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지금 갈게.
“부자들은 원래 너처럼 싸가지가 없니?”
하루의 말에 희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말 되게 저렴하게 한다?”
“약속시간보다 40분 넘게 지각하는 네 행동은 고급이고?”
“네가 만나자며? 너 때문에 일부러 멀리 나온 건데, 이 정도는 기다릴 수 있는 거 아냐?”
“아, 그런 시스템이었어? 알겠어.”
하루의 담백한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희정이 더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하루.”
“왜, 조희정.”
“내가 여기까지 나왔는데 감사하는 마음 좀 갖지 그래?”
“감사해서 늦은 부분에 대해 알겠다고 하고 넘어갔잖아.”
“네가 안 넘어갔으면 어쨌을 건데?”
“벌떡 일어나서 여기 이 여자가 약속을 하고 40분을 늦는, 아주 개념 없는 여자라고 소리쳤겠지.”
“개념은 네가 없는 것 같다. 공공장소에서 저렴하게.”
하루는 지적할 부분이 아주 많았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이러다가는 말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커피, 안 마셔?”
“난 이런 데서 커피 안 마셔.”
“아, 그래. 알겠어, 그럼. 내가 부른 이유는…….”
“네 친구들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해서겠지.”
“그래, 맞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친구들이 말 안 해주든?”
“응, 내 친구들은 내가 마음 불편할 것 같은 얘기는 안 해주거든. 걔들이 그렇게 함구한다는 건, 네가 마음 불편할 짓을 저질렀다는 뜻이고.”
“그럼 그냥 모른 체 넘어가지, 굳이 날 여기까지 불러내야 했어?”
“응. 나 때문에 내 친구들이 고통받는 건 싫으니까.”
“아이고, 대단한 우정이시네.”
“무슨 짓 했어?”
“별 짓 안 했어. 그냥 경고를 좀 해준 거야. 친구 가려서 사귀라고. 네가 내 남친 뺏었잖아.”
“나는 네 남친 뺏은 적 없어. 넌 이미 우현 오빠랑 헤어진 후였잖아.”
“뭐야, 너? 이제 우현 오빠라고 부르는 거야? 징그럽게.”
“너도 오빠라고 하잖아. 네가 더 징그러.”
“나는 어릴 때부터 알았으니까!”
“내로남불이 따로 없네. 그런 건 됐고, 내 친구들한테 뭘 어떻게 한 거야?”
하루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그녀가 불안해한다는 걸, 희정은 알 수 있었다.
주도권을 잡은 건 자신이라는 사실에 우쭐해졌다.
“내가 말해줄 것 같아?”
“말해주면 좋겠어.”
“그럼 넌 뭘 해줄 건데?”
“뭐?”
“내가 말해주면 넌 뭘 해줄 거냐고? 우현이 오빠랑 헤어질 거야?”
“내가 왜 이 문제로 우현 오빠랑 헤어져야 하는데.”
“네가 내 남자를 뺏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이하루. 넌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본데, 나 그렇게 우스운 사람 아니거든. 그래, 너는 우현 오빠 믿고 그러는 것 같은데, 나도 백이 있어.”
“백 있는 거 알아. 하지만 너와 나의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어머, 아직 반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그렇게 우는 소리를 하면 어째?”
“반도 안 했다니…… 대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아하하하. 너, 진짜 바보 같다. 내가 그걸 말해줄 것 같아?”
희정이 비웃었다.
하루는 희정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물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말했잖아. 네가 내 남친 뺏었으니까.”
“너랑 우현 오빠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어. 그리고 네가 우현 오빠를 찼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래?”
“그건 진짜로 찬 게 아니라 계획의 일부였어. 강우현을 내 손에 넣을 계획의 일부!”
“그렇게 계획까지 세워서 우현 오빠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어? 정작 우현 오빠는 너한테 관심도 없고, 게다가…… 넌 돈도 많고 예쁘잖아. 네가 원하면 어떤 남자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거 아냐? 너한테 관심 없는 강우현보다 널 많이 아끼고 사랑해줄 남자들이 많을 텐데.”
하루의 말에 희정은 이런 와중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희정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해주는 사람들은 넘치도록 많았지만, 왜인지 하루가 하는 말은 입에 발린 말 같지 않게 들렸다.
“뭐, 그건 그렇지.”
“그런데 왜……?”
“우리 집안엔 강우현이 필요해.”
“뭐?”
“세정 그룹의 이름이 필요하다고.”
“아니, 대체 세정이 뭐라고…….”
“넌 평민이니까 잘 모르겠지만, 우리 쪽 사람들은 그런 게 있어. 명문가.”
“명문가……? 너네도 명문가 아냐?”
“우리는 그냥…… 돈 많은 집이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자존심 상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하루의 앞에서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희정은 자신이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냥 어쩌다 보니 돈이 많아진 집안이야. 아빠 쪽은 아예 평범하고, 외가가 좀 살아. 외할아버지는 국회의원인데, 그냥 이름 없는 그저 그런…… 아, 내가 너한테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야 해?”
“난 평민이라서 잘 모르니까.”
“아, 그러네. 이래서 평민 상대하기 힘들어. 아무튼 내가 우현이 오빠랑 결혼을 하면, 우리 집안은 세정 계열이 되는 거야. 명문가가 되는 거지.”
“단지 그런 이유야?”
“단지 그런 이유냐니? 이게 얼마나 큰 건데. 다들 세정이란 이름에 손가락 하나라도 담글 수 있을까 싶어서 얼마나 전전긍긍하는 줄 알아? 나는 우리 집안의 희망이야. 강우현만 손에 넣으면 우리 가족들도 더는 나를 무시하지 못…….”
거기까지 말하고 희정은 입을 다물었다.
가족들에게 무시당한다는 이야기만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분명 비웃을 것이다.
‘아씨, 진짜. 쟤는 왜 저렇게 사람 말을 진지하게 들어줘서, 속에 있는 얘기 다 하게 만들어?’
짜증이 나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데, 하루가 말했다.
“희정아, 왜 가족들이 널 무시해? 넌 대단한 애잖아.”
“야, 너 지금 나 놀리니?”
“놀리다니. 넌 엄청 예쁘고 몸매도 좋고, 옷도 세련되게 입을 줄 알잖아. 그리고 듣기로는, 박사과정 밟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지?”
“맞긴 한데…….”
“그럼 머리도 좋은 거고. 네가 무시당할 만한 게 뭐가 있어? 너, 대단해.”
하루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희정을 응시하며 말했다.
희정은 이런 말을 들어본 게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가가 시큰거리는 이유 또한 알 수 없었다.
“단지 가족을 위해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랑 결혼을 하려는 거야? 네가 그렇게까지 네 인생을 희생해야 할 필요가 있어?”
하루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순수한 눈빛에 속지 말자.
이하루는 강우현을 갖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뿐이다.
희정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난 우현이 오빠를 사랑해. 그리고 이건 희생이 아냐. 세정 그룹을 등에 업으면 나도 유익하니까.”
“정말 사랑해? 우현 오빠 없으면 죽을 것 같고, 세상에서 태양이 사라지는 것 같고, 그래?”
물론 그 정도는 아니었다.
강우현 좀 없다고 태양이 사라지긴 왜 사라져?
“그래!”
하지만 거짓말을 했다.
이하루도 거짓말하는데, 나도 좀 하면 어때서.
“그래? 뭐, 그래. 그렇다고 치고.”
하루는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태도에, 희정은 울컥했다.
“이하루, 아까도 말했지만 네 친구들한테 한 건 그냥 가벼운 경고일 뿐이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강우현은 내 거야. 네가 그걸 인정하지 않고 계속 우현이 오빠 옆에 붙어 있겠다면, 네 친구만이 아니라 너네 가족들도…….”
희정은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너네 가족들’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하루가 벌떡 일어선 것이다.
우당탕-!
하루의 다리에 밀린 의자가 뒤로 넘어갔지만, 하루도 희정도 의자를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하루는 겁에 질린 눈으로 희정을 노려봤고, 희정은 그런 하루의 반응에 당황해서 숨도 쉴 수 없었다.
지금껏 담담하던 하루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흔들리고 있었다.
희정은 저런 눈빛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타인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을 뿐인데도 숨이 턱 막혀왔다.
‘뭐야…….’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얘, 왜 이래?’
그때, 하루의 입술이 벌어졌다.
“너…… 너 설마…… 내 가족들한테 연락한 거 아니지?”
“어? 어. 아직 연락은 안 했는데…….”
하루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넘어진 의자를 세우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하지 마. 내 가족들에게는 연락하면 안 돼.”
“아니, 그건 네가 하는 거 봐서…….”
“뭐라도 할게.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 테니까. 내 가족들한테는 연락하지 마.”
하루가 간절하게 말했다.
하루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 부근이 묵직해졌다.
희정은 하루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절망스러워 보이는 하루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뺨을 맞으면 지지 않고 상대를 때려주는 이하루여야 하는데, 지금 하루는 톡 건드리면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희정은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정말 뭐라도 할 거야?”
“응.”
“그럼 우현이 오빠랑 헤어져.”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 하루는 희정이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아니, 못 헤어져.”
“야, 너!”
“네 시종처럼 살라면 살 수 있어. 그런데 우현 오빠랑 헤어지는 건 못해. 안 해.”
“그럼 너네 가족한테 연락하는 수밖에 없겠네! 당신 딸 때문에 당신들이 이런 꼴 당하는 거다, 그렇게 경고하는 수밖에 없네.”
“……너, 진짜 비열하다.”
“비열한 건 너야! 날 도와주겠다더니 확 가로챘잖아.”
“그건 정말 미안해! 사정이 달라졌어!”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너도 작은 소리는 아니잖아!”
“네가 큰소리를 내니까 어쩔 수 없지!”
“잘 생각해봐. 네가 먼저 큰소리 냈거든?”
둘은 씩씩거리며 싸우다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하루는 이미 차갑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도 좀 줘봐.”
희정이 커피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런 데서 커피 안 마신다며?”
“너 때문에 속이 타서 그런다, 속이 타서.”
“말 바꾸는 데 선수네.”
“말 바꾸는 데 선수인 건 너거든? 네가 먼저 말 바꿨잖아!”
희정은 투덜거리면서도 하루의 앞에 놓인 잔을 가지고 가 남은 커피를 다 마셔버리고, 하루에게 물었다.
“너네 가족들이랑 무슨 일 있어?”
하루가 고개를 숙였다.
“……없어, 그런 거.”
“그런데 왜 그렇게…….”
거기까지 말하고 희정은 입을 다물었다.
‘왜 그렇게 겁에 질렸어.’
왜인지 그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걸 묻는 순간, 하루가 왈칵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희정은 하루가 싫었지만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하루는 크리스마스 파티 때처럼, 희정이 한 대 때리면 마주 때리는, 그런 이미지로 남아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희정아. 나는 우현 오빠랑 못 헤어져.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 나는 사랑 같은 거 안 할 줄 알았어. 그런데 사랑하게 돼버렸어. 사랑하니까, 지금은 못 헤어지겠어.”
“아주 당당하다, 너?”
“아니, 난 지금 하나도 안 당당해. 네가 내 가족들한테 연락할까 봐 무서워. 정말 무서워 죽겠어.”
또다.
또 심장 한 부근이 뻐근하다.
희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진짜 이상해. 이렇게 무서운데도, 무서운 걸 피하려면 우현 오빠랑 헤어지면 되는 건데도…… 우현 오빠랑 헤어지는 게 더 무서워. 그래서 안 되겠어. 네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어.”
그럼 너네 가족한테 연락해야겠네.
그렇게 협박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희정은 묵묵히 하루가 일어서는 것을 지켜봤다.
“갈게.”
희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루도 대답을 바라지 않은 듯, 일어서자마자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희정은 비어버린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멀어지는 하루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희정은 지금껏 못된 짓 많이 해왔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이 못된 사람으로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하루에게 무척이나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였다.
‘몹쓸 짓을 당한 건 나야! 쟤가 먼저 말 바꿨잖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한 번 무거워진 마음은 도통 가벼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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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아버지는 하루를 싫어하면서도, 하루가 집을 나가는 걸 두고 보지는 않았다.
성인이 되었으니 나가겠다고 말했던 날, 정말로 많이 맞았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년!
돈을 벌어서 꼭 갚겠다고 했는데도, 아버지는 하루를 놔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가지고 온 수갑으로 하루를 화장실에 묶어두었다.
그때 수갑에 쓸렸던 손목은 다 나았지만, 갑자기 아릿하게 아픔이 몰려왔다.
하루와 연락이 되지 않아 몰래 찾아온 도경이 아니었다면, 하루는 평생 그 화장실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날, 도경이 많이 울었지.’
하루를 구해주면서 도경은 펑펑 울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몰랐다고, 그런 말을 하면서 자기가 갇혀 있었던 것처럼 울었다.
그래서 오히려 하루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 인간은 그냥 내가 고통스러운 게 좋은 거였어. 은혜고, 뭐고.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니까, 날 옆에 두고 괴롭히고 싶었던 거야.’
이제 와서 재혼한 부인이 데려온 딸이, 자기가 낳은 아들보다 똑똑한 딸이, 아버지는 끔찍이도 싫었던 것 같다.
희정이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면, 아버지는 하루를 붙잡으러 뛰어올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왔다.
하지만.
‘우현 오빠랑 헤어지는 게 더 싫어. 못 헤어지겠어.’
어차피 계약기간이 끝나면 헤어질 사이, 지금 헤어진다고 달라질 건 없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하는 이 몇 개월이 소중했다.
어쩌면 이 몇 개월 때문에, 남은 몇 년을 고통스럽게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잃고 싶지 않았다.
우현의 곁에 있고 싶었다.
불현듯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져, 하루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치 휴대폰을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현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하루가 먼저 전화를 걸면, 그는 늘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게 참 좋았다.
“오빠, 뭐해요?”
[네 생각해.]
하루는 웃었다.
신기한 일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무서워서,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편안해지다니.
“오빠, 보고 싶어요.”
그러자 그는 하루가 듣고 싶었던 대답을 해주었다.
[지금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