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진심이야.
우현은 하루를 마주할 때마다 늘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특히 이렇게 하루가 먼저 우현에게 다가와줄 때는 더욱더.
아파트 앞에서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루의 모습에 가슴이 벅찼다.
밤인데도 세상이 찬란하게 느껴졌다.
우현은 달려가 하루를 품에 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그녀를 안을 때마다 무언가 굉장한 것이 가슴 속에 넘쳐흘렀다.
“이건 꿈인가? 네가 먼저 우리 집에 와주다니.”
“늘 오빠가 우리 집으로 왔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오빠를 보러 오고 싶었어요.”
얇은 셔츠 한 장만 입어서, 가슴에 하루의 숨이 파고 들어왔다.
예상치 못하게 아랫배 부근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우현은 얼른 하루에게서 떨어졌다.
하루가 왜 그러냐는 듯 우현을 올려다봤다.
그 순진한 눈망울을 마주하자, 우현은 민망해졌다.
너는 모르겠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널 얼마나 원하는지.
내 머릿속에 어떤 욕망이 들끓고 있는지.
우현은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혼자 왔어? 늦었는데 위험하게. 보고 싶다고 하면 내가 갈 텐데.”
“항상 오빠가 왔으니까요. 내가 와서 불편해요?”
“그럴 리가.”
우현은 다시 하루와 눈을 맞췄다.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양쪽 볼을 감쌌다.
“기뻐. 가슴이 벅차.”
“나도 전에 오빠가 우리 집 앞에 있을 때 그랬어요.”
“그랬어? 그럼 매일 그래야겠네.”
“그럴래요?”
“아니면 이참에 같이 살까?”
“그럴까?”
둘은 서로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데 오빠, 안 추워요? 점퍼라도 걸치고 나오지.”
“아, 그러게.”
서두르느라 뭘 걸치는 것도 잊었다.
“오빠는 이렇게 입고 자나 봐요. 잠옷도 근사하네.”
우현은 파자마 차림이었다.
“넌 뭘 입고 자는데?”
“홀딱 벗고 자요.”
“그럼 저번에 우리 집에서 잘 땐 왜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잤어?”
“수줍어서요.”
둘은 또 키득키득 웃었다.
우현은 하루와 바보 같은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꿈처럼 행복했다.
“추운데 어디 들어갈까?”
“파자마 차림으로요?”
“옷 갈아입고 나올게.”
“오빠 네 집에 가요.”
“응?”
“연두도 볼 겸.”
“아, 그럴래?”
이 여자가 오늘 내 심장 떨어뜨릴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다.
하루가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 우현은 벌써 몇 번이나 심장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그럼 들어갈까?”
우현이 하루의 손을 잡았다.
“네, 좋아요.”
“정말이야?”
“뭐가요?”
“우리 집에 가자는 거.”
“네. 안 돼요?”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런데 왜요? 혹시…… 여자라도 숨겨놨어요?”
“그럴 리가. 아냐, 그럼. 들어가자.”
“네.”
우현은 하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이것도 계약연애 중이라서 하는 행동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혼란스러웠다.
우현은 하루가 이 시간에 혼자 사는 남성의 집에 간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나 있을지 궁금했다.
‘아니, 모를 거야. 모쏠이라고 했잖아.’
하루는 순수하게 연두도 보고 추위도 피하려고 우현의 집으로 향하는 게 틀림없다.
우현의 안에서 하루는 아직도 어릴 때 만난 그 어린 소녀의 이미지였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작고 연약한 존재.
우현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하루는 우현과 비슷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우현 오빠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겠다고 한 건, 좀 그랬나? 하지만 연두도 있잖아. 괜찮겠지? 너무 헤프게 보이진 않겠지? 하지만…… 난 헤퍼! 지금도 이 오빠랑 키스할 생각뿐이잖아! 아, 진짜. 이건 다 이 남자가 너무 키스를 잘해서야! 그나저나…… 역시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키스를 하면…… 내가 이 오빠를 덮칠지도 모르는데. 어떡하지?’
딩-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소리에, 둘 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둘은 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웃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현관문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둘은 묘한 긴장감에 쌓여 있었다.
연두가 뛰어나와 두 사람을 맞아주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하루와 우현은 이곳에 연두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 마실래?”
“음. 물 마실래요.”
“물이 인기가 많군.”
“누가 또 물 마셨어요?”
“재현이도 우리 집에 오면 물만 마시고 가더라고.”
“물 맛집인가 보네요.”
우현이 머그컵에 물을 떠왔다.
하루는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 머그컵을 내려다보며, 이 남자의 집에 우리의 커플 컵이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생각해봤다.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우리는 진짜 연인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상한 일이다.
우현과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사랑이 무서웠던 것이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우현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남자는 한결같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다 이런 걸까?
마치 사람이 변한 것처럼 사랑에 취해,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만 몰입하게 되는 걸까?
“무슨 생각해?”
자연스럽게 하루의 옆에 앉은 우현이 물었다.
하루는 우현을 돌아봤다.
“오빠 생각이요.”
“그래? 나는 네 생각하는데.”
“공평하네요. 오빠는 내 생각, 나는 오빠 생각.”
“공평한 게 좋지.”
“맞아요, 공평한 게 좋죠.”
“그래도 우리 사이에선, 하루 네가 좀 더 많이 누렸으면 좋겠는데.”
“이미 그러고 있어요.”
“나는 더 해주고 싶어.”
그의 말이 진심처럼 들려와서, 하루는 웃었다.
“그러다가 재산 탕진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이하루는 얻을 수 있잖아.”
한바탕 하루와 우현을 반기느라 꼬리를 흔들던 연두는 졸리는지 소파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다.
깨끗하고 조용한 공간은 그의 향기로 가득했고, 그의 뒤쪽에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는 진청색 밤하늘과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법 같은 시간이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만약 저 우주를 단둘이 헤매게 된대도, 그와 함께라면 두렵지 않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현이 엄지로 하루의 귀와 볼을 쓰다듬었다.
하루는 우현의 어깨 너머에 있던 시선을 그의 눈동자에 고정시켰다.
그의 맑은 눈동자는 밤하늘보다 깊었다.
하루는 손을 뻗어 그의 눈으로 가지고 갔다.
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우현의 긴 속눈썹을 검지로 살며시 쓸었다.
간지러운지 그가 살짝 찡그리는 게 귀여웠다.
그의 눈가에서 사락사락 움직이던 손을 살며시 내려 그의 볼을, 입술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우현은 하루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게 좋았다.
내가 그에게 뭘 해도 괜찮다는 점이.
이 얼굴을 만지는 것도, 눈을 만지는 것도, 입술을 만지는 것도, 내게만 허락된 것이라는 점이.
하루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 번도 허락된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 칭얼거리는 것도, 맛있는 걸 사달라고 조르는 것도, 아빠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먼저 눕는 것도, 식탁에 밥투정을 하는 것도, 심지어 엄마의 품에 안기는 것도.
아무 것도 허락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이 마법 같은 남자는 내게 모든 것을 허락한다.
그리하여 푹 빠져버렸다.
그저 조심스레 감춰야만 하는 작디작은 사랑일 뿐이라고, 1년이 지나 헤어짐의 순간이 오면 지금껏 내가 이별을 해왔듯 그렇게 이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 사람이 내 일상이 되어버렸거든.
나희가 애인과 헤어질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의 일상.
이제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겠다.
우현은 어느새 하루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연기여도 괜찮다고, 우리의 관계가 그저 계약연애일 뿐이라도 괜찮다고, 이렇게라도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어졌다.
그의 달콤한 행동을 받아들이면서도 계약을 위한 연기겠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걸 이제는 못 견디겠다.
그를 향해 내 진심을 보이면서도 계약을 위한 연기로 받아들이겠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걸 더는 못 참겠다.
왜일까?
그냥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라도 그의 곁에 있으면 되는 건데, 왜 자꾸만 욕심이 나는 걸까?
나는 이렇게나 욕심이 많은 애였나?
‘이렇게 욕심이 많아서야 나쁜 아이라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겠어, 정말.’
욕심내면 안 돼, 여기서 멈춰.
더 이상 나아가면 그를 완전히 잃게 될지도 몰라.
가짜 애인이라는 미명 하에 그의 곁에 있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거야.
머릿속에서 누군가 그렇게 속삭였지만, 그 소리는 너무 작았다.
네 마음을 밝혀.
더는 참지 않아도 돼.
늘 참았잖아. 늘 견뎠잖아.
사랑 정도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이대로 있어봐야 시간 낭비야.
설령 네 진심이 부담스러워서 헤어지자고 하더라도, 네 진심을 전할 수는 있는 거잖아.
평생 그 마음 감출 거야? 고백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다가 이별할 거야?
이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우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지금 나를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금 내 표정은 엉망진창일 테니까.
내 마음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해서 굉장히 한심해 보일 테니까.
‘뭐가 더 한심한 걸까? 내가 내 진심을 전하지 못하는 거? 아니면 내 진심을 전하고 그의 곁에 몇 달 더 있을 기회를 잃는 거?’
전자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만, 지금 하루가 가진 것은 그의 껍데기뿐이었다.
행복하면서도 가슴 한켠에 바람이 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잃고 싶지 않은걸. 조금이라도 더 이 다정함을 느끼고 싶은 걸.’
하지만 몇 달 후에는?
시간은 꾸준히 흘렀고, 1년이었던 계약기간은 이제 9개월도 남지 않았다.
그와 함께 새해를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이다.
눈 한 번 깜빡하면 3월, 또 깜빡하면 4월, 그렇게 11월이 될 것이다.
그와 계약이 종료되는 날.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건 싫어.”
속마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응?”
우현이 눈을 뜨려고 했다.
“아뇨, 오빠. 계속 눈 감고 있어요.”
그에게 지금 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눈을 뜨면 마법이 풀리고, 조금씩 피어오르는 용기가 깨끗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용기.
그래, 용기의 문제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다.
이 남자를 얻으려면, 이 남자의 진심을 얻으려면, 내가 먼저 용기를 내서 진심을 보여야만 한다.
하루는 크게 심호흡했다.
“오빠, 있잖아요. 눈 뜨지 말고 들으세요.”
“응.”
“오빠, 있죠. 사실 전 되게 욕심쟁이인가 봐요.”
“그래? 난 네가 좀 더 욕심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우현은 항상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게 좋았다.
하루는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더 많기 힘들 걸요. 지금 전 어마어마한 걸 욕심내고 있거든요.”
“그래? 뭘 갖고 싶은데? 부가티?”
하루는 키득키득 웃었다.
“아니요. 오빠요.”
순간, 그가 숨을 멈추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루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
“강우현이라는 남자를 가지고 싶어요.”
그냥 고백을 하는 것뿐인데도 눈물이 나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지금 슬픈 걸까?
그를 잃을지도 몰라서 두려운 걸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가슴에 무언가 찬란하고 따뜻한 것이 충만해져서, 비어 있던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가슴이 꽉 찬 기분이 처음이라 눈물이 나는 것 같다.
“이거는요, 오빠. 장난도 아니고, 농담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의 계약 때문에 하는 연기도 아니에요. 정말로 아니에요. 이거는요.”
하루는 두 손을 그의 어깨에 대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이미 두 눈을 뜨고 있었다.
부릅뜬 그의 눈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하루는 알 수 없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간신히 끌어올린 용기가 사라지려 했지만, 하루는 힘껏 미소 지으며 끝까지 말했다.
“제 진심이에요. 나, 오빠를 사랑해요.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