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죄송합니다.
희정의 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말을 하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미영과 은서가 문을 잠그고 험악하게 희정의 앞뒤를 막아서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너였냐? 네가 우리 쇼핑몰 말아먹게 하려고 사주한 거야?”
미영이 희정의 멱살을 잡았다.
그제야 희정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돈 좀 있나 보다, 너? 돈 내놔.”
“뭐, 뭐라고요?”
“돈 내놓으라고. 너 때문에 손해 본 금액, 그대로 내놔. 그러면 조용히 돌려보내줄게.”
“이봐요, 김미영 씨.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무슨 짓인 것 같은데?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봐. 네가 한 짓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는 거잖아, 지금!”
미영의 눈이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희정은 덜컥 겁이 났다.
이제야 이 공간에 자신의 편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경호원을 고용할걸!’
생각이 짧았다.
하루의 친구들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희정의 앞에서 쩔쩔매고 미안해하고 사죄하고, 제발 지금 하는 짓을 그만둬달라고 애원할 줄로만 알았다.
희정이 무슨 말을 해도, 미영은 돈 타령만 할 것 같았다.
희정은 우선 돌아가서 재정비를 하고 찾아오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물러나는 게 자존심 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노려보는 미영이 너무 무서웠다.
두 손으로 미영이 멱살 잡은 손을 떼어내고, 휙 돌아섰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은서가 희정의 앞을 막아섰다.
“어딜 도망치시려고?”
“비켜!”
“비켜? 어쭈, 지금 말 놨어?”
말은 네가 먼저 놨잖아!
라는 항의는 할 수 없었다.
“이 내장에 XXX할 XX가 지금 뭐라는 거야? 이 XX가 XXX해서 XX할 X 같은 게 죽을라고! 이 XXX를 XX할 기집애가. 오늘 한번 XXX 돼서 XXXX하고 싶어?”
은서의 귀엽고 도톰한 입술 사이로, 희정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욕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표정이 변하지도 않은 채, 입술을 많이 벌리지도 않고 주문처럼 욕을 쏟아내는 은서는 눈이 광기로 빛나는 미영보다 무서웠다.
희정은 오늘 처음으로 ‘죽는다!’는 공포를 맛봤다.
‘나는 오늘 이 여자들한테 죽을 거야.’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XXXX. XXX를 XXX 해버릴까 보다.”
이 와중에도 은서의 욕설은 계속되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
희정은 이제 자존심이나 우아함 같은 걸 생각할 여유가 사라졌다.
그저 이 무시무시한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눈치를 보던 희정은, 은서가 희정의 뒤에 있는 미영을 건너다보며,
“어떻게 죽일까?”
라고 물어보는 틈을 타 현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데 너무 긴장해서 문이 잘 안 열렸다.
당장이라도 미영와 은서가 덮쳐올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기도 무서웠다.
간신히 문을 연 희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미영과 은서는 팔짱을 끼고 서서, 그런 희정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저 여자, 뭐 하는 여자지? 차림새 보면 있는 집 자식인 것 같은데…….”
미영이 현관문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그러게. 이게 강우현 씨 때문에 한 짓이란 말이야? 저 여자, 강우현 씨를 좋아하나? 진짜 약혼녀인 것 같지는 않고.”
“그 남자도 참 마성의 남자네. 하루가 피곤하겠어.”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이 정도 했으니, 또 우리 쇼핑몰을 건드리지는 않겠지?”
“글쎄. 남아도는 게 돈이면 또 할 수도 있지.”
“그럼 어떡하나?”
“어떡하긴. 쇼핑몰 닫고, 우리가 아닌 척하고 다른 사람 명의 빌려서라도 새로 쇼핑몰을 열어야지.”
“그래, 그러면 되겠다.”
“오늘 일은 하루한테 비밀로 하자.”
미영의 말에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하루 걔, 자기 때문인 줄 알고 전전긍긍할 텐데. 모은 돈 다 우리한테 줄지도 몰라.”
+++
하루는 주말인데 할 일이 없어서, 홀로서기 사무실에 들렀다가 별일 없으면 하루살이 사무실에 내려가 친구들과 수다나 떨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뛰어나왔다.
희정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뛰어나오던 희정이 하루를 보고 멈춰 섰다.
“조희정, 네가 왜 여기에……?”
“야! 너네 친구들 진짜 상스럽다! 진짜 상종을 못 하겠네!”
희정이 버럭 외쳤다.
내 친구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 내 친구들한테 무슨 짓 했구나?”
“됐어!”
희정은 벌컥 화를 내고는 하루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갔다.
달려가서 희정을 붙잡을까 했지만, 그녀가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하루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하루살이 사무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벌컥 열렸다.
화난 표정으로 문을 연 은서가 하루를 보자 활짝 웃었다.
“하루. 요새 얼굴 보기 너무 힘들다? 연애하느라 너무 바쁜 거 아냐?”
“은서야. 내가 여기 내려오는 길에 조희정을 만났는데…… 음. 그러니까 예쁘장하게 생기고 기가 세 보이는 애거든. 혹시 걔가 여기 찾아왔었어?”
“응? 그게 뭐야? 김미영 팀장. 여기 누구 찾아왔었어?”
은서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래. 계속 같이 있었으면서 뭘 묻고 그래? 하루, 들어와. 점심 배달시키려고 하고 있었는데, 같이 점심이나 먹자.”
은서와 미영의 태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했다.
하지만 희정은 분명 ‘네 친구들 진짜 상스럽다!’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뭔가 감추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너네, 진짜 무슨 일 있었지?”
하루가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무슨 일? 별일 없는데. 뭐 먹을래? 우린 중국집에 시킬까 하는데, 너 안 내키면 다른 데 시키고.”
“점심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야. 우린 지금 너무 굶주렸어. 점심이 문제야. 너무 문제야.”
은서가 진지하게 말했다.
하루는 어쩔 수 없이 짬뽕을 시켰다.
“그럼 짬뽕 둘, 자장 하나, 탕수육 하나로 한다?”
미영이 중국집에 전화를 걸고 주문을 하는 동안, 하루는 바닥에 앉아 은서를 응시했다.
은서의 얼굴에서 숨기는 걸 찾아내려 했지만, 은서는 오히려 하루에게 물었다.
“요새 그 남자랑 어때? 저번에 여행 다녀온 후로 제대로 얘기를 못 들었잖아. 우리한테도 대충만 말해주고.”
“그 남자는 그냥…… 사실 말이야. 강우현 씨에 대해서 너희들한테 할 얘기가 있어.”
아무래도 희정이 친구들을 찾아온 이유가 우현일 것 같았다.
하루는 우현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그가 세정그룹 핏줄이라는 걸 알리지 않으려 했지만 사태가 이러니 어쩔 수 없었다.
“응, 뭔데?”
주문을 끝낸 미영이 다가와서 하루의 옆에 앉았다.
“강우현 씨 말이야. 사실은 세정 그룹 회장님의 손자야.”
“세정 그룹 회장님의 손자…… 헐! 대박, 그 세정 그룹? 네가 다니는 그 세정?”
“웬일이야. 그래, 보통 남자는 아닐 것 같아서. 아우라가 아주 그냥.”
친구들은 신기해하고 놀라워하고 그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아주 평범한 반응을 보였다.
하루는 적당히 대답해주다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조희정이라는 애가 찾아왔지? 걔가 너희들한테 무슨 짓 했지?”
“아니, 그러니까 조희정이 누군지 모르겠다니까? 대체 누군데 그래?”
오히려 미영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강우현 씨 전 애인이고…… 아마 부자일 거야.”
그러고 보니, 희정에 대해 아는 게 많지는 않았다.
“그 부자인 여자가 왜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해?”
은서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거야…… 강우현 씨 되찾으려고.”
“강우현 씨 되찾으려면 너한테 무슨 짓을 해야 하는 거 아냐? 우리가 강우현 씨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그건 그러네. 하지만 조희정은 날 싫어하니까, 내 친구들도 꼴 보기 싫어서 괴롭혀주는 걸지도 모르잖아.”
“이 나이에 왕따를 시킬 것도 아니고, 괴롭히긴 뭘 어떻게 괴롭혀? 너도 참 사서 고민한다.”
미영이 말했다.
하루는 아무리 캐물어봐야 두 사람이 말해주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그들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데 하루가 걱정할까 봐 모르는 척하는 것이리라.
배달 온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하루는 일어났다.
친구들과 마음 편히 수다를 떨 여유가 없었다.
하루살이 사무실을 떠난 하루는 도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경아, 부탁이 하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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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게 이상한 부탁을 받았다.
미영과 은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얼마 전에 같이 술을 마실 때만 해도, 그들에게는 딱히 특별한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월요일 저녁, 일을 끝낸 도경은 하루살이 사무실로 찾아갔다.
어제 전화를 건 하루는 당장 물어보면 의심할 수도 있으니, 월요일이나 화요일쯤 지나가는 말로 물어봐달라고 했다.
하루가 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으니, 분명 무슨 일이 있기는 할 것이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루살이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은서가 말했다.
“도경아. 네 명의 좀 빌리자.”
“……명의는 가족한테도 빌려주는 거 아니랬다.”
“거봐, 윤도경 아주 바보 아니라니까. 등쳐먹기 좋은 상대는 아냐.”
미영이 말했다.
“에이, 윤도경 아주 바보일 줄 알았는데.”
미영과 은서는 늘 그렇듯, 도경을 앞에 두고도 거르는 것 없이 말했다.
무서운 여자들이라고 생각하며, 도경은 들고 온 봉지를 내려놨다.
봉지 안에는 술과 편육, 치킨이 들어 있었다.
“이야, 윤도경. 우리 배고픈 줄은 어떻게 알고.”
“오, 편육이다. 나 편육 진짜 좋아하는데. 김치는 안 사 왔어? 김치랑 같이 먹어야 맛있어.”
걸신들린 것처럼 편의점 봉지를 뒤지는 두 여자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너네 요새 뭐 안 좋은 일 없냐?”
도경의 질문에 은서와 미영이 움직임을 멈췄다.
두 손은 봉지를 잡은 채 스르륵 얼굴만 돌리는 두 여자가, 도경은 너무너무 무서웠다.
“왜, 왜, 왜 그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내가 겁낼 것 같아?”
“겁내고 있잖아. 너, 하루한테 부탁받고 온 거지?”
미영이 콕 집어 말했다.
도경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닌데?”
“그럼 내 눈 똑바로 쳐다보고 말해.”
“난 원래부터 네 눈을 똑바로 쳐다본 적 없어. 네 눈은 항상 돈독이 올라 있어서 무섭단 말이야.”
“하아.”
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주를 꺼냈다.
“도경아. 너는 이 얘기 하루한테 안 할 거 같아서 해주는 말인데. 이거 하루한테 말하지 마.”
“응, 당연히 말 안 하지.”
물론 하루에게 말해줄 생각이었다.
하루의 부탁을 받고 온 거니까.
하지만 그동안 하루살이에 있었던 일과 그 일의 배후가 조희정이라는, 우현의 전 여친이라는 걸 알게 되니 하루에게 말할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래서 도경은 그 자리에서 하루에게 전화를 걸어,
“별일 없대. 요새 주문이 많아서 엄청 바쁜가 봐. 그냥 피곤하다는데?”
라고 말했다.
도경은 이 사태에 대해 하루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우현에게는 말할 생각이었다.
친구들 역시 하루에게만 말하지 말라고 했지, 우현에게 말하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과 간단한 술자리를 가진 후, 밖으로 나와 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왕자 오빠.”
[윤도경 씨. 그 왕자 오빠란 소리 좀 관둘 수 없습니까?]
“그럼 왕자 형.”
[…….]
“제 친구들한테 일이 하나 벌어졌는데요. 그게 아무리 왕자 형이랑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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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미영과 은서는 술이 확 깼다.
“죄송합니다.”
우현은 문 앞에서 깊이 허리를 굽혔다.
“저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렸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영과 은서가 입을 벌린 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우현이 찾아올 줄도, 와서 이렇게까지 사죄를 할 줄도 몰랐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동안에도, 우현은 허리를 굽힌 채였다.
“아, 저기. 저기, 강우현 씨. 저기, 괜찮아요. 저기, 일어나세요.”
어지간해서는 당황하는 법이 없는 미영도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천천히 허리를 편 우현이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전부 보상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저기요. 음. 아, 일단 좀 들어오실래요?”
은서와 미영이 옆으로 비켜섰다.
사무실에는 의자가 두 개뿐이었다.
“일단 앉으세요.”
“아닙니다. 두 분이 앉으시지요.”
그래서 미영과 은서가 앉고 우현이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왠지 교무실에서 학생을 혼내는 선생님이 된 기분이라, 미영과 은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났다.
“아니에요. 역시 손님이시니까 강우현 씨가 앉으시는 게 좋겠어요.”
두 사람의 강한 제안에 우현이 앉고, 미영과 은서가 우현의 앞에 섰다.
왠지 범인을 취조하는 형사가 된 기분이었다.
“야, 너도 좀 앉아.”
미영이 은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네가 앉아. 내가 키가 작으니까 높이가 딱이야.”
“아니, 네가 앉고 내가 바닥에 앉으면 되지.”
“안 돼. 너무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잖아. 난 내려다보는 게 익숙하지 않단 말이야.”
두 여자가 앉는 걸로 실랑이를 하는 동안, 우현은 두 손을 무릎 위에서 거머쥐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우현의 모습은 고뇌에 빠진 영화 속 주인공 같아 보였다.
결국 미영이 의자에 앉고, 은서는 미영의 옆에 섰다.
왠지 은서는 공주님을 보호하는 기사가 된 기분이었지만, 이쯤은 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