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자고 가도 돼?
그의 손이 하루의 배에 닿아 있었다.
하루는 배에 힘을 줬다.
하루의 정수리에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 쿵, 쿵 뛰었다.
집안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지?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거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건 백허그. 그래, 백허그야! 허그는 포옹인데, 그럼 백허그는 뒷포옹이 되는 건가? 그건 좀 이상한데?’
하루는 혼란에 빠져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등에 그의 가슴이 닿은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지금 울리는 이 심장박동도 그에게 전해지지 않을까?
그럼 안 되는데.
‘어떡하지? 이럴 땐 어떡해야 하는 거야?’
하루는 백허그가 처음이었다.
백허그를 당했을 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머리꼭대기에서 우현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꼭 신혼부부 같다.”
조금 들뜬 듯한 그의 음성을 듣자, 하루는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 아주 날잡았구만. 오늘 아주 제대로 계약연애의 프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건가 봐.’
그렇다면 성공이다.
심장이 터질 듯 뛰어대니까.
‘하지만 나도 질 생각은 없어. 나도 할 수 있어.’
우현이 하루를 놀리는 거라면, 하루도 우현을 당혹스럽게 만들어주자고 결심했다.
“그러게요. 우리, 진짜 달콤하네요. 완전 신혼부부 같다. 그런데 오빠. 신혼부부가 백허그만 하겠어요?”
하루는 우현이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품 안에서 휙 돌아섰다.
우현은 여전히 하루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있었기에, 하루의 가슴이 그의 명치에 닿았다.
그 자세로 하루는 우현을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자기. 커피 먼저? 아니면 나 먼저?”
우현의 눈이 커졌다.
하루를 안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성공이다.
그를 당황시켰다!
하지만 다음 순간, 하루가 더 당황할 일이 벌어졌다.
우현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하루의 손목을 잡아끌어 식탁으로 데려가 하루를 번쩍 들어 식탁에 앉힌 것이다.
“당연히 너 먼저.”
하루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우현이 하루의 어깨를 슬쩍 밀어 식탁에 눕혔다.
하루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우현을 쳐다봤다.
이제 곧 농담이야, 하고 웃어야 하는데 우현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웃음기 전혀 없는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 와중에도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잘생겼다고 생각하며, 하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 전 그와 나눈 첫 키스가 떠올랐다.
‘키스하려나 봐! 어떡해!’
그의 숨결이 하루의 볼에 닿았다.
하루는 숨을 멈췄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하냐고 생각하면서도, 하루는 우현을 밀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하루는 이런 자세로 키스를 할 때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야 할지, 아니면 그의 팔뚝을 잡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 하루의 이마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그의 입술이었다.
그의 입술이 하루의 이마를 부드럽게 눌렀다가 떨어졌다.
“날 도발하지 마, 이하루.”
그가 속삭였다.
평소보다 낮은 음성이었다.
“이러다가 계약을 위반하게 될지도 몰라.”
‘위반해도 돼요!’
라는 말을 할 뻔했다.
‘이미 위반했잖아요!’
라는 말도 할 뻔했다.
하지만 하루는 그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가 계약을 그만 끝내자고 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야한 생각으로만 가득 찬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다시 눈을 떴다.
우현은 식탁 옆에 서서 장난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루는 입술을 비쭉거리며 식탁에서 내려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말했다.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제가 좀 치명적이거든요.”
“응, 정말 치명적이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어.”
“그럴 거예요. 워낙 매력이 넘쳐서.”
“그러게 말이야.”
하루는 투덜거리며 싱크대로 향했다.
“그래서, 믹스커피 정말 괜찮아요?”
“응, 괜찮아.”
우현은 하루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네.’
하루가 장난치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넘어갈 뻔했다.
-자기. 커피 먼저? 아니면 나 먼저?
품 안에 있던 하루가 짓궂은 눈으로 우현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순간, 이성이 날아갔다.
계약조항이라든가, 아직 하루에게 이 모든 것이 진심이라는 걸 전하지 못했다든가, 그런 것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갖고 싶었다.
하루의 말대로, 이 치명적인 여자의 전부를 갖고 싶었다.
그녀의 입술, 목덜미, 옷 안에 감춰진 그 모든 것을 눈에 넣고 소유하고 싶었다.
음습한 욕망이 우현을 지배했다.
아마 그 욕망이 눈동자에 드러났을 것이다.
하루가 두려움에 두 눈을 질끈 감지 않았더라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조심해야 해.’
우현은 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상처를 줘서는 안 돼.’
요새 하루는 우현에게 마음을 많이 열었는지, 예전보다 더 연인 역할을 잘해내고 있었다.
‘하루는 날 믿고 저런 연기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 내가 잘못 행동하면…… 진짜로 마음을 닫아버릴 거야.’
우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하루는…… 자기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럽고 섹시하고 치명적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
우현은 하루의 친구들이 들으면 경악할 정도로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냥 숨만 쉬어도 예쁘고 사랑스럽고 섹시하고 치명적인데, 저런 행동까지 하면…… 정말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군. 누구라도 못 버틸 거야.’
물론 다른 사람들은 잘 버틸 수 있는 일이었다.
우현에게만 그랬다.
우현의 눈에는 하루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우니까.
우현의 세계에는 그저 이하루라는 여자 한 명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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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간이 있다.
딱히 대단한 것을 하는 것도 아닌데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중요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몰입하게 되는 시간.
나중에는 기억하지도 못할 내용의 대화인데도 즐거운 시간.
하루는 우현과 보내는 시간이 그랬다.
식탁에 마주 앉아 믹스커피를 한 잔씩 들고 대화를 나눴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회사 얘기일 때도 있고, 얼마 전에 본 소설 이야기일 때도 있고, 연두가 어릴 때 얼마나 사고를 쳤는지, 지금은 얼마나 똘똘한지.
그런 이야기였다.
하지만 즐거웠다.
우현이 개그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몇 번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그의 미소가 깊어지는 걸 보는 것도 좋았다.
슬슬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왔을 때는 아쉬웠다.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내가 지금 이 남자에게 ‘더 있다가 가요.’라고 말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루는 궁금했다.
그때, 우현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하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컵을 잡고 있는 하루의 손등에 겹쳐졌다.
그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하루는 움찔했다.
손등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다.
우현은 하루를 지그시 응시하며 물었다.
“자고 가도 돼?”
순간, 하루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가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자고 간다고? 침대가 좁은데. 어떡하지?
이불, 언제 빨았더라?
같이 자야 하나? 이 남자만 거실에서 재우는 건 좀 그렇겠지? 그래도 손님인데.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잘 수 있을까?
아니, 난 못 잘 거야. 난 분명 심장이 터져 죽겠지.
그나저나 이 남자, 뭘 입고 잘 생각이지?
정장을 입고 잘 순 없을 텐데. 우리 집에 이 남자가 입을 만한 옷이 있나?
하루에게는 ‘안 돼요.’라고 말하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때, 우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하루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휴, 진짜.”
여유롭게 대꾸해야 하는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현을 사랑하게 된 후로, 그와 키스를 나눈 후로, 머릿속에서 야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자고 가겠다는 말 따위 장난일 게 뻔한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질 않는다.
그저 이 남자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조금 더 접촉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난 진짜 음란한 여자구나. 그동안 깨닫지 못했을 뿐, 진짜 음란, 그 자체였어!’
이런 부분은 친구들에게는 절대로 들킬 수 없다.
특히 윤도경에게는 죽는 한이 있어도 들켜서는 안 된다.
하루가 우현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된다면, 도경은 그 부분을 가지고 몇 날 며칠을 떠들어댈 것이다.
‘자고 가도 돼?’라는 한마디에, 하루가 얼마나 혼란에 빠졌는지 꿈에도 모르는 우현은 하루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가봐야겠네. 너도 피곤하겠다.”
“네, 가세요.”
하루는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을 감추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우현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매정한데? 애인을 너무 쉽게 보내는 거 아냐?”
“아, 그럼 취소. 다시 할게요.”
“응.”
하루가 우현의 옆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오빠, 가지 마. 하루는 오빠랑 같이 있고 싶어. 밤새도록.”
그가 나를 놀린 만큼 그를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우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 이건 너무 쉬운 여자처럼 보였나? 좀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하루는 후회했다.
우현은 하루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갈게.”
“네, 그러세요.”
우현이 하루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잘 자, 하루야.”
방금 전 느낀 민망함이 싹 가질 정도로, 그의 손길은 다정했다.
“네, 오빠도요. 조심해서 가요.”
“그래.”
우현이 나가자마자 하루는 휙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놓여 있는 코끼리 인형을 집어 들었다.
“으아, 마루야. 어쩌지? 내가 너무 나댔나 봐. 아까 되게 별로였나 봐. 강우현 씨가, 음, 우현 오빠가 엄청 크게 한숨을 내쉬었어! 어떡해! 나한테 싹 질렸을까? 응? 그런 걸까?”
하루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다리를 동동 굴렀다.
“으아, 내가 미쳤지.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으아. 으아.”
으아, 으아, 괴상한 신음을 흘려대던 하루는 문득 그가 뒤에서 안아주던 순간을 떠올렸다.
허리를 감아오던 단단한 팔뚝과 등에 닿은 그의 가슴, 정수리에서 느껴지던 그의 숨결.
마치 우현과 함께 있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하루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하루는 코끼리 인형을 꽉 끌어안고 코끼리 인형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어떡하지, 마루야? 점점 더 좋아져. 대체 이 마음은 어디서 멈추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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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우현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지기 전, 하루가 가지 말라고 했을 때.
그게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진짜로 그녀를 덮칠 뻔했다.
커다란 눈으로 우현을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고 치명적인지, 아무래도 그녀는 모르는 것 같다.
‘큰일 날 뻔했네.’
자신이 이렇게까지 욕정에 약한 남자일 줄은 몰랐다.
나름 굉장한 자제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자제심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군.’
하루와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다는 건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저번에 우현의 집에 하루가 왔을 땐, 연두가 있어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두가 아니었으면 침대에 누워 무방비하게 잠든 하루에게 몹쓸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난 내 자신을 좀 더 의심할 필요가 있어. 난 믿을 만한 놈이 아니야.’
오늘 점심때 가족들과 식사를 했던 일은, 더 이상 우현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현을 채운 건, 하루와 단둘이 보낸 오후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우현은 다음 데이트 때는 하루와 뭘 해야 할지 고민을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걸음을 옮기며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우현의 집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건장한 체구의 남자.
현관문을 응시하고 있던 남자가 인기척을 느낀 듯 우현을 향해 돌아섰다.
우현은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봤다.
하지만 그 남자가 우현의 집 앞에 서 있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우현이 걸어가는 동안, 남자는 가만히 서서 우현을 기다렸다.
가까이 다가가 걸음을 멈췄다.
“윤도경 씨, 날 찾아온 겁니까?”
도경이었다.
강 회장의 저택에 찾아갈 때마다 종종 마주치곤 했다.
항상 싹싹하게 웃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도경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강 회장의 신변에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강 회장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안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려는데, 도경이 먼저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합시다, 왕자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