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절대로 떠나지 않아.
“이건 강우현 씨가 잘못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미영이 말했다.
“아니요. 제가 잘못한 겁니다. 제가 아니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니 제 잘못입니다.”
“에이, 그건 아니죠. 그렇게 따지면 세상 모든 일이 강우현 씨 잘못이게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실 거 없어요.”
은서가 담백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나오니 오히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걔들은 하루한테 얘기 안 하겠다고 했어요. 하루는 이런 일 생기면 보상하려고 할 게 뻔하거든요. 걔넨 보상 받을 생각 없고요. 아마 왕자 형이 보상한다고 해도 됐다고 할 겁니다.
도경의 말대로였다.
-내 친구들이 어디 가서 지는 애들은 아니고, 가끔 나도 걔네가 너무 무서울 때가 있지만. 이 나이 되니까 알겠더라고요. 아무리 싸움 잘하고 말 잘해도, 결국 돈이 최고라는 거. 조희정이라는 여자, 돈 많은 것 같다고 하던데요. 내 친구들끼리는 수습하기 힘들 것 같아서요.
도경이 말해줘서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희정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방치하다가, 하루만 곤란하게 만들 뻔 했다.
“조희정 때문에 손해 보신 부분은 제가 보상하겠습니다.”
우현의 말에 은서가 웃었다.
“뭐야, 강우현 씨. 조희정이란 여자 보호자라도 되세요?”
“네?”
“아니, 그렇잖아요. 잘못한 것도 그 여자, 손해를 끼친 것도 그 여자인데 그걸 왜 강우현 씨가 와서 대신 사죄하고, 대신 보상을 해주시려고 해요? 그 여자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럴 리가요. 아시다시피 저는 하루밖에 없습니다.”
“네, 그러시겠죠. 그럼 조희정이 한 짓은 신경 쓰지 마시고, 하루나 신경 써주세요.”
“그래도 지금 이 사태는…….”
“이건 조희정이 잘못한 일이에요. 강우현 씨 잘못 아니에요.”
미영이 우현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곧은 눈동자를 보니, 우현이 무슨 말을 해도 보상을 받아줄 것 같지는 않았다.
“사과도 안 받아줄 거예요. 강우현 씨가 잘못한 거 아니니까. 우리가 강우현 씨한테 바라는 건 그저…… 하루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뿐이에요. 그거면 돼요.”
하루의 친구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아마 하루가 좋은 사람이기에 그런 것이리라.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 이런 친구들을 곁에 둘 정도로 잘 자란 하루가 존경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그러기 위해서, 그 작은 몸으로 얼마나 노력을 해왔을까.
“하루를 행복하게 해줄 겁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와 별개로…….”
“아, 이 오빠. 진짜 고집 있으시네.”
미영이 벌떡 일어났다.
“저기요, 강우현 씨. 우리가 돈도 없고 백도 없지만, 그래도 지금껏 잘 살아왔거든요. 이 문제도 알아서 잘 해결하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괜한 죄책감도 갖지 마시고요.”
“맞아요. 그냥 얼른 하루한테나 가세요. 얼른요.”
미영과 은서가 양쪽에서 우현의 팔을 하나씩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도경이 말했던,
“나도 가끔 걔네가 무서울 때가 있지만.”
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미영과 은서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현은 미영과 은서에게 떠밀려 하루살이 사무실 밖으로 쫓겨났다.
이런 취급은 처음이었다.
“김미영 씨, 심은서 씨. 그렇게들 말씀하시니, 일단은 가겠습니다.”
우현이 현관문 앞에서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얼른 가세요.”
미영이 귀찮다는 듯 손을 훠이, 훠이 저었다.
이런 취급 또한, 우현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두 분이 하나는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네, 뭘요?”
은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두 여자의 냉대에 우현은 기가 죽었지만, 그래도 그들과 눈을 똑바로 맞추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두 분의 백입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가 두 분 뒤에 서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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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이 떠난 후에도, 은서와 미영은 한참 동안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이윽고 은서가 미영을 돌아봤다.
“방금…… 뭐였지? 나, 방금 좀 두근거릴 뻔했어.”
“어, 그러게…….”
“우와, 진짜 하루 애인이라는 거 몰랐으면 홀딱 넘어갈 뻔했네. 저 남자, 개차반이라고 소문났다 하지 않았어? 그런데 무슨 저렇게 행동해? 우와. 대박. 저 남자, 진짜 우리 하루 좋아하는 거 맞지?”
“응, 그렇겠지.”
“우와, 하루 진짜 복 터졌네. 완전 하루한테 푹 빠져서 우리한테까지 잘해주는 거잖아, 저거.”
은서가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갑자기 미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은서는 당황해서 미영의 팔에 손을 얹었다.
“야, 김미영 팀장. 갑자기 왜 그래? 왜 울어?”
“아니, 그냥. 그냥.”
미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쭈그리고 앉았다.
은서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미영의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았다.
“하루가…… 하루가…….”
“응, 하루가?”
“하루가 정말 힘들었거든.”
“…….”
“너무 고통스러웠거든.”
“…….”
“이렇게 사랑받는 거 보니까…… 정말…… 아, 정말…… 정말…….”
“다행이지?”
“응, 다행이야. 정말. 정말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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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하나?’
우현은 차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루의 친구들은 괜찮다고 했지만, 우현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조희정이 쇼핑몰을 망하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쇼핑몰을 성공하게 해주면 되겠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각 포털 사이트 메인에 광고를 걸고, 연예인이 언급하게 하고, 소셜에 홍보를 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문제는 조희정이야. 그걸 어떻게 처리할까?’
희정이 아직까지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줄은 몰랐다.
그동안 연락이 없어서 포기한 줄 알았는데.
‘안 그래도 심란한데…….’
도경과 만나고 나서 하루의 기억 문제로 고민을 하는 와중에, 명지까지 우현의 정체를 약점으로 잡고 나섰다.
그런데 이제는 희정까지 골치 아프게 만든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 보고 싶다.’
오늘은 하루를 만나는 날이 아니지만, 우현은 하루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하루를 불러낼 생각은 없지만 그녀와 가까운 곳에라도 있고 싶었다.
‘하루 친구들도 하루한테나 가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변명하며, 빌라 앞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하루의 방 창문을 확인했다.
아직 불이 밝혀져 있는 걸 보니, 잠들기 전인 것 같았다.
우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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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코끼리 인형을 배 위에 올리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한 날이었다.
금요일에 연차를 낸 나희는 오늘도 연차를 쓰고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나희가 걱정되는 한편, 친구들도 걱정이었다.
도경은 아무 일도 없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친구들에게 매수를 당한 것 같다.
도경은 가끔 “얘넨 너무 무서워.”라고 말하곤 했으니, 아마 오늘도 도경이 무서울 만한 일이 있었던 거겠지.
‘정말 무슨 일이지?’
희정이 이유 없이 친구들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구들한테 돈을 주면서 나랑 우현 오빠를 헤어지게 해달라고 했나? 그런 거라면…… 음, 나쁘진 않은데. 그 돈 받아서 잘 쓰고, 도저히 헤어지게 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면 되잖아.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고…… 무슨 짓을 한 거지?’
희정의 생각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드르르르-
얼굴 옆에 놔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무심코 휴대폰을 집어든 하루는 액정을 확인하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6번 출구]
우현에게서 온 전화였다.
잘 자라는 메시지를 주고받기는 해도 통화하는 일은 별로 없기에, 우현의 전화가 반가웠다.
“여보세요?”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좀 들뜨면 어때? 반가운데.
[자고 있어?]
“아니요. 쌩쌩하게 눈 뜨고 있어요.”
[그래.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저도요. 저도 오빠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이제 하루는 ‘데이트 하는 날’, ‘데이트 하지 않는 날’을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계약서에는 ‘일주일에 두 번만 데이트한다.’가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데이트를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매일 데이트를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계약이 끝나는 날까지는 매일 연인처럼 행동해도 괜찮다.
아마 그래서 우현도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리라.
‘그럼 나야 좋지. 나는 매일매일 강우현 씨를 만나고 싶으니까. 매일매일 목소리를 듣고 싶고.’
욕심껏 행동해도, 계약이 끝나는 날까지 우현이 하루를 나무라는 일은 없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우현을 향한 신뢰가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걸, 하루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거 듣기 좋은 말이네. 한 번 더 말해줘.]
우현이 말했다.
“오빠가 보고 싶었어요. 정말 많이.”
[그래, 나도.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내가 더 많이 보고 싶어 했을걸요.”
[그럴 리가.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알면 진짜 깜짝 놀랄걸.]
“오빠는 내 마음 알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숨도 못 쉴 거예요.”
둘은 키득키득 웃었다.
[요새 무슨 일 없어?]
“무슨 일이요?”
[그냥, 여러 가지로.]
“음. 별일 없어요. 오빠는요?”
[나는…… 문제가 하나 있어.]
“어떤 문제?”
[한 여자가 있어. 우리 팀원인데…… 그 여자가 내가 좋대.]
“아.”
그동안 다른 문제들 때문에 명지에 대해 잊고 있었다.
우현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던 그녀를 떠올리자, 명치가 죄여왔다.
[물론 나는 그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응, 알아요.”
[조만간 떼어내긴 할 건데, 방법을 찾는 중이야. 그래도 네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오해, 안 해요.”
우현이 솔직하게 말해줘서 좋았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래, 나 믿지?]
“믿죠, 당연히.”
대답하면서, 이게 자신의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우현을 믿는다.
나는 강우현이라는 남자를 믿고 있다.
내 친구들을 믿듯이.
불현듯 그가 몹시 그리웠다.
이렇게 통화를 하는데도 갈증이 느껴졌다.
지금 그를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루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으로 향했다.
지금 저 길에 그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창 밖을 내다본 하루의 눈이 커졌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희미한 가로등 불빛뿐이어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강우현.
그가 하루의 집 앞 거리에 서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하지만 하루는 그 심장박동이 제 속도를 되찾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지금 하루의 머릿속에는 그저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휙 돌아선 하루는 현관문을 향해 달렸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1층에 도착해 빌라 문을 나서자, 고개를 약간 숙이고 귀에 휴대폰을 대고 있는 그가 보였다.
“오빠.”
하루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하루를 발견한 그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그런 우현이 몹시도 사랑스러워서, 그 사랑스러움을 이 한 몸에 가득 채우고 싶어서.
하루는 그를 향해 달려가 두 팔로 그를 끌어안았다.
+++
반짝이는 나비들이 무수히 많이 날아와 품에 안긴 것만 같았다.
품에 안긴 반짝임이 녹아들어 가슴 속까지 반짝거렸다.
밤인데도 밝은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우현은 아찔한 기분으로, 자신의 품에 안긴 하루를 내려다봤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루는 늘 우현이 하는 행동을 이기겠다는 듯 애정표현을 해왔다.
이렇게 먼저 애정표현을 해온 건 처음이었다.
이것도 계약 때문일까?
‘아니, 그런 생각은 관두자. 아무려면 어때?’
좋은데.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행복한데.
우현은 미소 지으며 하루를 보듬어 안았다.
“이렇게 달려와서 안길 줄은 몰랐는데.”
“너무 사랑스러워요?”
“응. 가슴이 벅차.”
“나도 그래요. 오빠가 보고 싶었는데 정말로 여기에 있잖아요. 오빠는 정말 마법 같은 사람이에요.”
“그래?”
“응, 정말로.”
하루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마음껏 그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우현은 정말 마법 같은 사람이었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잔뜩 있으니까 아주 많은 걸 가진 거라고, 그리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우현은 하루에게 ‘세상을 네 마음대로 휘둘러도 돼.’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네가 뭔가 원하면 이루어질 거야.
네가 바라는 게 있으면 그대로 될 거야.
그리고 정말로 그대로 되었다.
그가 보고 싶은 이 순간, 그를 볼 수 있는 지금처럼.
“오빠가 있어서 행복해요.”
나도 그래.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정말?”
하지만 우현은 하루의 생각과 다른 대답을 했다.
하루는 고개를 들었다.
우현은 어딘지 모르게 슬픈 미소를 띠고 하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런 표정을 짓는 거지? 설마…… 내가 너무 과하게 내 마음을 표현해서 부담스러워진 건가?
덜컥 불안해졌다.
그래도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 정말로요.”
“그럼 내가 계속 네 곁에 있어도 돼?”
“당연하죠. 왜 그런 질문을 해요?”
“그냥. 언젠가 떠나라고 할 것 같아서.”
“그런 일 없어요.”
“그래, 그럼 됐어. 그럼 쭉 옆에 있을게.”
우현은 하루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다시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하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속삭였다.
“이제 절대로 널 떠나지 않을 거야. 네가 나를 미워하게 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