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89화 (89/119)

#(89) 질투하는 남자

“경호원이야.”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런 대답은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 친구야.’ 정도의 대답은 할 수 있었다.

그때, 도경이 희정을 돌아보며 허리를 굽혔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아가씨.”

방금 전까지 느꼈던 따스한 행복이 깨끗이 사라졌다.

도경은 완우에게도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휙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희정은 멍하니 그가 걷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찬란했던 거리가 무섭도록 차가운 적막에 휩싸였다.

어둠이 도경의 뒷모습을 집어삼켰다.

가슴이 저몄다.

아아, 맞다. 저 남자랑 나는 안 되지.

깨달음이 가슴을 찢었다.

나는 오빠한테 저 남자를 ‘내 친구’라고도 소개할 수가 없지.

왜 바보처럼 설레고, 왜 바보처럼 흥분했을까.

결국 안 되는 사이라는 걸 알면서.

결코 이뤄져서는 안 될 관계라는 걸 알면서.

“뭔 경호원이 저렇게 입고 다녀? 너, 경호원 바꿔라.”

완우는 희정이 도경을 좋아한다는 상상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런 관계다.

도경과 나는.

경호원이란 거짓말을,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그런 관계.

‘난 우현이 오빠랑 상황이 달라.’

세정 그룹은 어느 누구도 비웃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우현이 누구를 택하든, 사람들은 손가락질하지 못한다.

뒤에서 수군거릴지언정 앞에서는 하루를 공주님 모시듯 할 것이다.

하지만 희정의 집안은 달랐다.

희정이 고작해야 경호원과 사귄다는 걸 알게 된다면, 모두가 비웃을 것이다.

뒤에서도, 면전에서도.

‘애초에…….’

희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윤도경 씨가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바보처럼.’

+++

“희정이가?”

재현이 놀란 듯 물었다.

“응, 희정이가.”

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와 재현은 홀로서기 사무실에서 찜닭을 먹는 중이었다.

낙성은 이별을 하러 나가서 오늘은 둘뿐이었다.

재현이 명지에 대해 묻기에, 하루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재현은 희정의 행동에 몹시 놀란 것 같았다.

“희정이가 왜 그러지? 걔, 이제 형을 포기했나?”

“응, 그런 것 같아. 희정이, 진짜로 사랑에 빠진 것 같거든.”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 친구 중에 도경이라고 있거든. 경호원인데…….”

“잠깐, 잠깐. 도경? 윤도경 씨?”

“아, 너도 알겠구나. 강 회장님 경호 일을 하고 있어.”

“우와, 윤도경 씨가 형수님 친구였어? 우와, 세상 진짜 좁네. 상상도 못 했어. 나, 왜 이렇게 업데이트가 안 되고 있지? 아무튼 그래서?”

“도경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 윤도경 씨를?”

재현이 도경을 떠올리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윤도경 씨, 멋있지. 몸도 진짜 좋고.”

“그래? 도경이가 그렇게 멋있어?”

“멋있지. 얼굴도 호감형이고 몸도 좋고.”

“몸이 그렇게 좋나? 너무 근육질인데.”

“바로 그 부분이 좋은 거야. 너무 근육질인 점. 남자들이 부러워하는 몸이지.”

“흐음.”

도경의 근육질 육체를 떠올리는 하루에게, 재현이 말했다.

“그런데 형수님이 중간에서 노력해도, 희정이랑 도경 씨는 안 될 거야.”

“응? 왜? 도경이는 희정이를 좋게 보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 설령 도경 씨도 희정이를 좋아한다 해도 안 돼. 희정이네 집안이 좀…….”

“아, 집안 차이가 있지.”

“아니, 아니. 그런 차이의 문제가 아냐, 형수님. 그 집안은 좀…… 그래.”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재현을 보자, 문득 크리스마스 파티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희정을 몰아붙이던 희정의 오빠.

“돈은 많은 집안이야. 돈만 많은 집안은 이쪽에서 좀 무시를 당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명예를 원하거든. 그 명예 때문에 희정이 외할아버지가 국회의원 출마도 했었고. 그래서 자식들은 명예가 있는 집안이랑 연을 맺어야 해. 완우 형, 아, 희정이 오빠 이름이 완우야. 완우 형 와이프도 꽤 이름 있는 집 여자야.”

“아, 그렇구나.”

“희정이 걔는 어릴 때부터 거의 세뇌 당할 정도로 얘기를 들어왔을 거야. 반드시 좋은 집안 남자랑 결혼해야 한다고. 그게 네 존재 가치라고. 그래서 우리 형한테 그렇게 목을 맨 거고.”

희정이 안쓰러웠다.

“희정이가 용기 있게 집안을 버리고 윤도경 씨를 택한다면, 가족들이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용기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희정이처럼 세뇌가 당한 상황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제동을 걸 거야. 안 된다고. 좋은 집안 남자여야만 한다고.”

재현이 씁쓸하게 말했다.

하루도 쓰게 웃었다.

“가족이라는 게 참 그렇다.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데, 왜 다들 그렇게 가족에 목을 매는지. 그런 가족 따위, 그냥 버리면 그만인데.”

하루의 말에 재현은 아차 싶었다.

얼마 전, 희정이 찾아와 하루의 과거에 대해 떠들어댔다.

어린아이가 견디기 힘든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하루는 성장했다.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하루는 사랑을 두려워했고, 결혼을 무서워했다.

이제야 간신히 우현과 행복해지려는 하루가 다시 그 두려움으로 빠질까 봐 걱정이 됐다.

“형수님. 모든 가족이 그렇지는 않아.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야.”

“그래? 그럼 너희 가족은 어때? 너는 가족들이랑 아무 문제 없어? 가족이 있어서 행복해?”

재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행복해.

그렇게 대답해도 될까?

이하루, 너는 가족 때문에 불행했지만 나는 행복해.

그렇게 들리지 않을까?

“내가 행복하다고 해도, 형수님 마음이 괜찮을까?”

재현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걱정스러운 재현의 눈빛에, 하루는 깨달았다.

“희정이한테 우리 가족에 대해 들었구나?”

“미안해, 형수님. 들을 생각은 없었어.”

“아니야, 상관없어. 언젠가는 다들 알게 되더라고. 내가 숨겨도 눈치를 채더라고.”

“…….”

“나는 여전히 거기서 못 벗었나 봐. 다들 눈치채는 걸 보면.”

“그렇지 않아, 형수님.”

“있잖아, 재현아. 나는 너무 무서워. 지금 우현이 오빠한테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런데도 종종 무서울 때가 있어. 나도 우리 엄마처럼 될까 봐.”

엄마는 남자 때문에 딸을 버렸다.

“딸의 인생은 엄마를 따라간다는 말이 있더라. 나도 그럴 것 같아서 두려워. 우리 엄마처럼 남자 없이는 못 살고, 우리 엄마처럼 남자 때문에 자식을 버리고, 우리 엄마처럼 남편한테 맞고 살고.”

“형수님. 형은 형수님을 때리지 않을 거야. 자기가 맞기는 해도.”

“내가 우현이 오빠랑 결혼할 거라고 생각해?”

“그럼 아니야? 약혼녀잖아.”

하루가 피식 웃었다.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까지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대. 그리고 나는 내 집안과 우현 오빠 집안의 차이를 아주 잘 알고 있어. 나는 그냥 지금 이 순간 우현 오빠 곁에 있는 게 좋은 거야.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

“형수님. 형은 형수님이랑 결혼할 거야. 형수님이 싫다고 해도 그렇게 될 거야.”

재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형수님. 형수님 말대로 가족도, 부모도, 자식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쳐.”

“그래, 그래서 내 인생도…….”

“형수님.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재현이 전에 없이 하루의 말을 끊었다.

하루는 입을 다물고 재현을 응시했다.

“내가 아는 이하루라는 사람은, 정말 밝고 씩씩하고 긍정적이라서 말해주지 않으면 가족들이 어떤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야. 내가 처음 형수님을 보고 느낀 감정은, 이 여자 참 사랑 많이 받고 자랐겠다, 그거였어. 형수님이 사랑이 무섭다고 철벽 치기 전까지는.”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나, 재현이한테 고백받았었지.’

하지만 지금 재현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재현은 하루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아이의 성장에 외적인 요소가 많은 영향을 끼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분명 타고난 성질도 있어. 범죄자의 자식들이 다 범죄자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그럴까?”

“응. 내가 아는 인간 이하루는 정말 굉장한 걸 가지고 태어났어. 다들 갖고 싶어 하지만 갖지 못하는 거.”

“그게 뭔데?”

“강철 멘탈.”

하루가 웃었다.

“이것 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을 수 있잖아. 형수님, 그 어떤 것도 형수님의 강철 멘탈을 무너뜨리지 못해. 형수님의 가족들조차 형수님의 세계를 무너뜨리지 못했어.”

“하지만 난 아직도 무서운걸.”

“사람이 미래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거야. 형수님은 사랑을 무서워했지만 극복하고 사랑을 하고 있잖아. 형수님은 미래를 무서워하지만, 결국 이겨낼 거야. 형수님은 그만큼이나 잘 자란 사람이야. 아주 잘 자랐어. 최고야.”

과할 정도의 칭찬에, 웃음이 나왔다.

고맙고 좋은데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요새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진 건지 모르겠다.

“고마워, 재현아.”

재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루의 가슴에 박혔다.

나는 재현이 말하는 것처럼 강하지 못하지만, 이제 정말로 강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도, 새아버지도, 동생도, 이 견고한 마음을 무너뜨리지 못할 거란 확신이 생겼다.

“별말씀을요, 형수님.”

재현이 하루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루의 표정이 아까와 달리 밝아져서, 재현은 안심했다.

나의 이야기가 그녀에게 힘이 되어 다행이었다.

그래서 재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난 그저 형수님이랑 우리 형이, 부러울 정도로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야.”

이미 가슴이 저릴 정도로 부럽지만 그 말은 안 할게.

하루, 네 마음이 불편해질 테니까.

+++

일을 끝내고 나온 도경은, 강 회장의 자택 앞에 서 있는 검은 차 조수석에 탔다.

운전석에는 우현이 앉아 있었다.

“들어오시지 그러셨어요. 강 회장님이 좋아하셨을 텐데.”

“봐서 좋을 거 없는 관계입니다.”

우현이 딱 잘라 말했다.

도경은 우현의 조각 같은 옆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남자는 모를 것이다.

강 회장이 손자 자랑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이 남자가 알게 될 날이 올까?

강 회장이 손자에게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강 회장님 건강하실 때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소망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데이트를 하자는 거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여자를 좋아하거든요.”

“다행입니다. 나는 하루를 좋아해서.”

“아, 그래요? 이거 우연이네요. 나도 하루를 좋아하는데.”

“윤도경 씨는.”

우현이 도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도경을 고요히 응시했다.

그 눈을 보며, 도경은 하루가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저런 눈으로 봐주면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루를 정말 좋아합니까?”

우현이 물었다.

“네? 그럼요, 정말 좋아하죠.”

우현이 무슨 뜻으로 질문한 건지 알지만, 도경은 가볍게 대답했다.

“저는 진지하게 묻는 겁니다, 윤도경 씨.”

“저도 이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대답하는 건데요.”

도경의 대답에 우현이 피식 웃었다.

“그거 압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따라 하게 된다는 거. 말투도, 행동도. 가끔 윤도경 씨는 하루랑 비슷한 말투를 사용해요.”

“아, 그거 하루가 제 말투 따라 하는 거예요. 걔가 절 좀 많이 좋아해야 말이죠.”

우현의 표정이 굳었다.

도경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잘난 남자가 왜 나를 질투해? 어떻게 갖다 대도 내가 이길 수가 없는데!’

도경은 우현을 불안하게 만드는 걸 관두기로 했다.

“왕자 형. 솔직하게 말하자면요. 어릴 때는 하루를 좋아했어요. 아마 이성으로서 좋아했을 수도 있죠. 그런데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요. 가족. 가족이에요.”

“가족이라…….”

“하루는 가족에 대해 좋은 기억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가족입니다. 걘 내 여동생이고, 가끔은 누나고, 그래요.”

“그렇군요.”

“안심하세요. 왕자 형이 질투할 만한 상황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걔랑 나는 홀딱 벗고 단둘이 한 방에 있어도 아무 일도 안 생길 거라니까요.”

도경과 하루가 홀딱 벗고 한 방에 있는 상상을 했는지, 우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와, 이 남자. 안 그렇게 생겨서 질투가 엄청 많구만!’

도경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그런 도경에게 우현이 말했다.

“거기 앞에 열어보세요.”

“어? 이 분위기는 설마 이벤트? 꽃다발 같은 거 들어 있고 그런 거 아니죠?”

도경이 앞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서류 봉투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하루가 어릴 때 살던 동네 근방에 있는 보육원이랑, 그 당시에 거기서 일했던 직원들의 정보입니다.”

“예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도경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경은 황급히 서류를 꺼냈다.

꽤 두툼했다.

“혀니 오빠란 분이 쫓겨난 게 하루가 9살 때라고 했죠? 그 전후로 5년간, 보육원에서 일한 직원들 정보입니다.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 정보도 있고요. 다만 혀니 오빠란 사람의 본명을 몰라서, ‘현’ 자가 들어가는 이름들을 주로 찾아봤는데.”

우현이 미간을 좁혔다.

“보면 알겠지만 그 혀니 오빠 또래의 남자들 중에서는 ‘현’ 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없습니다. 아마 불미스러운 일이라 보육원 측에서 정보를 삭제했을 수도 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전부 손으로 기록할 때였으니까.”

“그렇군요.”

“앞으로 해야 할 건, 거기에 적힌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서 일일이 물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사정도 설명해야 할 거고요. 저 혼자 하기에는 힘들 것 같아서, 도경 씨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같이해야죠.”

도경은 놀라웠다.

도경도 하루 몰래 ‘혀니 오빠’를 찾고는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보육원 측에서는 자기들이 가진 정보를 쉽게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이렇게 많은 정보를 알아내다니.

‘역시 세상은 돈이 최고여!’

라고 생각하는데, 우현이 물었다.

“그런데 그 혀니 오빠란 사람,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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