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
“신상명세를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유명지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하느라 좀 오래 걸렸어.”
우현의 집을 찾아온 재현은 다른 때처럼 잡담을 늘어놓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현이 직접 조사하지 않은 이유는, 우현이 움직이면 명지가 눈치를 챌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와 똑같은 차림새로 등장한 명지를 봤을 때, 직접 나서지 않고 재현에게 맡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친는 의사. 흔히 말하는 개룡남이고. 모친은 약사야. 그럭저럭 사는, 중산층 집안이고.”
유명지 부친은 처세술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서, 상류층에 끼려고 노력은 하지만 결과는 그저 그랬다.
“유명지 부친은 결혼을 하면서 자기 가족이랑 연을 끊었는데도, 출신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야. 그래서인지 부모의 욕심이 고스란히 유명지한테까지 전해져서, 유명지도 상류층에 끼려고 어마어마하게 노력을 하는 것 같아. 우리 쪽 파티에 왔던 것도 친구를 졸라서 왔다더라.”
“그 친구가 누군데?”
재현이 우현도 아는 이름을 말했다.
“그쪽에는 언질을 해뒀어. 유명지가 형에 대해 뭘 묻더라도 흘리지 말라고. 그리고 유명지 본인도 소문이 안 좋아. 욕심도 많고 질투도 많아서, 남이 자기보다 좋은 걸 가지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한다나 봐. 특히 남자 쪽으로.”
“남자?”
“어릴 때부터 친구 애인을 뺏기로 유명했대. 중, 고등학교 때야 뭐. 다들 어릴 때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대학 다닐 때 큰 사건이 하나 있었나 봐.”
“어떤 사건?”
“유명지 동아리 선배가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결혼 얘기까지 나오고 있었던 모양이야. 동거도 하는 중이었고. 그런데 유명지가 선배의 남자를 건드린 거지. 그런 짓을 하는 현장을 들켰다는 얘기도 있고, 약을 써서 남자를 재운 다음에 사진을 촬영해서 선배한테 보냈다는 얘기도 있고.”
“약까지 썼다고?”
“확실하진 않은데 그렇다는 얘기가 있더라고. 문제는 그 후에 유명지의 선배가 자살을 했다는 거야.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난리였는데 유명지는 뻔뻔하게 학교를 다녔고, 선배의 남자랑도 곧 헤어졌다고 하더라.”
우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에서 모두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뻔뻔하게 우현을 ‘선배’라고 부르는 게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심상치 않은 여자였다.
“형, 이거 만만치 않겠어. 이런 애들은 약점이 없어. 뭘 해도 거리낄 게 없거든. 아마 그쪽 부모를 건드려도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할걸. 그리고 자기가 백 있는 남자랑 결혼하면 다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할 거고. 예를 들자면, 형 같은 남자.”
“…….”
“이쪽이 불법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한, 유명지를 먼저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불법적이라…….”
“없애버리는 거지. 유명지가 없어지면 문젯거리도 사라지는 거잖아. 없애는 게 아니라면 섣불리 건드려선 안 돼. 이런 타입은 잘못 건드리면 더 악에 받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게 되거든. 잃을 게 있어도 이 정도인데, 잃을 게 없어지면 더 무서워지겠지.”
우현은 미간을 좁히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우선은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게 좋겠군.”
“응. 그러면서 걔 성격을 파악하고 방법을 찾아내야 해. 하지만 형, 단둘이 만나는 건 절대로 안 돼. 걔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형이 먹는 음식에 약을 탈 수도 있어.”
“오늘은 유명지가 언제 셋이서 한번 만나자고 하더군.”
“셋?”
“나랑 하루, 그리고 유명지.”
“그럼 그렇게 해줘. 형수님이 같은 여자니까 유명지를 더 잘 관찰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우현은 하루를 명지 같은 위험한 여자에게 노출시키는 게 걱정이 됐다.
“형, 형수님을 감추기만 해서 되는 문제가 아냐. 오히려 유명지가 몰래 형수님을 찾아가는 게 큰일인 거야.”
“그건 그렇군.”
“유명지를 잘 지켜봐. 지금은 유명지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만, 분명 유명지가 실수할 때가 올 거야. 그때, 어떻게든 유명지를 세상에서 지워야 해.”
“죽인다고?”
“에이, 형.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해?”
재현이 씩 웃었다.
“유명지를 어딘가에 넣어버려야지. 다시는 세상 빛을 못 볼 곳으로.”
+++
“밥을 먹을 때 말이에요. 혀가 먼저 마중을 나와요. 이렇게.”
하루는 자신의 앞에서 혀를 내미는 여자를 난처한 기분으로 지켜봤다.
오늘의 고객은 여성이었는데, 만나서 의뢰를 하고 싶다고 요청해왔다.
최근 홀로서기는 이별 사유를 알아야 의뢰를 받아주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보통은 메일로 긴 사연을 써서 보내지만, 때때로 이렇게 미팅을 요청하고 한풀이를 하는 고객들도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이별하려는 이유가 정말 이별할 만한 이유인지 알고 싶을 뿐인 경우였다.
지금의 고객도 그런 부류인 듯 했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친구들한테 남친을 소개시켜준 적이 있거든요. 나중에 친구 한 명이 그러더라고요. 제 남친이 밥 먹을 때 혀를 너무 내미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 친구가 좀 깔끔 떠는 성격이기는 해요. 아무튼 그래서 그다음부터 지켜봤는데 정말 그런 거예요.”
“그렇군요.”
“고쳐보라고 말은 했는데 이게 어릴 때부터 그래서 그런지 못 고치더라고요. 게다가 뭐라는 줄 아세요? 자기 가족들은 다 그렇게 먹는대요. 그게 맛있게 먹는 거라나? 게다가 돈이요.”
“돈이요?”
“남친이 현금을 안 들고 다녀요. 카드만 가지고 다니거든요. 그런데 데이트를 하다 보면 군것질 같은 것도 하게 되잖아요. 그럼 자기가 사 오겠다고 저한테 돈 좀 달래요. 그래서 돈 주면 한 3천 원짜리 사고서 남은 2천 원은 자기 주머니에 넣어요. 저한테 안 돌려주고.”
아, 그건 좀 싫다.
“처음에는 백 원, 이백 원 수준이라서 그냥 모르는 척했는데, 요샌 천 원, 이천 원씩 자기가 챙기더라고요. 저번에는 만 원 줬는데 이천 원짜리 사고 남은 팔천 원을 챙기길래 제가 뭐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주려고 했지, 뭔 팔천 원 갖고 그렇게 예민해? 그러더라고요! 이게 예민한 거예요?”
하루는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어주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지면 되지, 왜 계속 사귀나 싶으시죠? 하아. 제 남친이 저것만 빼면 진짜 다 좋거든요. 저한테 정말 잘해요. 사귄 지 벌써 1년이 넘었는데도 매일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고, 연락도 잘 하고. 얘랑 헤어지면 얘보다 더 잘해주는 남자는 찾기 힘들 것 같아요. 어떡하죠?”
여자가 하루를 쳐다봤다.
“저, 얘랑 헤어져야 할까요?”
“고객님. 저희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기가 힘들어요. 고객님이 이별을 결심하셨을 때, 그걸 도와드리는 게 저희 일이거든요.”
“하지만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평소에는 좋다가도. 사람이 밥을 안 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 밥 먹을 때마다 저 꼴 봐야 하고, 그러니까요. 돈도 그렇고. 걔가 그런 식으로 챙긴 돈만 몇십만 원이 넘을 거예요.”
“그러시군요.”
“그런데 정말 잘해준단 말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사귄 남자들 중에서 얘만큼 한결 같이 잘하는 애는 없었어요. 아, 진짜 어떡하지.”
여자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루는 묵묵히 그녀를 지켜봤다.
결론을 내리는 건 하루의 몫이 아니었다.
그녀가 답을 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루는 우현을 생각했다.
‘우현 오빠에게도 단점이 있을까?’
사랑을 시작한 커플은 사랑에 취해 상대의 단점을 보지 못한다.
초반에는 상대의 단점조차 사랑스럽게 보인다고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사귐이 일상이 되면서부터 상대의 단점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예쁘기만 했던 행동이 나중에는 짜증나서 견딜 수 없는 행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도 그럴까? 그럼 나는 우현 오빠의 어떤 부분을 못 견디게 싫어하게 될까?’
생각을 해봐도 우현에게는 단점이 없었다.
‘진짜 완벽한 남자야. 못난 구석이 하나도 없어.’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저, 그냥 안 헤어질래요.”
“그러시겠어요?”
“네. 얘가 어디 가서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술, 도박 같은 걸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헤어질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러시군요.”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아, 이거 상담료 같은 거 내야 하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네, 죄송해요. 그럼 가볼게요.”
여자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는 것과 동시에 재현이 들어왔다.
“안에서 상담 중인 것 같아서 기다렸어. 의뢰하겠대?”
재현이 하루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아니, 그냥 헤어지지 않기로 했대.”
하루는 여자의 상담 내용을 간추려서 얘기해주었다.
“아, 그거 진짜 싫지. 밥 먹을 때 혀 마중 나오는 거.”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많아? 남이 밥 먹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는데.”
“의외로 많아. 여자들 중에서도 있어. 되게 도도하게 생겼는데 그런 식으로 먹는 걸 보면 정이 뚝 떨어지더라고.”
“그렇구나.”
하루는 자기가 어떻게 밥을 먹는지 떠올려봤지만 생각나질 않았다.
앞으로 밥 먹을 때 조심해야겠다.
“돈 남은 거 챙기는 건 진짜 별로다.”
“그치? 나도 그 생각했어.”
“그 두 사람, 금방 헤어지겠네.”
“근데 또 의외로 안 헤어지고 잘 사귀다가 결혼까지 하는 경우도 있더라고.”
“그래?”
“응, 나 대학 다닐 때 우리 과 선배도 매일 남자친구 욕했거든. 그런데 졸업하자마자 결혼했어. 애 둘이나 낳고 잘살고 있고.”
“그런 경우도 있구나. 그나저나, 대학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재현의 음성이 낮아졌다.
“형수님, 유명지 알지?”
“어? 네가 유명지를 어떻게 알아?”
“형이 곤란하다고 해서 내가 조사를 좀 했거든.”
“아, 그렇구나.”
의외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우현이 재현을 그리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그런 부탁을 하는 사이라니.
그리고 우현 정도 되는 사람이면 명지 정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움을 청하다니.
‘도움을 청해야 할 정도로 곤란한 상황인가?’
우현이 걱정스러웠다.
재현은,
“형수님도 알아야 할 것 같아.”
라면서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무섭네.”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응, 무섭지. 형수님, 조심해야 해. 그 여자는 형을 갖고 싶어 해. 아니, 형이 아니라 형 뒤에 있는 걸 갖고 싶어 하지. 그러니까 형한테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 거야.”
“나한테 하겠네. 내가 눈엣가시일 테니까.”
“응. 아니면…… 대학 때 했던 짓을 반복할 수도 있고.”
“약을 먹이는 거? 설마 또 그럴까? 그것도 우현 오빠를 상대로?”
“형수님, 사람은 한 번 한 짓을 반복하게 돼 있어. 반성이 없을 경우엔 더더욱 그렇지.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거기까지 말하고 재현은 입을 다물었다.
명지가 우현에게 약을 먹이든 술을 먹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신을 잃게 한 후 우현과 관계를 가진 듯한 증거를 남긴다면, 과거가 되풀이될 것이다.
명지의 대학 시절 과거가 아닌, 강 회장 집안의 과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현의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재현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와 강 회장이 나누던 대화를 듣게 된 것이다.
‘우현이 형은 모를 거야.’
안다면 우현은 괴로워하리라.
이 사실은 우현이 평생 몰라야 한다.
그러니 하루에게도 말할 수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우현 오빠를 지킬게.”
하루의 목소리에, 재현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응?”
“예전에 내 소중한 사람이 누명을 쓴 적이 있어. 나는 그때 너무 어리고 힘이 없어서 그 사람을 지킬 수가 없었어.”
하루는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재현과 눈을 맞췄다.
“나는 지금도 힘이 없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을 거야. 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게. 걱정하지 마, 재현아. 내가 우현 오빠를 지킬게.”
내 남자는 내가 지켜.
그렇게 말하는 하루는 반짝거렸다.
눈이 부셔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재현은 시선을 옆으로 떨궜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욕심내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녀의 소중한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경멸했다.
재현은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말했다.
“응, 형수님. 우리 형을 잘 부탁해.”
+++
사무실에 온 낙성에게 오늘 고객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홀로서기를 나왔다.
낙성은 재현과 술 한잔하기로 했으니 같이 마시자고 했지만, 하루는 거절했다.
우현을 보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하루는 먼저 우현의 집을 찾아간 적이 없었다.
우현은 항상 하루의 집으로 찾아오는데.
지난번, 우현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창밖을 봤더니 정말로 그가 있었을 때 무척 기뻤었다.
지금 내가 그의 집 앞에 찾아가 그에게 전화를 걸면, 그도 기뻐할까?
‘아마 되게 환하게 웃을 거야.’
우현의 미소를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하루는 택시를 타고 우현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응, 하루야.]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간지러운 기분이 든다.
“오빠, 뭐해요?”
[침대에 누워 있어.]
“자려고요?”
[응, 곧 자야지. 넌?]
“나는 오빠 네 집 앞이에요.”
[응?]
“아쉽다. 오빠 보고 싶어서 달려왔는데.”
휴대폰 너머로 우현이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언제나 여유로운 우현이 나 때문에 서두른다는 게 좋았다.
아니에요. 그냥 갈게요. 주무세요.
그렇게 말하면 우현은 애원조로 기다려달라고 말하겠지만, 하루는 그러는 대신 부드럽게 말했다.
“천천히 나와요, 오빠. 기다릴게요.”
당신이 내게 그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