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왕자 오빠
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왕자 오빠.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듣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해준 상대가 근육질의 남자이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우현은 가만히 도경을 응시했다.
도경이 그 호칭을 어떻게 아는 걸까?
“내 기억에는 도경 씨가 없는데.”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도경은 없었다.
만약 도경을 만난 적이 있었다면, 이 유쾌한 남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하루한테 들은 적이 있거든요. 왕자 오빠에 대해서.”
“하루랑 아는 사이입니까?”
“절친이죠.”
“그렇군요. 그럼 들어가서 얘기하죠.”
“좋습니다.”
우현이 문을 열자마자, 현관문 앞에 앉아 있던 연두가 꼬리를 치며 두 사람을 반겼다.
낯선 사람이 있는데도 연두는 경계하는 빛이 전혀 없었다.
연두를 본 도경이 환하게 웃었다.
“이야, 골든레트리버네요. 진짜 예쁘다. 이름이 뭐예요?”
쭈그리고 앉아 연두를 쓰다듬는 도경은 방금 전까지 심각하게 얘기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연두요.”
“연두. 연두야, 반가워. 나는 윤도경이라고 해. 도경이 형, 아니, 여자앤가? 도경이 오빠, 하고 부르면 돼. 아이고, 예뻐라.”
연두를 쓰다듬느라 현관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도경을 놔두고, 우현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아직도 연두를 쓰다듬고 있는 도경을 살펴봤다.
‘하루의 절친이라고? 나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는 건 꽤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건데……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내 친구는 엄청 싸움을 잘해. 태권도를 하거든. 나도 걔처럼 싸움을 잘하고 싶어.
그 때 말한 ‘내 친구’가 도경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이윽고 정신을 차린 도경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가 우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집으로 초대를 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하루 친구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거 정말 감동이네요. 하루도 그 감동적인 배려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그렇겠죠.”
도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우현이 물었다.
도경은 우현을 빤히 응시했다.
쌍꺼풀 없는 눈매 안에 갇힌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왕자 오빠. 저는 남의 뒷담화를 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은 하루 얘기를 좀 하려고 왔어요. 입 가벼운 남자처럼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죠.”
우현은 도경이 ‘왕자 오빠’라고 부르는 걸 그만둬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말을 하면 대화가 끊길 것 같아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하루 옆집에 살았어요. 그래서 굉장히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죠.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하루의 가족들은 하루를…… 뭐랄까…….”
“학대했죠.”
도경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우현이 거들었다.
도경은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맞아요. 학대했어요. 하루 아버지는 하루를 때렸고, 하루 어머니는 하루를 방치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건데…… 하루 아버지, 하루의 친부가 아닙니다.”
“네, 압니다.”
“하루가 말해줬나요?”
“네.”
“그렇겠죠. 하루가 어릴 때 왕자 오빠를 정말 좋아했으니까.”
우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도경이 알 정도로 하루가 자신을 좋아했었는지는 몰랐다.
“제가 철이 들기도 전부터, 하루는 있을 곳이 없는 애였어요. 제가 조금씩 철이 들면서 하루의 상황을 알게 된 후에도, 저는 하루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죠. 그때는 너무 어려서, 하루를 위해 뭘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거든요.”
“…….”
“하루 어머니는 남편 눈치를 보느라,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하루가 무슨 짓을 당하든 모르는 척했어요. 그래서 하루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나와 있는 시간이 더 많았죠. 그런데 되게 웃기는 게…… 하루의 계부는 밖에서 이미지가 정말 좋아요. 공무원이었는데, 싹싹하고 친절해서 동네 인기인이었죠. 우리 어머니도 하루 계부를 얼마나 칭찬했는지 몰라요. 사사건건 하루 계부와 우리 아버지를 비교해서 부부싸움이 날 때도 있었죠.”
도경이 쓰게 웃었다.
“하루는 늘 참고만 살았어요. 그런 하루 인생에, 저처럼 어리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하루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치부해버리지도 않는 사람이 나타났죠.”
“그게…… 혀니 오빠입니까?”
“그래요. 혀니 오빠. 혀니 형. 저도 그렇게만 기억합니다. 혀니 형. 그렇게 불렀거든요. 그 당시에 아마…… 고등학생쯤 됐던 것 같아요.”
도경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고, 우현은 끼어들지 않고 혀니 오빠라는 사람에 대해 들었다.
근처 보육원에서 사는 혀니 오빠는 늘 혼자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하루를 안쓰럽게 여겨서인지, 종종 놀이터에 와서 하루를 상대해주었다.
때로는 보육원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하루와 다 같이 놀 때도 있었다.
혀니 오빠는 하루의 말을 믿어주었고, 그래서 하루는 힘들 때 혀니 오빠의 앞에서는 울 수 있었다.
하루가 울면 반응해주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보통 그 역할을 가족이 하는데, 하루의 가족은 하루가 울 때면 화를 내니까요. 제 앞에서 하루가 울 때는 굳어버렸고요. 왕자 오빠 앞에서 하루는, 아마 웃었을 거예요. 언젠가 저한테 왕자 오빠가 슬퍼 보인다는 말을 한 적이 있거든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씩씩하게 굴었던 거구나.
너보다 내가 더 슬픈 줄 알고.
날 웃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널 그렇게 걱정시켰구나.
네가 더 많이 아프고, 네가 더 많이 힘들었을 텐데.
도경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내리는 우현을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
“혀니 오빠는 하루에게 가족이었어요. 하루는 혀니 오빠 앞에서만큼은 평범한 어린애로 돌아갈 수 있었죠.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하루를 눈에 거슬려 하는 하루의 계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 봐요.”
하루와 혀니 오빠를 못 만나게 했다.
그래도 하루는 계부의 눈을 피해 혀니 오빠를 만났다.
계부에게 혼나더라도, 맞더라도, 혀니 오빠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사고가 났어요. 대낮에 음주운전이었죠. 하루가 차에 치여서 죽을 뻔했는데, 혀니 오빠가 하루를 구했어요. 하루는 좀 다치고 끝났지만, 혀니 오빠는……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루를 챙기는 혀니 오빠를 곱게 보지 않던 하루의 계부는, 이 기회에 혀니 오빠를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계부는 혀니 오빠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 하루를 추행해왔다고 했어요. 이번에도 몹쓸 짓을 피하려다가 생긴 사고라고 주장했죠. 사람들은 누구의 말을 믿었을까요? 보육원 출신의 고아와 덕망 있는 공무원의 말 중에서.”
“안 봐도 뻔하군요.”
“네. 동네 사람들은 혀니 오빠 같은 사람과 한동네에 살 수 없다며 보육원을 찾아가 항의했어요. 보육원 원장은 어떻게든 혀니 오빠를 감싸려고 했지만, 혀니 오빠가 스스로 떠나겠다고 했죠. 병원에 있던 하루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퇴원한 후 그 사실을 알게 된 하루는…….”
도경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경의 입가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다시 눈을 뜬 도경이 말했다.
“옆집 살았다고 했잖아요. 저는 그런 비명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봤어요. 하루는…… 걔는 자기 계부한테 맞을 때도 소리 한 번 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날, 절규했어요.”
하늘을 찢는 것 같은 절규였다.
자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다치고, 심지어 누명을 뒤집어쓴 채로 동네에서 쫓겨났다.
이 모든 것은 나 때문이다.
내가 나쁘다.
어린 하루가 견디기에는 너무도 큰 절망과 죄책감이었다.
“들은 얘기로는, 그 후에 기절을 했나 봐요. 다시 깨어났을 때, 하루는 기억을 잃었어요. 살면서 조금씩 기억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죠. 하루를 특히 아프게 하는 것들. 예를 들자면…….”
도경이 우현을 노려봤다.
“왕자 오빠 같은 거.”
우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왕자 오빠. 하루는 좋지 않은 경험을 너무 많이 했고, 하루의 뇌는 하루를 보호하기 위해 안 좋은 것들 몇 개를 지워버렸습니다. 저는 굳이 그 기억들을 되살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그렇군요.”
“나중에 혀니 오빠를 찾은 후에는 괜찮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혀니 오빠를 찾고는 있는데, 쉽지가 않더군요. 영화에서 보면 뚝딱 잘도 찾아내는데, 현실에선 그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제가 돕겠습니다.”
우현이 말했다.
도경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우현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왕자 오빠. 하루는 왕자 오빠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절 만날 때마다 너무 신나게 왕자 오빠 얘기를 하는 바람에 제가 질투를 할 정도였죠. 그런데 그 왕자 오빠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하루는 정말 많이 슬퍼했습니다. 정말로 많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우현도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하루가 왕자 오빠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아픈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왕자 오빠가 더 이상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자기가 나쁜 아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나쁜 아이. 그건 하루 계부가 하루를 혼낼 때마다 사용하던 말이죠.”
“…….”
“왕자 오빠의 부재는 하루를 나쁜 아이로 만들었어요. 알겠습니까, 왕자 오빠? 당신은 어릴 때 하루에게 큰 상처를 줬습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하루 앞에 등장한 거고요.”
“압니다. 제가 상처를 줬다는 거.”
“저는 강우현 씨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루를 상처 준다면 싫어하게 되겠죠. 하루의 기억을 멋대로 끄집어내지 마세요. 하루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때의 상처를 기억해내게 하지 마세요.”
우현은 울고 싶어졌다.
그동안 하루와 분위기가 괜찮아서 들떠 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왕자 오빠. 또 그런 식으로 하루를 떠날 거라면, 지금 떠나세요. 하루에게 강우현이란 사람이 또다시 소중한 사람이 되기 전에.”
이 말에는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안 떠납니다. 내가 먼저 하루를 떠나는 일도, 그 손을 놓는 일도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도경은 의외로 쉽게 우현의 말을 받아들였다.
좀 더 완고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도경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한동안 테이블을 노려봤다.
우현은 애인의 아버지를 앞에 둔 심정으로 도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도경이 입을 열었다.
“왕자 오빠.”
“네?”
“전부터 하나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네, 뭡니까?”
“왕자 오빠란 호칭 말인데요. 그거, 왕자 오빠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 겁니까?”
“…….”
“아니, 왜요? 궁금하잖아요. 대체 누가 자기를 왕자 오빠라고 불러달라고 하는지, 어린 마음에도 진짜 궁금했거든요. 대답해보세요. 그거, 설마 왕자 오빠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 거예요?”
물론 우현이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왕자 같은 오빠’에서 ‘왕자 오빠’로 격상되고 싶어 노력했던 건 사실이었다.
우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불리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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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집을 나온 도경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하!”
집 안에 있던 우현이 이 웃음소리를 듣고 얼굴을 붉혔다는 걸, 도경은 몰랐다.
“하하하하하. 불리고 싶어서 노력했대!”
심각하게 대답하는 우현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귀여웠다.
자신보다 연상의 남자가 귀여워 보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 잘생긴 남자가 왕자 오빠라고 불리고 싶어서 노력했다니.
하루가 어릴 적에 왕자 오빠 타령을 해댔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 강우현 씨.’
강 회장의 집을 오며 가며 마주쳤을 때는, 무뚝뚝하고 진지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항상 표정이 굳어 있어서, ‘세상 고민 다 끌어안고 사나 보네.’라는 생각도 했었다.
알고 보니 우현은 귀여운 사람이었다.
물론 이하루 앞에서만.
‘그때, 왜 갑자기 하루를 떠난 걸까? 아까 보니까 후회하는 것 같던데.’
후회의 빛이 없었다면, 아까 그 자리에서 하루를 더는 만나지 말라고 경고했을 것이다.
‘왕자 오빠가 하루에게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괜찮겠지. 왕자 오빠도 진심인 것 같고.’
도경은 하루의 일이라면 유독 예리해졌다.
그래서 우현이 하루에게 품은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가 과거를 기억해내는 건 별개의 일이야. 잘못해서 과거를 한꺼번에 기억해내기라도 하면…….’
하루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계부에게 당한 그 모든 과거의 기억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