘문제가 많아. 넘쳐흘러. 이런 건 처음이야.’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하루도 이런 건 처음이었다.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