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일기를 쓸래요.
도경의 얼굴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보고서에 도경의 사진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도경은 사진과 달랐다.
이름 모를 아우라가 도경을 감싸고 있었다.
짧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이 이 남자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희정은 생각했다.
짙은 눈썹 아래의 매서운 눈매와 오뚝한 코, 갸름한 얼굴에서 쭉 이어지는 목덜미가 섹시했다.
미소를 머금고 살짝 벌어진 입술 안으로 보이는 고른 이가 눈부셨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심장이 두근, 두근 뛰었다.
심장이 이런 식으로 뛰는 건 처음이라, 희정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도경이 웃으며 항복하듯 두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아, 겁내지 마세요. 해치지 않습니다. 전 조희정 님을 보호해드리려고 온 겁니다.”
“아, 네.”
희정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어서, 음. 어서 들어오세요.”
“네? 어디 나가시는 거 아닌가요?”
“아뇨, 아닌데요.”
“아. 그럼 집 안에 혹시 조희정 님 혼자이십니까?”
“네? 아뇨, 아뇨. 가사도우미가 있어요.”
“그러시군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도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희정은 왠지 안절부절못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저기, 소파에 앉아 계세요. 뭐, 음. 뭐, 마실래요?”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요. 손님인데.”
“전 손님이 아니라 경호원인데요.”
“아, 맞다. 그래도 손님은 손님이죠. 뭐 마실래요?”
“그럼 물 한 잔만 주세요.”
“네, 네. 잠시만요.”
희정은 찬장에서 컵을 꺼냈다.
이상하게 초조하고 손이 떨렸다.
‘나, 왜 이래? 이게 뭐 하는 거야?’
도도하고 우아하게 행동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컵을 가지고 돌아서는데 시야 끝에 도경이 걸렸다.
도경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쿵-
또 심장에서 기묘한 울림이 들려왔다.
희정은 숨을 몰아쉬며 정수기로 걸어갔다.
도경이 이쪽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굳어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희정은 오른손과 오른발이 동시에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저 여자, 어디 아픈가?’
도경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몰랐다.
물 한 컵 뜨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희정은 컵에 가득 담긴 물을 내려다보며 심호흡했다.
‘내가 지금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잖아. 그래봐야 경호원일 뿐인데.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면 돼, 평소처럼. 저 남자는 그냥 평범한 경호원일 뿐이야. 그것도 이하루 친구!’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상할 정도로 거칠게 뛰던 심장도 제 속도를 되찾았다.
희정은 우아한 미소를 띠고 도경을 향해 돌아섰다.
도경이 희정을 보며 싱긋 웃었다.
쿵-!
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플 정도로 세게.
+++
우현의 집 앞에 도착한 재현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파트 입구에 한 여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아파트 입구를 쳐다보다가 위쪽을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했다.
‘누굴 기다리나?’
재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이쪽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재현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어디서 본 얼굴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거다.
‘어디서 봤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오늘 우현을 찾는 이유는, 우현과 하루의 결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하루는 가족들에게 무척 좋은 인상을 심어준 듯했다.
그럴 줄 알았다.
하루의 밝은 미소와 쾌활한 말투를 대하면 누구라도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하루와 한 번 식사를 한 후, 김 여사는 전화를 할 때마다 우현과 하루는 언제 결혼하는 거냐고 물었다.
아마 우현에게 묻고 싶을 테지만, 우현의 반응이 두려운 것이리라.
우현에게 물어보기 무서운 건, 재현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은 우현과 하루의 결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모르고 싶었다.
‘하지만 피한다고 될 일이 아냐. 나는 좀 더 그 사실을 마주해야 해.’
지속적인 자극에 익숙해지는 것이 사람이다.
‘나도 형이랑 하루가 결혼한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해.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를 계속 지켜봐야 해.’
그러면 언젠가는 무뎌질 것이다.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둘의 모습을 봐도, 명치가 답답해지는 일이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딩동-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형, 나야.”
평소라면 “가라.”라든가, “바빠.”라는 말로 재현의 방문을 거절했을 텐데, 별말 없이 현관문이 열렸다.
연두가 뛰어나와 재현을 반겼다.
그 뒤에 우현이 서 있었다.
“잘 지냈어?”
“응.”
우현이 안으로 들어갔다.
놀라운 일이었다.
한 번의 거절도 없이 재현을 안으로 들이다니.
심지어 왜 왔는지 묻지도 않다니.
“뭐 마실래?”
“헉!”
“반응이 왜 그래?”
“아니, 형이 내 방문을 반겨주는 데다가 음료까지 제공해주는 게 처음이라서. 당신 누구야? 강우현 아니지?”
“……나도 대접쯤은 해. 그리고 그렇게까지 널 반기는 건 아니고.”
“아니, 형이 나한테 가라고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날 반겨주는 거야. 지금 하루, 아니, 연두가 꼬리를 치는 수준으로 날 반겨주는 거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앉아라.”
우현이 턱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하루와 사귄 후, 우현은 전보다 유해졌다.
좋은 변화였다.
서로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켜주는 사랑이 참사랑이라고 알고 있었다.
우현에게 하루는 참사랑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에게도 그럴까?
우현도 하루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고 있을까?
그녀의 안에 깊이 자리 잡은 트라우마를 해소시켜주고 있는 걸까?
우현도 하루의 아픔에 대해 알고 있을까?
‘알겠지. 적어도 나보다는 잘 알 거야. 연인이니까.’
재현은 주방에서 차를 준비하는 우현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단단한 엉덩이.
같은 남자로서 부러워질 정도로 근사한 뒤태였다.
‘그래, 내가 이하루였어도 우리 형한테 반하겠다.’
우현이 홍차를 두 잔 들고 소파로 왔다.
“홍차다.”
우현이 한 잔을 재현의 앞에 내려놨다.
“응, 고마워. 영광이야. 형한테 홍차를 다 얻어먹다니. 아무래도 일기에 써야 할 것 같아.”
“일기도 써?”
“오늘부터 쓸까 하고.”
우현이 별소리를 다한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우현의 저런 표정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역시 우현은 하루와 연애를 하면서 변했다.
그런 우현을 보는 게, 재현은 슬슬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요새 뭐 하고 지내?”
재현이 물었다.
“그냥. 평소처럼 지내지. 넌?”
“우와, 형이 내 근황을 물어봐주다니. 이것도 일기에 써야지.”
“너, 내가 무슨 말 할 때마다 일기 타령할 생각이라면 가라.”
“알겠어. 안 할게. 하지만 형, 난 지금 굉장히 감동하는 중이야. 이 감동을 일기에 쓰는 게 안 된다면, 소설에라도 써야 할 것 같아.”
“…….”
“알겠어. 소설 타령도 안 할게.”
재현이 두 손을 살짝 들며 말했다.
우현은 재현을 빤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고민이 하나 있는데.”
“형, 이것도 소설로 쓰면 안 돼?”
“강재현.”
“우와, 내 이름을 불러줬어! 이것도 소설에 써야 할 것 같아.”
우현이 입을 다물었다.
재현은 자꾸 웃음이 나왔다.
우현이 재현에게 고민이 있다고 말한 것도 처음, 재현이 우현에게 장난을 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현은 우현이 좋았다.
정말로 좋았다.
하나뿐인 형이니까.
평범한 형제처럼 지내고 싶었다.
고민을 얘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장난을 치고 싸우기도 하는, 아주 평범한 형제지간.
그게 두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고, 어쩌면 죽는 날까지 그런 일을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포기하려던 참이었는데.
‘가능할 것도 같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형. 진짜 놀라서. 응, 고민이 뭔데?”
“됐다. 가라.”
“아이, 그러지 말고.”
“어디서 앙탈이야? 징그럽게.”
“형님. 말씀해주십쇼.”
“……너, 장난 좀 안 치면 안 되냐?”
“안 칠게. 나, 지금 세상에서 제일 진지해. 형의 고민을 들을 준비가 됐어. 소설에도 안 쓸게. 일기도 안 쓰고.”
우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이 하나 있는데.”
“응.”
“여자가 한 명 있어.”
“하루?”
“아니, 하루 말고.”
“결혼을 앞둔 형님이 형수님 아닌 다른 여자 고민을 털어놓는 건, 마음이 좀 무거워지는 일인데.”
“입 좀 다물고 들어주면 안 되냐?”
재현이 키득키득 웃으며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우현은 그런 재현을 못마땅한 듯 노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올해 우리 팀에 들어온 신입이야. 그 여자가 날 아주 곤란하게 하고 있어.”
우현은 천천히 ‘유명지’라는 이름의 여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현은 우현의 고민이 장난칠 수준의 고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문득 아파트에 들어오기 전에 본 여자가 떠올랐다.
“형, 혹시 말이야. 그 여자,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키 좀 작고 머리는 좀 길고, 검은 머리에.”
재현은 여자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우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응, 그렇게 생겼어. 어떻게 알았지?”
“방금 아파트 앞에서 봤거든. 누굴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형을 기다리고 있던 거구나. 우와, 소름.”
우현도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는 내 약점을 잡고 있다고 생각해.”
“실제로 형의 약점이기도 하지. 할아버지가 형한테만 조건을 걸었으니까.”
우현이 미간을 좁혔다.
“왜 형한테만 조건을 걸었을까?”
“내가 김 여사님의 자식이 아니라서.”
“……그럴 리가.”
“아니, 그게 맞아. 회장님은 내 어머니를 싫어했지. 어린 나도 눈치를 챌 정도로 싫어했어.”
그 이야기는 친인척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강 회장은 우현의 친어머니를 끔찍이 싫어해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도 돈을 주고 쫓아내려고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우현의 어머니를 쫓아낼 때, 가장 발 벗고 나선 인물이 강 회장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손자들에게는 그저 다정한 할아버지이기에, 재현은 그런 강 회장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네 탓을 하는 게 아냐.”
재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우현이 말했다.
재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현을 쳐다봤다.
우현이 저런 말을 다 하다니.
이건 진짜로 일기에 쓸 일이다.
오늘 집에 가는 길에 일기장을 사 가야겠다.
“내가 이런 말 할 때마다 일일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재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우현이 말했다.
재현이 웃었다.
“아, 미안. 내가 표정 관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하여간 유명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넌 작가니까 머리가 나보다 잘 돌아가겠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우현이 재현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현은 우현을 돕기 위해 뭐든 해주고 싶었다.
“글쎄. 형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내가 움직이면 그만이긴 한데……. 아, 그러고 보니 그 여자, 예전에 어떤 파티에서 본 적이 있어. 몇 년 전에.”
“그래? 어느 집 여식이지?”
“내가 한 번 알아볼게. 그때까지는 적당히 받아줘. 형한테 가장 타격이 없는 방향으로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말하는 재현을, 우현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금껏 재현에게 잘 대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찾아오면 무시하고, 기분 나빠하고, 재현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재현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우현을 도와주려고 한다.
우현을 도와줄 수 있다는 걸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왜 지금은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형아! 같이 가!
어릴 때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는 우현을 열심히 따라오던 어린 재현.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재현은 우현의 껌딱지라도 되는 듯이 졸졸 따라다녔다.
내 어머니를 쫓아낸 김 여사의 자식이 형아, 형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김 여사를 닮은 얼굴로 헤실헤실 웃는 꼴을 보는 것도 싫었다.
철이 들고 나서야, 재현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됐지만, 그래도 재현이 불편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재현은 끊임없이 우현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를 다시 만난 후에야,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이제야, 지금껏 재현이 해온 것들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다.
이쪽을 봐주지 않는 사람에게 오롯이 내 마음을 베푸는 것은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재현은 오랜 시간 묵묵히 그것을 해왔다.
우현에게 티를 내지도 않고, 조용히 우현을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해왔다.
내가 뭐라고.
나는 그저 모두가 싫어하는 여자가 낳은 자식일 뿐인데.
“미안하다.”
“어?”
재현이 무슨 말이냐는 듯 우현을 쳐다봤다.
왜 이 애를 그토록 미워해왔을까?
재현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재현은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우리 둘은 그저 어머니가 다를 뿐인데.
그건 재현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닌데.
“그동안 널 무시해서 미안해. 도움이 필요한 이제 와서야 미안하다고 해서. 그것도 미안하고.”
멍하니 우현을 쳐다보던 재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아, 그러지 마. 형. 난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런 말 들으면 운단 말이야.”
재현은 천천히 손을 내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형제잖아. 형제니까 괜찮아.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