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오늘 밤 같이 잘까?
눈을 뜨자, 눈물을 흘리는 하루의 얼굴이 보였다.
울지 마. 무슨 일이야? 뭐가 널 슬프게 하는 거지?
아니,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지.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진심이에요. 나, 오빠를 사랑해요. 진심으로.
그래, 그런 말이었다.
진심.
진심이라는 것도 연기인가?
아니, 라고 그녀의 눈물 젖은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혀 왔다.
이런 순간에 그녀에게 고백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인생에 이런 감미로운 순간이 올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하루를 내려다봤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나도 그렇다고 말해야 하는데.
가슴이 벅차서, 그 벅찬 것에 목이 메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우현의 침묵을 다르게 오해한 듯, 하루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물론 오빠한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오빠가 나한테 잘해주는 게 전부 계약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아, 미안해요. 이건 슬퍼서 우는 게 아니고요. 그냥. 그냥요. 이상하게 눈물이 나서요. 아무튼 그래서.”
“하루야.”
우현은 간신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나도야.”
“예?”
“나도 그래.”
이런 멋대가리 없는 대답이라니.
지난번에 놀이공원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난 정말 센스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야.’
라고 생각하며, 두 손으로 하루의 볼을 감쌌다.
“나도 널 사랑해.”
“아니요, 오빠. 이런 순간까지 연기하지는 않아도 돼요. 우리 그냥 계약관계에서 벗어나서…….”
“늘. 항상. 하루야.”
우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진심이었어. 단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어.”
하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나를 모르는 순간에도, 네가 나를 언뜻 알게 되었을 때도, 그리고 바로 지금도. 나는 진심이야.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이 거짓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어.”
“거짓말…….”
“정말이야.”
“그래도…… 그래도 오빠는…… 그래도…….”
하루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런 하루가 사랑스러웠다.
입을 맞추고 싶지만 참았다.
지금은 이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나의 진심을 전해야만 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매일 만나고 싶어 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의 목소리를 매일 듣고 싶어 하고. 내가 그럴 것 같아?”
하루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연기가 아니었어. 진심이라서 매일 네가 그립고, 진심이라서 매일 네 목소리를 듣고 싶고, 진심이라서 네 얼굴을 보면 힘이 났던 거야.”
우현의 음성이 감미롭게 하루의 귓가를 간질였다.
하루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내가 진심이라 했더니, 자기도 진심이라 말한다.
단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단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언제부터 진심이었을까?
단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닌 적 없다면, 우리가 계약연애를 시작하는 그 시점에도 진심이었던 걸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와 내가 평행선이 아닌, 같은 선 위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정말 내가 좋아요?”
“응.”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응.”
“내가 막…… 주접스럽게 먹어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응.”
“내가 매일 칭얼거리고 못되게 굴어도?”
“응.”
“내가…… 내가 지금 오빠랑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음란한 여자여도?”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그건 굉장히 감사할 일인데.”
그의 입술이 하루의 입술 위에 겹쳐졌다.
그의 입술은 평소보다 뜨거웠다.
하루는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리고 그를 받아들였다.
입안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았다.
뜨겁게 흘러드는 타액이 감미롭게 하루의 입안을 적셨다.
그는 하루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슬며시 하루를 소파에 눕혔다.
하루와 우현의 몸이 겹쳐졌다.
하루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의 전부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처음으로 코 옆에 닿는 그의 숨결을 느꼈다.
간지럽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쉬운 마음에 눈을 뜨려다가 다시 감았다.
그의 입술이 하루의 이마에 닿았기 때문이다.
촉촉한 입술이 낙인처럼 하루의 이마를, 눈썹을, 눈을, 콧등과 볼을 내리눌렀다.
그의 입술이 귓바퀴에 닿았을 때, 하루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는 하루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가 놔주고, 살며시 핥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하루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귓바퀴를 따라 움직이는 선명한 느낌에 하루는 전율했다.
그는 한참 동안 하루의 귀를 지분거렸고, 가끔 깨물 때마다 하루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고, 간지러우면서도 옥죄는 생경한 느낌이 전신을 채웠다.
귓가에 머무르던 그의 뜨거운 입술이 아래로 내려가, 하루의 목덜미에 닿았을 때.
“아……!”
더는 견디지 못한 신음이 입술 밖으로 새어나왔다.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도, 하루의 몸을 누르고 있는 그의 무게도, 전부 뜨겁게 느껴졌다.
하루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우현도 천천히 하루의 목에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평소보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섹시하다고, 하루는 생각했다.
“음란한 생각으로 따지자면.”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하루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내가 더 할걸.”
우현이 하루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베이비키스였다.
우현은 하루가 귀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쪽, 쪽, 쪽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농밀하고 뜨거운 키스도 좋지만, 이렇게 사랑받는 것 같은 입맞춤도 좋았다.
한동안 하루에게 뽀뽀를 해준 우현이 슬며시 하루의 위에서 내려왔다.
“여기까지만 해야겠어.”
우현이 하루를 일으켜주며 말했다.
“더 하면 더 위험한 짓을 하게 될 것 같아.”
위험한 짓?
의아한 마음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무슨 뜻인지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순간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걸,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서로의 진심을 알자마자 더 많은 걸 욕심내다니.
이래서야 ‘음란’은 ‘이하루’라는 공식이 생겨도 할 말이 없다.
“뭐 좀 먹을래?”
우현이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네, 저. 물이요. 여기 물 맛집이잖아요.”
아까 우현이 떠온 물이 그대로 있었지만, 하루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말했다.
“그래, 잠깐만 기다려.”
우현도 아까 떠온 물이 그대로 있다는 걸 알았지만, 주방에 가서 새 컵을 꺼냈다.
‘큰일 날 뻔했네.’
하루는 너무 자극적이었다.
우현의 아래에 갇혀 꼼질거리는 그녀는 우현의 은밀한 감정을 무섭도록 자극했다.
하마터면 진짜로 끝까지 갈 뻔했다.
‘그럼 안 되지.’
아직 하루에게는 밝히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다.
하루가 오래전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난 왕자 오빠가 우현이라는 걸 알게 되어도, 지금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진심을 고백하자마자 덮치려고 하다니.’
그런 남자는 최악이다.
‘성급하게 굴면 안 돼, 강우현. 좀 더 자제하고, 하루를 아껴줄 필요가 있어. 네 욕심만 채우려고 하지 마.’
우현은 컵에 물을 가득 담아 뒤로 돌아섰다.
하루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의 공간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얼마나 꿈만 같은 현실인가.
‘그래, 지금은 여기까지만. 너무 욕심내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고 하루의 곁으로 다가갔건만, 그녀의 옆에 앉는 순간 우현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오늘, 자고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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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뒤척이던 희정은 결국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 진짜!”
벌써 며칠째, 도경이 희정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자꾸 생각나는 거야? 짜증나게.”
해사하게 웃던 도경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뭐가 문제야, 정말? 그런 남자가 뭐 볼 게 있다고. 그래봐야 몸 쓰는 일이나 하는 남자인데.”
희정을 소개받고 싶어 하는 남자들은 많았다.
선 자리도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집안도 좋고, 직업도 좋은 남자들인데도 전부 거절한 이유는.
‘왜 거절했었지? 아, 맞다. 강우현.’
우현 때문이었다.
희정은 우현 정도 되는 남자가 아니면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쭉 희정의 목표였다.
강우현과 결혼해서 세정 그룹을 등 뒤에 업는 것.
하지만 요새는 우현이 생각나지도 않는다.
희정의 머릿속을 채운 건 끔찍했던 하루의 과거와 윤도경, 그 남자뿐.
희정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 정말 어떡하지? 설마…… 내가 그런 남자한테 반한 건 아니겠지? 그래, 아니겠지. 내가 뭐가 부족해서. 게다가 그 남자는 이하루 친구고. 이하루 친구.”
하루의 친구라고 생각하니, 미영과 은서가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그래, 최악이야. 최악인데…….”
미소 짓는 도경의 얼굴만큼은 근사했다.
“이건 그냥 그 날 내 상태가 좀 안 좋아서 착각을 하는 걸 거야. 다시 보면 그 남자, 그냥 별 볼 일 없는 그런 남자일걸.”
그렇다면 도경을 한 번 더 만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먼저 도경에게 만나자고 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희정은 한참 고민하다가 휴대폰으로 하루의 이름을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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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현을 쳐다봤다.
“자고…… 가라고요?”
“아, 싫으면…….”
“아니요. 싫지 않아요. 자고 갈래요.”
하루가 얼른 말했다.
우현이 빙그레 웃었다.
“내 여자는 정말 솔직하네.”
내 여자라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는 그가 그 어떤 달콤한 말을 해도, ‘연기’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받아들였다.
때문에 어느 정도는 걸러서 들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의 모든 언행이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느낌이 남달랐다.
‘내가 강우현의 여자야! 내가 강우현의 여자라고!’
하루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잔뜩 들뜬 하루와 달리 우현은 평소처럼 느긋해 보였다.
‘어휴, 진정 좀 하자. 나 혼자 왜 이렇게 난리래.’
하루는 우아하고 여유롭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내가 갈아입을 옷이 없네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아, 그렇군. 그럼 출근하는 길에 한 벌 사면 되지.”
“예? 아뇨, 아뇨. 전 그렇게 일회용으로 옷을 막 입고 버리지 않아요.”
“버리긴 왜 버려? 뒀다 또 입으면 되지.”
“아, 그러네요.”
“하루야.”
“네?”
“혹시 긴장했어?”
“예? 제가요? 아니요. 전 지금 되게 여유롭고 평화로운데요. 저기 늘어져서 자고 있는 연두처럼.”
연두는 완전히 뒤집어져서 혀를 내밀고 자고 있었다.
우현이 빙그레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하루의 턱을 살짝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그래, 저렇게 자도 돼. 내 옆에서.”
은밀하게 내려앉은 그의 음성이 하루의 귓가를 파고 들어왔다.
이 남자는 정말 얄밉도록 섹시하다.
“내가 저렇게 자도, 좋아요?”
“자다가 춤을 춰도 좋아.”
“자다가 춤까지 추고 그러진 않아요.”
“그거 아쉽네.”
“오빠는 자다가 춤도 추고 그러나 보죠?”
“네가 원한다면.”
하루는 그와 바보 같은 농담을 주고받는 게 즐거웠다.
“오빠, 나랑 자고 싶어서 죽겠구나?”
“응, 나는 늘 너랑 자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어.”
농담으로 한 말인데 이렇게 진지하게 대답하다니.
하루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보내줄게. 아무래도 내가 못 참을 것 같다.”
우현이 덧붙였다.
“뭘 못 참아요?”
알면서도 물었다.
도발적으로 올려다보는 하루를 보며 우현이 말했다.
“지금 당장 알려줄까?”
하루는 네, 라고 대답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그와 역사를 이룰 만한 날이 아니었다.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루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고로 섹시한 표정을 지으며, 우현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뭘 못 참는지는 다음에 알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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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집 앞에서 내려준 우현은, 하루가 들어간 후에도 한동안 집 앞에 서 있었다.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직도 이 모든 것들이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러다가 눈을 뜨면 하루를 다시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있는 게 아닐까, 라는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행복했다.
이윽고 하루의 방 창문에 불이 들어왔다.
하루가 창문 앞에 서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현도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 차에 탔다.
떠나기 아쉽지만 우현이 돌아가지 않으면 하루도 잠을 못 잘 것이다.
우현은 시동을 걸며 생각했다.
‘벌써 보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