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스토커입니다.
두근두근두근-
심장박동 소리가 귀에 크게 울렸다.
희정은 이 소리가 도경의 귀에도 들릴까 봐 불안했다.
아까부터 심장의 움직임이 심상찮았다.
정말 왜 이런 걸까?
“물은 잘 마셨습니다.”
아주 천천히 물을 마신 도경이 물컵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라니! 우리!’
우리라는 단어가 이토록 감미로운 단어인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으로 감미롭고 로맨틱한 단어다.
‘너와 나’를 한데 묶어주니까.
‘아니, 지금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래?’
희정은 자신이 하는 생각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말하지 마요. 우리가 아니에요. 윤도경 씨와 나는 우리라는 단어로 한데 묶일 만한 관계 아니에요. 그럴 입장도 아니고.”
희정이 날카롭게 말했지만 도경의 입가에 띤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네, 그렇군요. 그럼 조희정 님과 저는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 겁니까?”
조희정 님이라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너무도 달콤해서, 희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고! 저 남자를 부른 이유를 생각하란 말이야!’
도경은 하루의 친구였다.
그리고 오늘 희정은 도경에게 하루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다.
하루가 어째서 가족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토록 공포에 질린 건지 알고 싶었다.
그걸 알아야 하루를 엿 먹이기 위한 다음 계획을 실천하든 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도경 씨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희정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네, 뭔가요?”
“이하루, 알죠?”
“네, 압니다. 제 친구예요.”
도경은 희정이 하루의 이름을 언급한 것에 대해 그리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준아가 언질을 해준 모양이다.
그럴 줄 알았다.
‘입 가벼운 기집애 같으니. 내가 너한테 뭐 부탁하나 봐라! 재현이도 절대 소개시켜주지 않을 거야.’
“나도 이하루랑 아는 사이예요.”
“네, 그렇군요.”
“이하루가 나한테 아주 몹쓸 짓을 했어요.”
“그래요? 무슨 짓을 했습니까?”
무슨 짓을 했더라?
희정은 하루와 자신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맞다. 강우현.’
우현은 이제 희정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한참 생각해야 떠오르는 이름.
한마디로 말해서 ‘같잖은’ 존재. ‘대수롭지 않은’ 존재.
“그냥 좀…… 그런 일이 있어요.”
내 남자를 뺏었죠. 나랑 약혼할 남자였는데, 이하루가 가로챘어요.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도경에게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도경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강우현은 내 남자도 아니고, 뭐. 내가 그 오빠를 그렇게까지 좋아한 것도 아니고.’
희정은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변명했다.
우현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고, 우현이 자기 남자가 아니었다면, 더는 하루를 괴롭힐 이유가 없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도경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래서 이하루에 대해 알고 싶네요.”
“조희정 님.”
“네?”
“하루는 제 친구입니다. 하루를 싫어하는 조희정 님에게, 하루에 대해 얘기해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저, 그렇게 가벼운 놈 아닙니다.”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리라고 믿었다.
저런 단호하고 가볍지 않은 면이 굉장히 멋지다고, 희정은 생각했다.
“그래도 말해야 할 거예요. 나는 이하루에 대해 아주 많은 걸 알고 있거든요.”
“그렇게 잘 안다면 저한테 물어볼 것도 없겠네요.”
도경이 옳은 말을 했고, 저렇게 옳은 말을 하는 도경의 모습도 희정에게는 대단히 훌륭하게 보였다.
“맞아요. 그렇긴 한데…… 지금 시점에서는 물어봐야겠네요. 내가 이하루 가족을 좀 건드릴까 했더니, 하루가 겁에 질렸거…….”
희정은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도경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경은 무표정하게 희정을 응시했다.
“꼭 알아야겠습니까? 모르는 채로 하루 가족에게 손을 뻗지 않을 수는 없는 겁니까?”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라는 대답을 할 뻔했지만, 희정은 간신히 그 말을 삼켰다.
“내가 그렇게 쉽게 물러설 거라고 생각해요? 이하루는 나한테 진짜 몹쓸 짓을 했고, 그 벌을 받아야 해요.”
“그 몹쓸 짓이 뭡니까?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제가 대신 벌을 받겠고요.”
희정은 왈칵 짜증이 났다.
대체 이 남자가 왜 이하루를 대신해서 벌을 받는다는 거야?
이하루가 뭐라고!
걔가 뭐가 대단하다고!
“윤도경 씨가 대신할 문제가 아니에요. 말해 봐요. 도대체 이하루의 가족이 뭐기에 그러는 거죠? 하루 가족이 하루를 때리기라도 했어요?”
“네.”
“예?”
“그랬습니다. 학대했죠.”
희정은 말문이 막혔다.
혹시나 하긴 했지만, 자신의 추측이 들어맞을 줄은 몰랐다.
학대를 당하며 살아왔다고 하기에, 하루는 너무 밝았다.
해사한 미소를 짓는 하루에게서는 학대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날, 그토록 겁에 질렸던 것만 빼면.
“끔찍한 학대였습니다. 전 옆집에 살아서 알게 됐죠.”
도경은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하루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희정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도경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경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어린 소녀와 희정이 아는 하루가 겹쳐지지 않았다.
당당하게 희정의 뺨을 마주 때리던 하루가, 몸을 옹송그리고 폭력을 당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가슴이 죄여왔다.
도경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희정은 하루가 느낀 공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온몸을 웅크리고, 울지도 못한 채 온갖 고통을 당해온 하루에게 또 고통을 주려고 했던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손가락 끝이 차게 식었다.
“하루는 간신히 도망쳤습니다, 조희정 님. 그 인간들은 하루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면 찾아올 거예요. 하루는, 어쩌면 도망쳤던 기억들을 전부 되찾고 그때처럼 고통스러워할지도 몰라요.”
얼마나 괴로워야 기억을 잃기까지 하는 걸까?
희정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부탁드립니다. 하루 가족은…….”
“나가요.”
희정이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가리켰다.
“조희정 님.”
“잘 들었으니까 나가라고요! 이제 됐어요. 가세요.”
도경은 걱정스레 희정을 쳐다보다가 말없이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도경이 떠난 후, 희정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희정의 뺨을 세게 후려치던 하루가 떠올랐다.
부자들은 원래 너처럼 다 싸가지가 없냐고 비난하던 하루가 떠올랐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하루가 떠올랐다.
하루는 어릴 때도 그런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었을까?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진짜 친구도 아닌데, 하루가 과거에 받은 고통이 왜 이렇게까지 마음에 걸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가족을 위해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랑 결혼을 하려는 거야? 네가 그렇게까지 네 인생을 희생해야 할 필요가 있어?
하루의 걱정 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그 눈빛 때문일까?
지금껏 희정을 진심으로 걱정해준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희정이 아는 ‘친구’란 잘 되면 질투하고, 못 되면 속으로 비웃는, 그런 관계일 뿐이었다.
내가 이 친구를 통해 얼마나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희정은 누군가에게 걱정을 받고, 누군가를 걱정하는 게 처음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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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는 주말에 친구를 만나서 우현의 연인이 누군지 알아냈다.
우현이 작년 크리스마스 파티에 데리고 와, 결혼할 여자라고 소개했다고 했다.
우현의 약혼녀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그녀가 세정 본사의 개발지원본부에서 일한다는 것도 알려졌다.
‘우리 회사란 말이지?’
명지는 여느 때보다 공들여 화장을 하고 일찍 출근했다.
‘정말 잘됐어. 다른 회사였으면 조사하기 힘들었을 텐데.’
명지는 사무실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개발지원본부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안을 들여다봤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무실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루로 보이는 인물도 없었다.
명지의 친구는 파티 때 찍은 하루의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멀리서 찍은 거라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충 느낌은 와서, 얼굴을 보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명지는 복도를 서성이며 하루가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하루는 8시 50분쯤에 나타났다.
자그마한 얼굴과 유독 하얀 피부, 연갈색 머리카락과 연갈색 눈동자. 동그랗게 큰 눈과 작고 오뚝한 코, 붉고 도톰한 입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살짝 곱실거리고, 화장은 거의 안 한 것 같았다.
연아이보리색 면바지에, 브이라인의 하늘거리는 회색 니트, 흰색 후드점퍼를 입었다.
‘예쁘긴 하네.’
멀리서 봐도 예쁘다는 걸 알 수 있는 얼굴이지만.
‘딱히 여성스러운 것 같지는 않고.’
꾸미고 다니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우현 오빠는 저런 타입을 좋아하는구나. 캐주얼하게, 꾸민 듯 안 꾸민 것 같은 여자. 아, 방향을 잘못 잡았었어.’
그동안 명지는 한껏 꾸미고 왔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털털한 여자처럼 행동할걸 그랬어.’
하루의 옷차림만 봐도 하루가 어떤 성격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털털하고 명랑한 척, 씩씩한 척하는 타입.
명지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저런 여자들이 씩씩한 척은 해도 뒤에 가서는 엄청 징징거린단 말이야. 우현 오빠는 정말 저렇게 빤히 보이는 여자가 좋은 건가? 좀 더 어른스럽고 성숙한 느낌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하루를 관찰하다가 눈이 마주쳤다.
하루는 이미 명지를 아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래, 알겠지. 내가 우현 오빠 옆에 딱 붙어서 다니니까. 거기에 대해서 우현 오빠한테 화냈으려나? 아니면 아직은 질투하지 않는 척, 마음 넓은 척하고 있나?’
명지는 괜한 우월감이 느껴졌다.
하루를 피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 하루와 눈이 마주쳐서 다행이었다.
명지는 생긋 웃으며 하루를 향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언니. 저, 아시죠?”
“글쎄요. 소문은 들었는데 소개를 받은 적은 없네요.”
하루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겠지.’
명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럼 소개할게요. 제 이름은 유명지고요. 나이는 24살이에요. 언니보다 한참 어려요. 언니는 29살…… 아, 이제 30살이겠다. 계란 한 판.”
“저에 대해 잘 아네요. 따로 제 소개를 할 필요는 없겠어요.”
“네, 언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보다 한참 어른이신데.”
여자는 나이가 깡패라는 말을, 명지는 몹시 좋아했다.
24살과 30살.
남자들이 좋아하는 나이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아니요. 초면에 그럴 수는 없죠.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찾아오나요? 그냥 언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언니, 너무 예쁘고 이름도 예쁘고. 제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저는…….”
“아, 언니. 전 그만 가볼게요. 아시죠? 우리 우현 오빠, 시간에 깐깐한 거. 늦기 전에 가봐야겠어요.”
‘우리 우현 오빠’라는 말에 하루의 표정이 굳었다.
명지는 속으로 웃으며 휙 돌아서서 복도를 빠르게 걸어갔다.
등 뒤로 하루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루는 분명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명지를 저주하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명지가 뒤를 돌아봤지만, 하루는 이미 사무실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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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의 예상과 달리, 하루는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우현은 이미 하루에게 명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고, 해결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명지의 존재에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그저 아침부터 사무실 앞에서 하루를 관찰하고 있었던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냥 안면이나 트자고 그런 건 아닐 텐데.’
명지는 우현의 약점을 잡고 있었다.
‘내 약점도 찾아보려는 건가?’
그렇다면 큰일이다.
안 그래도 희정에게 하루의 약점을 잡혀버렸다.
자신의 과거가 이렇게까지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 집을 나오면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명지도 하루의 과거에 대해 알아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더 오싹해질 일은 점심시간에 벌어졌다.
“언니, 우리 점심 같이 먹어요!”
명지가 사무실 앞에서 하루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