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가만 안 둘 거야.
희정은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었다.
“우리 사위가 같이 골프를 치면서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아버지의 친구 부부는 사위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희정보다 두 살 어린 딸을 가진 그들은, 유명한 제약회사 대표의 차남을 사위로 얻었다.
그게 자랑스러워 죽겠나 보다.
이런 점 때문에 희정은 부모님의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가 불편했다.
다른 때라면 이런 자리에 끼지 않을 텐데, 오늘은 그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뭐. 우리 며느리도 우리한테 정말 잘하지.”
희정의 어머니가 며느리 자랑을 하려고 했지만, 친구의 부인이 말을 끊었다.
“며느리, 다 소용없더라. 정말 사위만 한 게 없어. 며느리야 돌아서면 남인데, 사위는 진짜 친아들처럼 행동하더라고.”
그런 집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었지만, 희정은 끼어들지 않았다.
괜한 불똥이 튀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런데 희정이는? 아직 사귀는 사람 없고?”
아, 불똥이 튀었다.
희정은 어색하게 웃었다.
“얘는 공부를 하느라 바빠서. 대학원 다니잖아. 요새 논문 쓴다고 하던데.”
희정 어머니가 얼른 대답했다.
“아직도? 대학원 다닌 지 꽤 오래되지 않았어?”
“워낙 머리가 좋아서 교수님들이 안 놔주나 봐.”
친구 부부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희정의 오빠야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 하는 서울대를 나왔지만, 희정은 간신히 인서울을 했을 뿐이었다.
불편한 시간이 끝나고 친구들이 돌아간 후, 희정이 예상한 대로 화살이 희정에게로 돌아왔다.
“내가 진짜 속이 터져서!”
희정 어머니는 희정을 보며 가슴을 두드렸다.
“세정 그룹 가져오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더니,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여자한테 뺏기고. 요새는 집구석에서 나가지도 않고. 너, 대체 뭐 하고 사는 거니?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서른인데.”
항상 비슷한 레퍼토리였다.
작년에는 ‘내년이면 서른인데!’로 끝났다는 게 다르다면 달랐다.
희정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짜증나.’
침대에 앉아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쩌라는 거야? 강우현이 이하루가 좋다는데! 그리고 강우현, 성격도 드럽잖아. 그런 사위 얻는다고 아빠랑 골프를 치러 가줄 것 같아?’
우현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희정의 아버지와 골프를 치는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어우, 소름.’
그렇다고 재현을 건드릴 수도 없었다.
희정은 재현이 남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서 그런가 보다.
‘게다가 재현이도 하루를 좋아하고.’
재현의 표정이 떠올랐다.
‘걔가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봤어. 그렇게 화를 내는 것도 처음 보고. 늘 웃기만 하는 앤 줄 알았는데. 이하루도 진짜 죄 많은 여자야.’
하루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경이 떠올랐다.
아니, 사실은 늘 도경을 생각한다.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절대 아니야.’
도경이 떠오를 때마다, 희정은 있는 힘껏 부정했다.
‘내가 그런 남자를? 절대 안 되지.’
고개를 휘휘 저어 도경의 얼굴을 떨쳐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그런 남자랑 사귄다고 하면 엄마랑 아빠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우리 오빠도 그렇고.’
부모님도, 오빠도 남들의 시선을 많이 신경 썼다.
희정의 남편감으로는 적어도 제약회사 대표의 아들 정도는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욱신욱신 아팠다.
뭉뚝한 바늘이 심장 근처를 쿡, 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난 정말 이상했어. 사람 뒤에 아우라가 보이다니. 그날, 뭘 잘못 먹었었나? 그래, 그랬던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내가 그런 남자한테 두근거릴 리가 없잖아. 그 남자보다는 차라리 강재현이 낫겠다.’
희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강재현은 아니야. 어우, 강재현이랑 사귀는 건 상상만 해도 닭살이야, 진짜.’
희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한숨을 쉬는 일이 잦아졌다.
부모님이 눈치를 줄 때도, 오빠가 비아냥거릴 때도 한숨을 쉬지는 않았는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훅 뱉어내도, 가슴이 걸린 응어리가 빠져나오질 않았다.
커다란 돌덩어리가 가슴과 목을 콱 틀어막고 있었다.
희정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번호부에서 이하루의 이름을 불러왔다.
얼굴만 맞대면 싸우는 관계이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루와 함께 있으면 한숨이 나오진 않았다.
희정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빈 의자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조희정]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하루는 인상을 찌푸렸다.
‘얘가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안 그래도 명지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희정까지 이러니 정신이 없다.
‘하지만 도경이는…… 조희정이 나쁜 애는 아닌 것 같다고 했어.’
잠깐 고민을 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왜?”
[너, 지금 어디야?]
“왜 전화했는데?”
[시간 좀 내.]
“언제?”
[지금.]
“난.”
하루는 명지를 흘끗 돌아봤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자고 하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데이트 중이야.”
[그래? 그럼 어딘지 말해봐.]
“데이트 중이라니까?”
[나도 우현이 오빠랑 아는 사인데 뭘 그래? 이참에 셋이 얼굴 좀 봐.]
명지도 그렇고, 희정도 그렇고, 왜 다들 우리의 데이트에 끼고 싶어 하는 걸까?
‘다들 진짜 어떻게 된 정신상태인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학문을 배워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기다려봐.”
하루는 휴대폰 수화기를 막고 우현을 돌아봤다.
“오빠, 있잖아요.”
명지가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희정이가 지금 여기에 오고 싶다는데.”
우현이 미간을 좁혔다.
우현도 하루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우현이 말했다.
“오라고 해.”
“정말요?”
“셋이든, 넷이든 우리 둘이 데이트를 못 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조희정 성격이면 저 여자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물론 저 여자 편에 설 수도 있지만.”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요. 같이 좀 얘기해요.”
명지가 끼어들었다.
[누구 또 같이 있어? 뭐야, 이하루. 다른 사람도 같이 있는데 나는 왜 안 돼? 빨리 어딘지 말해. 어디야?]
희정이 물었다.
하루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희정에게 장소를 알려주자, 희정은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얘는 진짜 한결같네.’
하루는 내 친구들과 가족들까지 들먹이는 희정과 나를 똑같이 따라 하는 명지 중, 누가 더 싫은지 고민하며 삼겹살을 뒤집었다.
+++
“뭔 데이트를 이런 데서 해? 옷에 냄새 배게.”
투덜거리며 고깃집에 들어간 희정은 하루를 발견하고 다가가려다가 우뚝 멈췄다.
‘저 기집앤 뭐야?’
하루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루처럼 보이는데 다른 여자였다.
하루와 똑같은 헤어스타일에 비슷한 분위기의 얼굴, 하루가 입을 법한 옷차림까지.
여자는 맞은편에 앉은 두 남녀를 향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희정 쪽으로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저 넓은 어깨를 보니 남자는 우현이고 여자는 하루인 것 같다.
가만히 살펴보니, 여자는 화장이 짙었다.
하루의 얼굴을 따라서 화장을 한 것 같다.
‘미친. 왜 저러는 거지? 아니, 그리고 우현이 오빠랑 하루는 왜 저런 여자랑 같이 앉아 있는 거야? 데이트라며?’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희정은 일단 우현과 하루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나 왔어.”
우현과 하루를 향해 말했다.
우현과 하루는 진이 빠진 표정이었다.
저 이상한 여자랑 같이 있는 게 고통스러운가 보다.
‘그런데 왜 같이 있는 거지? 이하루야 착한 척하느라 그런다고 쳐도, 우현이 오빠는 저걸 두고 볼 이유가 없잖아.’
“이 여잔 누구예요?”
그때, 하루를 따라 한 여자가 물었다.
“저건 뭐야?”
희정도 지지 않고 턱짓으로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하루가 난처한 듯 웃었다.
“유명지 씨라고. 우현 오빠 팀원이야.”
“날 좋아한다는군.”
우현이 덧붙였다.
자길 좋아한다는 말을 저렇게 뻔뻔하게 내뱉다니.
역시 강우현이다.
‘내가 왜 저런 남자를 얻으려고 그렇게 전전긍긍했지?’
라고 생각하며, 희정이 말했다.
“그런데 저거 왜 저래? 너랑 똑같은데? 아, 그건가?”
희정은 이제야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미친 기집애가 너랑 우현이 오빠랑 사귀는 걸 알고, 널 따라 하면 우현이 오빠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구나? 맞지?”
하루는 놀라웠다.
이렇게 단숨에 상황을 판단하다니.
게다가 사람 면전에서 ‘미친 기집애’를 운운하다니.
우현이 희정을 부르라고 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완전 정신 나간 기집애네. 외모만 따라 한다고 될 일이 아닐 텐데.”
희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명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여자, 뭐예요? 내가 아까도 물었는데, 내 질문에는 대답도 안 해주고.”
“지랄을 한다, 지랄을. 말투 왜 저래? 저 말투도 하루 말투 따라 하는 거야? 야, 하루는 그렇게 앵앵거리는 말투 안 쓰거든.”
“저기요.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세요?”
“지금 보고 있네. 대체 화장을 얼마나 한 거야? 본판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화장을 했는데도 하루 반도 못 따라가는 거 봐라. 저래놓고 무슨 강우현 마음을 얻겠다고. 처절하네, 처절해.”
명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루는 감탄했다.
명지는 그 어떤 말을 들어도 생글생글 웃었는데, 희정은 앉은 지 5분도 되지 않아서 명지의 미소를 앗아갔다.
‘대단하다, 조희정.’
“저기요. 나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굴지 마세요. 기분 되게 별로거든요.”
“아, 틀렸어. 이하루였으면 그런 식으로 반응 안 해.”
명지가 하루를 흘끗 쳐다보고 다시 희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희정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내가 알려주겠니? 별꼴이다, 진짜.”
명지는 기분이 나빠 보였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통성명이나 해요. 그쪽은 내 이름을 아는데, 나는 그쪽 이름을 모르잖아요.”
명지가 희정을 달래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우현과 하루를 대하듯 희정을 상대하기로 한 모양이다.
제 딴에는 우아한 미소를 짓는 명지를 보며, 하루는 생각했다.
‘그래, 유명지 씨는 날 정말 우아하고 성숙한 여자로 보고 있구나. 난 정말 잘 살아왔어.’
희정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명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너 따위한테 내 이름을 알려줄 것 같니? 어디서 빌어먹지도 못할 것 같은 게.”
“저기요. 내가 그쪽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렇게…….”
“넌 이하루가 될 수 없어. 우현이 오빠 마음을 얻을 수도 없고. 그렇게 하루 따라 하면서 발버둥 쳐봐야 하루 발끝에나 미칠 것 같아? 내가 우현이 오빠 되게 어릴 때부터 봐왔거든. 그런데 이 남자, 게이인가 싶을 정도로 여자한테 마음을 안 줬어. 이런 눈으로 여자를 보는 거, 처음이야. 진짜 소름 돋을 정도라니까.”
희정이 명지의 말을 끊었다.
하루는 감동했다.
희정이 이렇게까지 말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조희정에 대한 호감도가 10 증가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아, 알겠다, 너. 어떤 앤지 알겠어. 너, 되게 후진 애지?”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우현 오빠, 이 여자…….”
“어디서 함부로 우현이 오빠 이름을 불러? 감히.”
“이봐요.”
“딱 보니까 그거네. 남자 잘 만나서 신세 고치고 싶은 타입. 어디서 예쁨도 못 받고 칭찬도 못 듣고, 열등감에 똘똘 뭉쳐서 자기보다 잘난 여자 있으면 똑같이 따라 하고, 그러면 사랑받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사랑해주질 않아서 남들 약점 잡아서 괴롭히고.”
명지의 표정이 굳었다.
더는 미소 짓지 않는 명지는, 하루의 얼굴과 똑같이 화장을 했음에도 하루처럼 보이지 않았다.
희정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
“남들 괴롭혀서 끌어내리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집에 가서 화장 지우고 거울 앞에 서면 웬 못생긴 여자가 서 있는데, 누구라도 이 여자 좀 사랑해줬으면 좋겠고. 사랑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외로워 죽겠는…….”
벌떡-!
명지가 일어났다.
명지의 눈가가 벌겠다.
우현과 하루가 그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았던 명지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희정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명지를 올려다봤다.
“내가 너무 맞는 말만 해서 무섭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그런가 보네. 그럼 얼른 고개 푹 숙이고 꺼져. 너무 불쌍해 보인다. 동정심이 생기려고 해.”
명지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명지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희정은 명지가 감정을 갈무리할 틈을 주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미련 떨고 있으면 더 불쌍해 보여. 어디 가서 불쌍하다는 소리 듣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 이러다가 내가 너한테 불쌍하다고 하게 되면 어떡해? 너 같은 애, 불쌍하게 여기고 싶지도 않은데,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주질 않거든. 불쌍한 기집애.”
“오빠!”
명지가 비명처럼 외쳤다.
가게 안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쪽을 돌아봤다.
“이 여자, 이 여자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예요! 두 번 다시는 이 여자,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해요!”
명지는 버럭 외치고는 도망치듯 가게를 나왔다.
겉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나와서 차가운 바람이 파고들었지만 추위를 느끼지도 못했다.
오히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더웠다.
‘내가 불쌍하다고?’
동정심 가득한 희정의 눈빛이 떠올랐다.
‘내가 불쌍해?’
명지는 이를 악물고 고깃집을 노려봤다.
창문 안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현과 하루와 대화를 나누는 희정의 모습이 보였다.
‘가만 안 둬. 진짜로 가만 안 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