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성적접촉은 키스까지.
이건 꿈일까?
우현은 생각했다.
그래, 이건 꿈일 거야.
그러지 않으면 하루가 먼저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리 없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 꿈에서 깨어날 줄 알았는데, 하루는 여전히 눈앞에 있었다.
꿈이 아닌가 보다.
현실인가 보다.
깨닫는 순간, 심장이 쿵, 쿵, 쿵, 음악 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다.
나도.
나도 사랑해.
그 말을 해야 한다.
항상 기다리던 순간이고,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막상 그 순간이 되자 입이 열리지 않았다.
우현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손안에서 꼼질거리는 하루의 손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나도.”
이럴 때 멋지게 반응을 해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나도 사랑해.”
그저 여느 평범한 사랑 고백과 같은 말만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심한 사랑 고백인데도, 하루의 미소가 깊어졌다.
반달 모양으로 휘는 그녀의 눈이 시리도록 사랑스러웠다.
공기가 변했다.
음악 소리가 사라지고, 몸을 부딪쳐오는 인파도 사라졌다.
이 달콤한 향기로 가득한 공간에, 하루와 우현만이 남았다.
우현은 하루의 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볼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역시 꿈이 아니다.
우현은 하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키스하고 싶은데.”
우현의 말에 하루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하루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성적접촉은 키스까지?”
그제야 하루와 자신이 계약연애 중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 모든 게 하루의 연기이든 아니든, 우현은 하루를 사랑했다.
그리고 하루가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거면 된 거다.
계약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평범하게.
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연인처럼 사랑하면 되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순간만큼은.
“응, 거기까지.”
우현은 그렇게 대답하고 허리를 굽히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루의 두 팔이 우현을 향해 뻗어왔다.
그녀의 팔이 우현의 목을 감싸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루의 입술이 어색하게 우현의 입술 위에 겹쳐졌다.
우현은 하루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과 밀착시키고, 그녀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우현의 품 안에 담긴 그녀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너무 작고 연약해서, 자칫 잘못하면 바스라질 것만 같아 조심스러웠다.
우현은 성급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맛보고 그녀의 입술 안을 탐험했다.
어색하게나마 우현이 하는 대로 따라 입술을 벌리고 받아들이는 하루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우현은 자꾸만 갈증을 느꼈다.
키스를 하는 순간에도, 그녀를 더, 더, 더, 갈망했다.
이윽고 둘은 입술을 떼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봤다.
“엄마! 저 사람들 뽀뽀했어!”
어린 소년의 외침에, 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어린아이들로 가득한 놀이공원이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비난 섞인 눈빛이 둘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가 얼굴을 붉혔고, 우현은 하루의 손을 잡았다.
“나가자.”
“네.”
둘은 인파를 헤치고 나와 입구를 향해 달렸다.
웃길 일은 하나도 없는데, 괜히 웃음이 터져 나와 웃으면서 달렸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앞에 도착해서, 또 한 번 키스를 했다.
우현은 하루를 차에 기대게 하고,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술을 점령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자연스럽게, 하루는 우현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달콤한 전율이 전신으로 퍼졌다.
하루는 그의 손과 입술과 숨결이 닿는 부위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고, 그 뜨거움이 발가락 끝까지 퍼져나가서 당혹스러웠다.
가슴이, 배가 간질거렸다.
그의 느린 움직임이 오히려 강렬했다.
뜨거운 입술 사이로 흘러드는 타액이 입안을 달콤하게 적시고 흘러내려갔다.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의 호흡은 평온한데, 나 혼자 흥분하는 것 같아서 민망했다.
그래도 그와의 키스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이대로 그에게 녹아들고 싶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떨어져나갔을 때는 아쉬웠다.
그가 열띤 눈으로 하루를 내려다봤다.
“중독되겠다. 매일 하고 싶을 것 같은데.”
우현이 평소보다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럼 매일 하면 되죠.”
우현이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이 또 가까워져서 하루는 눈을 감았다.
촉촉하고 뜨거운 입술이 하루의 이마를, 눈썹을, 콧등과 볼을 낙인찍듯 누르고 떨어졌다.
하루의 입술 위를, 그가 엄지로 살짝 쓸었다.
“하루야.”
“네?”
“그거 알아?”
“미소 지으면서 숨을 쉴 수 없다는 거요?”
“아니. 내가 널 정말로 사랑한다는 거.”
그의 고백에, 하루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미소 지었다.
계약연애, 계약사항, 그런 건 이제 하루의 머릿속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네, 알아요. 이제 알 것 같아요.”
그와 나 사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접점도, 그와 내가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도, 이제는 하루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의 눈동자에 오롯이 나 하나만이 담겨 있다는 것.
그거 하나뿐.
+++
도경은 헬스장에서 씻고 나와 휴대폰을 확인했다.
예약을 받는 어플에 알림이 와 있었다.
예약할 때는 이름과 생년월일, 연락처, 주소, 요청사항을 기입해야 한다.
[조희정]
맨 위에 뜬 예약자의 이름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예약일은 내일이었고, 요청사항에는 [윤도경 씨의 경호를 원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도경은 한동안 휴대폰을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조희정이라…….”
+++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지 한 시간째.
하루는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지고 있었다.
그와의 키스가 생생했다.
입술에 닿은 온기와 촉촉함, 하루의 입안을 탐색하는 듯 하던 그의 움직임이 떠올라, 자꾸만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으아!”
하루는 책상다리를 한 채로 뒤로 드러누웠다.
“으아, 으아, 으아! 어떡해. 진짜 죽겠네.”
자꾸만 생각난다.
그와 처음으로 키스를 했을 때보다 뜨겁고 농밀했다.
온몸이 간질거리면서도 저릿한, 이상한 감각이 하루를 지배했다.
키스를 하면서도 그를 원했다.
조금 더, 조금 더, 그와 더 많은 곳이 겹쳐지기를 바랐다.
“아, 진짜. 어떡하지? 으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아.”
하루는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거렸다.
입가에 묻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어떡해. 진짜. 보고 싶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가 보고 싶었다.
지금 이곳에 그가 있어줬으면 좋겠다.
전화를 걸면 우현은 두 말 하지 않고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그건 위험하다.
‘정말 위험해. 지금 단둘이 있으면 내가 그 남자를 덮칠지도 모르겠어. 와, 나 진짜 음란하구나.’
딩동-
갑자기 초인종이 울려서 하루는 벌떡 일어났다.
그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초인종이 울려서, 어쩌면 우현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후다닥 달려가,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너, 여자애 혼자 살면서 이렇게 조심성 없을래? 누구냐고 묻고 문을 열어야지.”
얼굴을 보자마자 미영이 타박했다.
그 뒤에 있던 은서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쩐 일이야? 무슨 일 생겼어?”
두 친구를 보자마자 희정의 일이 떠올라,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우현과의 키스로 들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미영과 은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둘 다 편의점 봉지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언뜻 보니 맥주와 소주와 소주와 소주.
“얘들아. 우리 집에 안주 없는데.”
“오면서 치킨 배달 시켰어.”
은서가 말했다.
“그러다가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럼 너네 집 앞에서 울면서 먹어야지, 뭐.”
“있길 잘했네.”
은서와 미영은 소주와 맥주를 한 병씩 식탁 위에 꺼내놓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 문을 닫았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치킨이었다.
양념치킨 냄새를 맡았지만 배가 고프진 않았다.
종일 놀이공원을 다니면서 군것질을 잔뜩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에게 최근 우현과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를 못했다.
하지만 조희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때에, ‘난 지금 행복해 죽겠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강우현 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미영이 하루의 접시 위에 닭다리 하나를 올려놨다.
하루는 닭다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또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친구들은 항상 하루를 먼저 챙겨주었다.
그동안 이걸 왜 깨닫지 못했을까.
우현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하루에게 변화가 하나 생겼다.
별 것 아닌 일로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난 배불러. 술이나 마실래.”
하루가 닭다리를 도로 미영의 접시 위에 올려놨다.
미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강우현 씨, 너한테 진짜 홀딱 빠진 것 같아.”
희정이 한 짓에 대해 얘기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내용이라서 하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거든. 그런데…… 사실 하루야. 조희정이란 애가 우리 하루살이를 망하게 하려고 손을 썼었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루가 벌떡 일어나자, 은서가 달래듯 말했다.
“앉아, 앉아. 망하게 하려고 한 거지, 진짜로 망하게 하지는 못했으니까.”
두 사람은 그동안 하루살이에 벌어졌던 일을 설명했다.
하루는 둘이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나 혼자 설레고 행복해했다니.
“네가 도경이 시켜서 우리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라고 했잖아. 그날, 도경이가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 남자가 찾아왔어.”
“그 남자?”
우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음에도, 하루가 멍하니 물었다.
“응, 강우현 씨. 그 남자가 우리 하루살이에 찾아와서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사과를 하더라.”
“아…… 그래?”
우현은 그 부분에 대해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는데, 아니, 그 남자가 잘못한 짓도 아니잖아. 그래서 괜찮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그랬더니?”
“이것 봐봐.”
은서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유명한 포털 사이트에 하루살이 광고가 떠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 봐봐.”
이번에는 미영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유명한 여배우가 자기 사진을 올려놓고 태그를 붙여놨다.
하루살이. 최애쇼핑몰. 매일방문.
그런 식의 태그였다.
“이게…… 뭐야?”
“이게 뭐긴. 강우현 씨가 한 거지. 이 연예인뿐만이 아니라 아이돌들도 그렇고, 이런 홍보 글 엄청 많이 올려줬어. 게다가 조희정 쪽 사람들이 블로그나 맘카페 게시판에 올렸던 게시물들도 싹 내려갔어. 그래서…….”
“우리, 이번에야말로 진짜 대박 터진 것 같아. 하루야.”
은서가 미영의 말에 이어서 말했다.
하루의 눈이 커졌다.
“정말?”
“응, 정말. 지금 방문자 수도 엄청 많고.”
하루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런 하루를 보며, 미영이 말했다.
“이건 너한테 말 안 했는데…… 저번에 네가 취했을 때 우리가 강우현 씨 부른 적 있었잖아. 그때, 그 남자가 그러더라. 널 챙겨줘서 정말 고맙다고.”
“아.”
우현은 낙성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기가 널 지켜주겠다고 했어.”
하루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하루살이 일 때문에 우리한테 찾아왔을 때, 이제 자기가 우리의 백이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래. 하루야, 이거…… 이거 아무래도 말이야.”
미영이 입을 다물었다.
하루는 미영이 왜 말을 못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루가 사랑을 두려워하니까, 하루가 사랑을 싫어하니까, 말해버리면 하루가 도망칠까 걱정이 돼서 그러는 것이리라.
하루는 자신이 씩씩하게 살아오기는 했어도, 친구들에게 많은 걱정을 끼쳤다는 걸 깨달았다.
“있잖아. 미영아, 은서야.”
그래서 하루는 말했다.
“나, 강우현 씨를 사랑해. 사랑하게 됐어.”
은서는 “진짜?”하고 외쳤지만, 미영은 멍하니 하루를 쳐다봤다.
하루는 어린 시절부터 쭉 자신의 곁을 지켜준 친구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강우현 씨가 정말로 많이 좋아.”
미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영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물을 참으려는 것 같았다.
한참 그렇게 감정을 갈무리한 미영이 다시 하루를 돌아봤다.
“뭐야, 이하루! 그런 좋은 소식을 이제야 알려? 어떻게 된 거야? 언제, 어디서, 어느 시점에 사랑을 깨달은 건데? 응?”
미영이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렸을 뿐인데, 쇼핑몰이 잘 되는 것보다 더 기뻐해주는 친구들을 보며 하루가 말했다.
“마법에 걸렸어. 그 사람이 나한테 전부 다 괜찮다고 했거든. 그래서 나는 정말 다 괜찮아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