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소름입니다.
하루도, 하루와 함께 나오던 다른 직원들도 황당해져서 명지를 쳐다봤다.
하지만 명지는 하루만 보인다는 듯, 하루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하루는 생글생글 웃는 명지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언니. 우리 점심 맛있는 걸로 먹어요.”
명지가 채근했다.
하루는 잠시 고민했다.
내가 여기서 거절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명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 없기에, 쉽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한번 얘기해보는 게 좋겠지. 왜 이러는지도 궁금하고.’
우현과 하루가 연애를 한다는 건, 회사에 비밀이었다.
처음에야 우현처럼 소문 안 좋은 남자와 인연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감췄지만, 지금은 딱히 비밀로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아무도 묻지 않기에, 굳이 말하고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함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현과 연애를 한다는 건 하루에게 약점이 되지는 않았기에,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같이 먹죠. 장 대리님. 저, 오늘은 유명지 씨랑 같이 점심 먹을게요.”
하루가 나희에게 말했다.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나희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 신난다! 우리, 어디서 먹을까요?”
명지가 하루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하루는 슬쩍 팔을 빼냈다.
“만지는 거 안 좋아해요. 그리고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어요.”
“아, 진짜요?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 했는데.”
“아니요. 그냥 구내식당에서 먹어요.”
하루는 명지와 회사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너와 나의 관계는 회사 안에서만.
그렇게 선을 그어야 한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산 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명지는 하루의 맞은편에 앉았다.
“언니, 언니 스타일 되게 마음에 들어요. 난 그렇게 캐주얼한 차림이 좋더라. 한 듯 안 한 듯 화장한 것도 세련돼 보이고요.”
하루는 오늘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명지는 재잘재잘 잘도 떠들어댔다.
자기가 대학에서 얼마나 학점이 좋았는지,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루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식당 안을 둘러봤다.
지금쯤 우현이 내려왔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아, 언니. 혹시 우현 오빠 찾아요? 오늘은 우현 오빠 구내식당에 못 와요. 외부 미팅 있어서 나갔거든요.”
명지가 하루의 속을 읽은 듯 말했다.
일부러 ‘오빠’라는 호칭을 강조하는 게 듣기 싫었다.
“언니, 그것도 모르셨구나. 애인인데 서로 일정 공유도 안 하나 봐요. 설마 쇼윈도 커플이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막 이러고.”
명지가 덧붙인 말에 왈칵 짜증이 났지만 하루는 내색하지 않았다.
“팀장님일 텐데, 오빠라고 부르나 봐요? 회사에서는 오빠라는 말은 자제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에이, 언니. 언니한테도 언니라고 부르는데, 왜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만 안 돼요? 아, 혹시 질투? 다른 여자가 내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는 건 용서 못 해, 그런 타입?”
우현이 명지 때문에 난처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명지는 이쪽의 말에 제대로 반응을 해주는 데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벽에 대고 얘기하는 기분이다.
“전 원래 이런 성격이에요. 회사 다닌다고 해서 성격 개조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친해지려면 언니, 오빠 하는 게 더 편하고 좋잖아요.”
“나는 유명지 씨랑 친해질 생각 없어요.”
하루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요? 저 되게 괜찮은 앤데. 언니도 저랑 친해지고 싶어서 같이 점심 먹으러 온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유명지 씨가 날 염탐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얘기해줄 것 같지 않네요.”
“염탐이라니…… 전 진짜로 언니랑 친해지고 싶어서 인사드리러 간 건데. 언니, 제가 우현 오빠 팀원이라서 그냥 밉고 그런 거 아니에요? 나이도 제가 더 어리고 그러니까, 우현 오빠가 딴마음 품을까 봐.”
“아, 그런 식의 해석도 가능하군요. 아니라고 대답해도 유명지 씨는 원하는 대로 해석할 테니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을게요. 아무튼 나는 유명지 씨와 친해질 이유도 없고, 마음도 없으니 앞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날 염탐한다고 해서 유명지 씨와 강 팀장님의 관계가 달라질 일은 없어요. 갈게요.”
하루는 하나도 먹지 않은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그 때, 명지가 말했다.
“비밀연애 아니에요?”
하루가 뒤를 돌아봤다.
명지가 생글생글 웃으며 하루를 올려다봤다.
“두 사람 말이에요. 회사에 비밀로 연애하는 중이잖아요. 우현 오빠한테 애인이 있는 건 다들 아는데, 그 애인이 우리 회사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럼 비밀 연애, 맞죠?”
“하고 싶은 얘기가 뭐죠?”
“제가요. 입이 무겁긴 한데, 가끔 제 입술이 멋대로 주책을 부릴 때가 있어서요.”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협박이라니. 언니, 제가 언니를 왜 협박해요? 그렇게 무서운 말 하지 마세요. 나, 막 서운해질라 그래요.”
명지가 애교스럽게 말했다.
하루는 명지를 희정과 비교한 것이, 희정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희정은 명지보다 100배는 나았다.
“잘못 짚었어요, 유명지 씨. 우리는 비밀연애도 아니고, 그런 일로 나를 쥐고 흔들 수도 없어요. 우리가 연인이라는 걸 회사 사람들이 모르는 이유는, 구태여 말하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말하지 않은 것뿐이거든요. 이참에 공개연애를 하는 것도 좋겠네요. 유명지 씨 같은 날파리가 꼬이지 않을 테니. 그러니까 나불거리고 싶으면 실컷 나불거려요.”
하루는 다시 돌아섰다.
“아, 그럼 혹시…….”
명지가 일어나서 하루의 앞을 가로막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현 오빠가 강 전무님 아들이라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 회장님 손자라는 거. 그 사실도 나불거려도 되는 거예요?”
하루는 조용히 명지를 노려봤다.
명지는 생글생글 웃으며 하루의 시선을 받아냈다.
우현과 하루가 사귀는 사이라는 게 밝혀지는 건 상관없지만, 우현이 강 회장의 손자라는 게 밝혀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하루가 걸려들었다는 걸 안 명지가 턱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가서 앉으라는 뜻이다.
하루는 그녀의 말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현의 비밀을 지켜줘야만 했다.
도로 자리에 앉자, 명지도 만족스러운 듯 맞은편에 앉았다.
“먹어요, 언니. 깨작거리지 말고.”
명지는 자기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한 듯 명령조로 말했다.
하루는 숟가락을 들었다.
“유명지 씨는 이런 식으로 해서 강 팀장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루의 질문에 명지가 싸늘하게 웃었다.
명지가 혀로 입술을 날름 핥았다.
그게 마치 뱀처럼 보여서, 하루는 소름이 돋았다.
“그건 두고 봐야죠. 먹기나 해요. 언, 니.”
+++
명지의 공격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
사무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을 때, 우현은 하루가 들어오는 줄로만 알았다.
살랑거리는 연갈색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동그랗고 커다란 눈과 촉촉해 보이는 도톰한 입술, 캐주얼한 차림새까지.
하루가 여긴 어쩐 일이지, 하며 일어나려다가 우뚝 멈춘 이유는, 이쪽을 향해 생긋 웃는 그녀가 하루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명지는 평소와 다른 말투로 인사를 했다.
무심코 고개를 든 직원들은 ‘누구지?’ 하는 표정으로 명지를 보고 있었다.
그만큼 명지는 평소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저 명지예요, 여러분. 유명지.”
명지가 쾌활하게 말했다.
직원들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유명지 씨? 완전 달라 보이네.”
“다른 사람 같다. 옷차림도 그렇고.”
모두와 대화를 나누며 명지는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다른 때라면 제일 먼저 우현에게 와서 선배 어쩌고 하며 말을 걸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아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저게 무슨 짓이지?’
원래 쌍꺼풀이 없는 동양적인 눈인데, 어떻게 하루와 똑같이 동그란 눈으로 변한 걸까?
하루 만에 성형을 하고 왔을 리도 없고.
우현은 화장이 얼굴을 얼마나 변하게 만드는지 알지 못했기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저 옷도…… 언젠가 하루가 입었던 건데.’
명지는 언젠가 하루가 데이트하는 날 입었던 옷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루가 내 애인이라는 걸 알아냈군. 게다가…… 우리가 데이트할 때 지켜보기까지 한 거야.’
전혀 몰랐다.
명지의 미행 기술이 뛰어나거나, 우현이 하루에게 푹 빠져 주위를 신경 쓸 틈이 없었거나, 아니면 둘 다일 것이다.
우현은 기가 막혔다.
아무래도 명지는 일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것 같다.
재현에게 명지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지 일주일이 조금 넘게 지났다.
그 이후 명지가 별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서 재현에게 부탁한 사실도 잊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서둘러야겠다.
재현을 재촉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놔두다가는 어떤 사달이 벌어질지 몰랐다.
[재현아. 내가 부탁한 건?]
재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은 곧 도착했다.
[안 그래도 오후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우리 통했나 봐. 저녁때 봐. 형네 집으로 갈게.]
+++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1층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희는 하루의 뒤쪽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본 하루의 눈도 커졌다.
커피숍 창문 밖으로 건물 로비가 있었는데, 거기로 우현과 명지가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저게 뭐야? 저거, 하 대리 아냐?”
나희가 중얼거렸다.
하루는 소름이 끼쳤다.
“그러게요. 저네요.”
어떻게 화장을 한 건지, 명지는 하루와 비슷한 얼굴이었고, 얼마 전까지는 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였는데 지금은 하루와 똑같은 헤어스타일이 되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연갈색 펌 스타일.
“저거, 저번에 하 대리가 입었던 옷이지?”
“네, 제 옷이랑 똑같아요.”
옷부터 신발까지, 명지는 하루와 똑같은 차림새였다.
우현은 굳은 표정으로 건물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왜 저래? 저번 주에 하 대리를 찾아왔었잖아. 그때 하 대리를 관찰한 건가?”
“그러게요.”
하지만 그날은 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저 옷을 입은 건, 지난 주 토요일 우현과 데이트를 할 때.
‘으아!’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웬일이야. 설마…… 미행한 거야? 우리 데이트하는 걸? 미쳤나 봐.’
지난 토요일에는 우현의 동네에서 연두와 산책을 하다가, 오후 늦게 서울 근교에 있는 예쁜 식당에 갔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미행한 걸까?
우현과 함께 하는 내내 이쪽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 하필이면 하 대리를 따라하는 거지? 그러고 보면 하 대리를 찾아온 것도 진짜 느닷없었어.”
나희가 중얼거렸다.
하루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었다.
미간을 모으고 고민하던 나희가 뭔가에 생각이 미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하 대리!”
들킨 건가?
“아직도 강 팀장님이 하 대리한테 집적거려?”
“예?”
“그런 거지? 강 팀장님이 하 대리 스카우트하려고 했었잖아. 그럴 사람이 아닌데 쉽게 포기한다 싶었거든. 아직도 우리 모르는 데서 하 대리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거 아냐?”
나희는 우현과 하루가 애인 사이일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듯 했다.
“하하…… 제가 강 팀장님한테 홀딱 빠져서 따라다니는 걸지도 모르죠.”
“에이, 그럴 리가. 따라다니다 보면 강 팀장님 성격도 알게 될 텐데, 그런 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희가 한 손을 휘휘 저으며 농담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하루는 나희에게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요, 장 대리님.
강우현 팀장님은 견딜 수 없긴 한데, 그게 성격이 못돼서가 아니라 너무 다정하고 달콤해서예요. 너무 섹시하고 매력적이라서예요.
그래서 저는 가끔 견디지 못하고 덮쳐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장 대리님, 사랑은 이런 걸까요?
원래 이렇게 음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는 건가요?
어쩌죠, 장 대리님?
요새는 데이트를 할 때마다 키스를 하는데, 그걸 하면서도 다른 걸 바라게 돼요.
더 많이, 더 깊이.
하루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또 그와의 키스를 떠올리고 말았다.
지금은 키스가 아니라 명지를 걱정해야 할 때인데.
‘아, 내 머리는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야한 걸 좋아해? 시도 때도 없이, 정말. 미쳤나 봐.’
“하 대리,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나희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네? 아뇨, 아뇨. 그냥 좀…… 하하하하.”
“하 대리, 요새 좀 수상해. 혹시…… 요새 나 몰래 연애하는 거 아냐? 응? 누구야? 우리 부서 사람은 아니지? 우리 부서엔 인물이 없잖아.”
왜 그 상대가 우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저걸 어떻게 해야 하죠? 유명지라는 사람.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하루가 주제를 바꿨다.
“아, 그러게. 저거 진짜 소름끼치네. 하 대리, 몸 좀 사려야겠어.”
나희가 진지하게 하루를 응시했다.
“저런 애들, 잘못 건드리면 확 돌아버리거든. 웬만하면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 걱정이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