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78화 (78/119)

#(78) 당신의 사랑은 그러하기를.

술을 마시면서 실컷 수다를 떨었다.

대부분 하루가 이야기했고, 친구들은 질문을 던졌다.

하루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해주었던 것들을 전부 이야기했다.

그저 계약연애일 뿐인 건 아는데, 그래도 이제 다 상관없어졌다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진심이라도 믿고 있는 힘껏 사랑할 거라고 말했다.

남의 사랑 이야기가 저리도 재미있을까 싶을 정도로, 미영과 은서는 열심히 들었다.

들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술을 마시던 미영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하루의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쟤, 급하게 마신다 했다.”

은서가 미영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원래 잘 안 취하는데.”

“네가 드디어 사랑을 한다니까 기뻐서 그러지. 미영이가 걱정 많이 했거든.”

“그렇구나.”

하루는 침대에 누운 미영을 응시하다가 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은서는 하루의 집안 사정을 알지 못하는데도, 늘 하루의 곁에 있었고 하루를 챙겨주었다.

하루는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자신의 집안에 대해 철저하게 숨겼다.

그래서 은서는 하루가 왜 사랑을 두려워하는지, 왜 가족들과 연을 끊었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하루를 지지해주었다.

하루가 빤히 응시하자, 은서가 싱긋 웃었다.

“왜?”

“은서야, 나 있잖아.”

“응.”

“나,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 말이야.”

“어?”

은서는 술이 확 깼다.

이럴 때에 하루의 과거에 대해 들을 줄은 몰랐다.

알고 싶었지만, 하루가 말하기 싫어하기에 묻지 않았다.

서운했지만,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서운함을 버렸다.

언젠가 하루가 이야기해주면, 그때 진지하게 들어주자고 생각해왔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인가 보다.

미영와 도경이 하루를 깨질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대하는 이유를 알게 될 그 날.

은서는 하루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어 얘기를 하지 않을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재혼하셨어. 나는 어머니가 데리고 온 애야. 친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다더라. 어머니랑 새아버지가 결혼을 하고 나서 동생이 태어났고.”

하루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새아버지 쪽 집안의 반대가 엄청 심했대. 그럴 만도 하지. 우리 어머니는 애가 딸렸으니까. 새아버지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사랑한다고, 그랬었나 봐. 그래서 가족이랑 거의 연을 끊다시피 하고 결혼을 강행한 거야. 우리 새아버지랑 어머니, 진짜 그렇게 사랑을 했대. 대단한 사랑이지.”

조롱 섞인 어조였다.

그렇게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단다.

결혼하기 전, 아버지는 하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린 이제 가족이 되는 거야. 우리 하루, 우리 딸. 아빠가 많이 예뻐해 줄게.

아빠를 가져본 적 없는 하루였다.

어머니와 연애를 할 때, 그는 무척이나 다정했다.

그래서 하루는 다정한 아빠가 생긴다는 사실이 기쁘고 설레었다.

“1년. 그래, 결혼하고 1년은 정말 좋은 아빠였어. 퇴근할 때면 맛있는 걸 사다주고, 목마를 태워주고, 예쁜 옷도 사줬지.”

그러다가 어머니가 임신을 했다.

아버지는 기뻐했고, 아들이라는 걸 알자마자 연을 끊은 친가 쪽 가족들에게 알렸다.

“동생이 태어나던 날, 처음으로 친척들까지 모두 모였어.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가 생긴다는 사실이 기뻐서, 어머니를 미워했던 것조차 잊었지. 그리고, 나도 잊었어. 이하루라는 존재도. 그렇게 4살이었던 어린 이하루는 방치되었어. 아무도 나를 신경 써주지 않았어. 어머니까지도.”

시부모에게 미움을 받았던 어머니는 아들이 태어나 관심을 받게 되자 행복해했다.

“그런데 은서야. 나는 그냥 그렇게 방치될 때가 제일 좋았어. 그때가 내 어린 시절 평온했던 기억의 마지막이야.”

아들이 태어나자 아버지는 변했다.

제 자식에게 해줄 것도 모자라는데, 남의 자식에게 뭔가 해줘야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하루가 동생보다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듣고, 똘똘하다는 칭찬을 듣는 것도 아버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가볍게 뒤통수를 치는 정도였어. 그게 좀 강해지고, 강해지고, 그러다가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강해졌어. 내가 울었더니, 아버지는 내가 나쁘다고 했어. 내가 나쁜 짓을 해서 맞는 거라고, 울 자격도 없다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때리고 세뇌시켰지. 그래서 나는.”

하루는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나쁜 아이였어. 늘 나쁜 짓을 해서 맞을 수밖에 없는, 그런 나쁜 아이.”

은서는 숨을 멈췄다.

집안 사정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런 종류일 줄은 몰랐다.

그래봐야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주 싸워서, 그걸 보다 보니 사랑이라는 걸 못 믿게 됐다, 그 정도의 이야기일 줄 알았다.

가슴이 미어졌다.

아파서 숨을 헐떡이는 은서와 달리, 하루는 담담했다.

그 담담한 표정이 오히려 안타까웠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아버지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기 싫었을 거야. 내 편을 들어주면 아버지가 화를 낼 거고, 아버지의 가족들도 어머니를 싫어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모르는 척을 했겠지. 내가 맞아도, 울어도, 어머니는 동생만 꼭 끌어안고 숨을 죽이고 있었어.”

나를 때리는 아버지보다 그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어머니가 더 무서웠다고, 하루는 말했다.

그런 상황이 어떤 건지, 은서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가족은 참 따뜻한 건데, 나에게 가족이란 그래. 너무 차갑고 날카로워서, 생각만 해도 아프고 고통스러워. 나한테 사랑이라는 것도 그래. 가족이랑 연을 끊을 정도로 죽고 못 살던 두 사람이 만났는데, 그렇게 변해버려. 그래서 나는 사랑이 무섭고, 결혼이 무서운 거야.”

하루가 시선을 들었다.

은서를 본 하루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왜 네가 울어?”

은서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은서는 이를 악물고 흐느낌을 참았지만, 슬픔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럼 웃니?”

“다 지난 일이야.”

“그게 어떻게 지난 일이 돼?”

은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하루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고 야속해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가족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으며 자라온 건,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는 지난 일이라 했지만, 이야기하는 내내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은서가 우는 동안, 하루는 묵묵히 은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울음을 멈춘 은서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이제는? 이제는 좀 괜찮아?”

하루가 웃었다.

아까보다는 밝은 미소였다.

“괜찮냐고는 너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네가 너무 우니까 내가 못 울겠다.”

은서는 하루의 이런 면이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고, 농담을 할 수 있는, 이런 하루의 성격이 참으로 좋고, 안타까웠다.

“강우현 씨를 사랑하는 건…… 괜찮아? 아프지 않아?”

하루는 손바닥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우현을 떠올리는 듯 하루의 미소가 달콤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참 신기해. 그 남자를 만나면서, 너희들이 사랑을 해보라고 하던 이유를 알게 됐어. 그 남자는 내 하루, 하루를 정말 특별하게 만들어줘. 같이 있으면 전부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 그거 정말 다행이다.”

“어쩌면 말이야.”

하루가 눈을 떴다.

“1년이라는 기한이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 이 남자의 사랑이 변하는 걸 보지 않아도 되니까. 1년이라는 계약기간 동안은 이 남자가 나에게 계속 다정할 테니까.”

“1년. 그래, 1년이라는 계약기간이 있었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가 하는 모든 말, 모든 행동을 계약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계약에 대해 잊게 돼. 그 남자가 진짜 내 연인인 것 같아.”

“진짜 연인이지. 네가 사랑하고, 그 남자도 널 사랑하잖아.”

하루가 웃었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러면 난 기대하게 돼.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그 남자가 내 곁에 있을 거라고.”

“그럼 기대하면 되지. 그 남자는 1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면 되지.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거.”

“응, 제일 잘하지.”

“누구나 사랑이 변하는 순간을 두려워해. 그래도 꾸준히 사랑을 하는 건, 변하지 않는 사랑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야.”

“응, 그러겠지.”

“네 사랑은 그럴 거야.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정말 착한 아이니까.”

지금껏 담담하던 하루가 입술을 실룩거리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요새 정말 여러 번 듣네.”

하루가 중얼거렸다.

“착한 아이라는 말.”

+++

일요일 아침.

우현은 연두에게 밥을 주고 산책을 다녀와서 노트북으로 하루살이 쇼핑몰을 확인했다.

우현의 계획대로 쇼핑몰은 호황이었다.

희정 때문에 올라왔던 악평도 전부 사라졌다.

이대로 두 달 정도 세게 광고를 하면, 나중에는 간간이 광고만 띄워도 하루살이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조희정이랑 얘기를 해봐야겠군.’

희정과는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기에, 이번 건을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뭐야?]

반갑게 전화를 받을 줄 알았는데, 희정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얘기 좀 하지.”

[나중에 해. 나, 오늘 바빠. 끊어.]

휴대폰이 뚝 끊겼다.

우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끊긴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조희정.”

[아, 나 지금 바쁘다니까. 나중에 연락해.]

또 전화가 끊겼다.

이렇게 냉정한 반응이라니.

여자들은 언제나 우현에게 상냥했고, 우현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알게 되면 무서워했다.

이런 식으로 귀찮은 스토커를 상대하듯 대한 적은 없었다.

기시감이 느껴져서 떠올려 보니, 지난번에 하루의 친구들을 찾아갔을 때도 이런 취급을 받았다.

귀찮으니 얼른 꺼져버려.

요새 여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우현에게 쌀쌀맞아진 것 같다.

명지만 빼고.

명지를 떠올리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명지는 여전히 우현을 ‘선배’라고 부르고 졸졸 따라다녔다.

직원들이 눈살을 찌푸려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류의 인간은 처음이라서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슬슬 그 여자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어떻게 건드려봐야 하나.’

+++

몇 주 전이었다면 휴대폰 액정에 뜬 우현의 이름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을 것이다.

사귀는 동안에도 우현이 먼저 전화를 걸어준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우현의 전화가 귀찮을 뿐이었다.

희정의 머릿속은 다른 문제로 가득했다.

하루의 문제라든가, 하루의 문제라든가, 하루의 문제라든가.

그랬다.

희정은 가족 이야기를 꺼냈을 때, 하루가 이상할 정도로 두려워했던 일이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가 싫은데, 너무 미운데,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별로다.

이하루는 좀 더 당차고 씩씩한 표정으로 내게 맞서는 편이 좋다.

희정은 거실로 나갔다.

오늘은 집에 일하는 아주머니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가족 동반으로 어디를 간다고 했는데, 희정은 빠지겠다고 했고 가족들도 굳이 희정을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일류대학도 못 가고 이 나이가 되도록 근사한 애인도 없는 희정은 데리고 다니면서 자랑할 만한 자식은 아니었던 것이다.

주방에서 물 한 컵을 마시고 나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가사도우미가 인터폰을 들었다.

“아가씨. YDK 가드에서 왔다는데요.”

“아, 내가 나갈게요. 아주머니는 들어가서 쉬세요.”

“차는…….”

“괜찮아요. 금방 떠날 테니까.”

희정은 그렇게 말하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지금 현관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이하루의 친구다.

이하루의 친구.

은서와 미영이 떠올라 오싹해졌다.

‘이 인간도 그런 상스러운 인간이면 어쩌지?’

희정은 갑자기 불안해졌지만, 집에 혼자가 아니니 여차하면 가사도우미가 도움을 청해줄 것이다.

희정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조희정 님. YDK 가드에서 나온 윤도경입니다.”

환하게 웃는 도경을 보는 순간, 심장이 뚝 떨어졌다가.

“오늘 보호를 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쿵, 쿵, 쿵,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도경의 뒤로 분홍빛 찬란한 꽃잎이 흩날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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