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또 하고 싶다, 키스.
‘첫 키스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정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았다.
우현이 첫 키스라니.
그 잘난 얼굴을 가진 남자의 입술이 지금껏 지켜져 왔다니.
하지만 진짜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연기……였을까? 아니, 진짜 같았어. 에이, 뭐. 아무려면 어때.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문제는 그와 키스를 했다는 것이다.
‘왜 키스한 거지? 우리 접촉은 이마에 뽀뽀까지 아니었어? 물론 싫은 건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좋지. 정말…… 엄청…… 우와, 진짜 좋았어. 키스가 그런 거구나!’
지금껏 해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좋았다.
‘또 하고 싶다, 키스.’
그의 입술을 한 번 더 느끼고 싶었다.
그가 옆에 있었다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한 번 더 키스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떡하지? 앞으로 만날 때마다 키스를 하고 싶어지면. 해도 되나? 그 남자가 먼저 했으니까, 나도 한 번쯤은 먼저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럼 언제 해야 하지? 키스는 어떤 분위기일 때 해야 하는 거야?’
하루는 영화에서 키스를 하는 상황을 떠올려 봤다.
지금까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던 키스 장면들 수십 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살짝 입술만 부딪치는 키스, 격정적인 키스, 길고 농밀한 키스.
영화 주인공들이 하루와 우현으로 바뀌었다.
그가 하루의 허리를 감고 격정적으로 입맞춤하는 상상을 하자,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타악-!
타악-!
심장은 지금 하루의 귀에 들려오는 타격음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뛰었다.
‘와, 그런 식으로 키스하면 진짜…… 우와, 너무 야하겠다. 너무 야할 땐 어떡해야 하지? 난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해? 그 남자 목에 내 팔을 감아도 되나? 아니면 그 남자 허리를 감싸 안아야 하나? 아니, 또 키스하기로 결정된 것도 아닌데, 난 지금 뭔 상상을 하는 거야?’
하지만 상상을 끝낼 수 없었다.
그래서 타격음이 멈췄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이하루.”
도경이 목검을 내려놓고 호구를 벗으며 하루를 불렀다.
그제야 하루는 자신이 도경의 회사 연습장에 와 있었다는 걸 떠올리고 정신을 차렸다.
“너, 왜 거기서 그렇게 귀신같이 앉아 있냐? 언제 온 거야? 깜짝 놀랐다, 야.”
“어? 아, 응. 잠이 안 와서.”
하루는 도저히 잠이 안 와서 도경의 회사에 있는 연습장을 찾아온 터였다.
보통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는 홀로서기 사무실에 가는데, 거기 가면 낙성을 마주칠 것 같았다.
도경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새벽 1, 2시까지 체력단련을 하기에, 이곳에 찾아왔다.
지금 혼자 있으면 온갖 망상을 다 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경이 땀을 닦으며 하루에게 다가왔다.
“너, 표정이 왜 그래? 꼭 키스라도 한 것 같다?”
“키스는 무슨 키스!”
뜨끔해서 버럭 외쳤다.
도경이 미간을 좁혔다.
“아니, 농담한 건데 왜 씅질이야? 못 본 새에 왜 그렇게 예민해졌어? 아주 뾰족해. 찔리겠어. 뾰족구두야?”
도경의 말도 안 되는 비유를 들으니, 첫 키스 이후로 쭉 이어진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뭔 일 있어?”
도경이 하루의 옆에 앉았다.
“뭔 일은 무슨. 그냥.”
“이 시간에 그냥 찾아올 리가 없잖아. 무슨 일인데?”
“도경아, 너 말이야.”
하루는 도경을 돌아봤다.
“혹시 우리 어릴 적에. 우리 어릴 적에 말이야.”
도경도 하루를 돌아봤다.
도경의 눈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루가 먼저 어릴 때의 일을 꺼내서 불안한 것 같았다.
계속 뜸을 들이면 분위기가 심각해질 것 같아서, 하루는 얼른 말했다.
“너, 혹시. 우리 어릴 때 되게, 엄청, 말도 안 되게 잘생긴 남자. 그러니까 우리보다 한 3, 4살 많은 오빠, 아니, 너한테는 형이겠다. 그런 형 본 적 있어?”
“잉?”
예상과 다른 말이었는지 도경이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잘생긴 남자? 왜? 그게 뭔데? 내가 알아야 하는 거야?”
“아무래도 강우현 씨가 내 과거랑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강우현?”
도경의 눈이 커졌다.
“응, 강우현.”
“네가 강우현을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나랑 지금 계약연애를 하는 사람인데. 6번 출구.”
“어? 그 남자가 강우현이었어?”
“응, 강우현이었어. 내가 너한테 말 안 했나?”
“항상 그 남자라고만 했잖아. 우와, 상상도 못 했네. 강우현이었구나. 우와, 그렇구나. 아, 그러고 보니 강우현도 세정에 다니지. 아, 그랬구나. 그래, 세정에 다니는 말도 안 되게 잘생긴 남자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강우현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루는 도경의 반응에 혼란스러워졌다.
“넌 그 남자를 어떻게 아는데?”
“어떻게 알긴. 나, 요새 하는 일이 세정 그룹 강 회장님 일이잖아. 가끔 자택에서 마주칠 때가 있거든.”
“아, 그랬어? 아, 그렇구나.”
이런 식으로도 인연이 닿을 수 있나 보다.
새삼스레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우현 씨는 어때?”
하루는 예전이었다면 묻지 않았을 질문을 했다.
전에는 그의 사적인 부분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고 싶었다.
“강우현 씨? 음. 잘 자랐구나, 하는 느낌이야. 재벌 쪽 일하다 보면 진짜 진상인 인간들 많거든. 나 같은 사람들은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 사람들이 넘치는데, 세정 그룹 사람들은 다들 정중하게 대해줘. 강우현 씨도 그렇고.”
“그렇구나.”
우현이라면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말도 되게 없고, 무뚝뚝하고.”
“그렇게 무뚝뚝해?”
“응. 아, 너한테는 다정하다고 했지? 강우현 씨가 다정한 모습은 상상이 안 되네.”
“그 정도로 무뚝뚝해?”
“엄청. 강우현 씨는 회장님 뵈러 오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 분위기로 봐서는 가족들 간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네가 원하면 알아봐줄 수도 있고. 회장님이 날 마음에 들어하셔서 물어보면 말씀해주실걸.”
알고 싶었다.
하지만 우현의 가정사를 타인에게 물어보는 건 반칙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냐, 그냥 나중에 내가 강우현 씨한테 물어보지, 뭐.”
“그래, 그럼.”
하루는 도경도 우현을 안다는 사실에 원래 하려던 질문을 잊었다.
“그런데 그 얘기는 뭐야? 강우현 씨가 네 과거랑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말.”
도경이 그걸 상기시켰다.
“아, 맞다. 그 얘기를 하고 있었지. 우리, 어릴 때 강우현 씨 본 적 없어?”
“없는데.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라면 잊을 리가 없지. 게다가 난 기억력이 좋고.”
“기억력이 그렇게 좋아서 시험점수가 그랬어?”
“하루야, 우리 요점을 흐리지 말자.”
“아, 맞다. 아무튼 네 기억에도 강우현 씨가 없는 거지?”
“응, 전혀 없는데.”
“그런데 왜 자꾸…….”
그리운 느낌이 드는 걸까?
어째서 그 손길이 낯설지 않은 걸까?
“자꾸, 뭐?”
“자꾸…… 이상해. 나한테 마루를 선물해준 것도 그렇고, 내가 어릴 때 미트볼 스파게티 좋아했던 것도 알고…… 그리고…… 아, 맞다. 놀이공원.”
“놀이공원?”
“강우현 씨가 나랑 계약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초반에, 데이트하는 날만 되면 놀이공원을 가자는 거야.”
“응.”
“난 놀이공원에 좋은 추억이 없어서 싫다고 했었는데…… 그런데…… 나 어릴 때, 되게 놀이공원 가고 싶었었거든. 너무너무 가고 싶어서…….”
그 얘기를 누군가에게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 상대는 도경도, 미영도 아니었다.
친구들에게는 말하기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다.
우리 아빠는 너네 아빠랑 다르게, 절대로 놀이공원에 데리고 가주지 않아.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고 싶어서?”
하루가 말을 멈추자 도경이 채근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뭔가 왕자님이라거나 그런 거랑…….”
“아!”
갑자기 도경이 탄성을 질렀다.
도경의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왜? 뭔가 기억나는 게 있어?”
“어? 아, 어, 아니. 갑자기 왕자님 소리를 들으니까 너무 오글거려서. 소름 끼친다, 야.”
“……사람 헷갈리게 좀 하지 말아줄래?”
“하하하. 뭐, 어쨌든 강우현 씨 나쁜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이거든. 돈 많은 사람이니까 너한테 사기 칠 일도 없고. 과거야 언젠가 생각날 만하면 생각날 거고. 그러니까 너무 그런 거에 집착하지 말고 만나 봐.”
“응, 그럴 생각이긴 한데…… 그래도 가끔씩 너무 답답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하루가 미간을 모으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생각할 것이 많으면 하루는 늘 이런 표정을 지었다.
도경은 그런 하루를 가만히 응시했다.
-왕자님을 만났어! 왕자 오빠, 엄청 잘생겼어.
도경의 기억 속에는 ‘왕자님’이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하루는 엄청 잘생긴 왕자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왕자 오빠 얘기를 할 때면, 하루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여서 조금 질투가 날 정도였다.
왕자 오빠를 만난 하루는 항상 기분이 좋아서 생글생글 웃었고, 도경은 그런 하루를 보는 게 좋았기에 질투는 아주아주 조금만 하기로 했다.
왕자 오빠는 일주일에 네, 다섯 번씩 하루를 찾아오는 것 같았다.
-왕자 오빠가 안 와.
왕자 오빠 이야기를 한 지 1, 2년쯤 지났을 때.
어느 날부터 하루의 표정이 유독 어둡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하루는 집에서 아무리 안 좋은 일을 당해도 웃었기 때문에, 하루가 그렇게 어두운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다.
-왕자 오빠도 내가 욕심 많고 나쁜 애라는 걸 알게 된 걸까?
하루는 욕심이 많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하루의 부모는 하루에게 항상 욕심 많고 나쁘다고 말했다.
그래서 하루는 더, 더, 더 많이 착해지려고 노력했는데, 왕자 오빠의 부재가 하루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뚝 끊어버린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착해질 수 있지? 나, 욕심 많이 안 부렸는데. 왕자 오빠 앞에서는 착한 애로 있으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던 하루가 울었다.
도경은 또래의 여자아이가 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뻣뻣하게 굳어 우는 모습을 지켜만 봤다.
지금이었다면 꼭 안아줬을 텐데.
왕자 오빠가 없어도 내가 있다고, 내가 네 이야기 들어주겠다고 위로해줬을 텐데.
그저 지켜만 보던 어린 도경의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었다.
왕자 오빠를 만나지 못하게 된 후, 하루는 한동안 우울했지만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그 미소는 전처럼 밝지 않았다.
‘그 사고’ 후에 하루가 왕자 오빠를 기억에서 지웠다는 건, 하루에게 있어서 왕자 오빠가 갑자기 발길을 끊은 일이 큰 상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혀니 오빠’의 기억이 돌아온 후에도 ‘왕자 오빠’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픈 상처였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왕자 오빠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루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도경은 하루가 우는 걸 보는 게 무서웠다.
이제는 하루가 울 때 꼭 안아줄 수 있을 정도로 자랐지만, 이왕이면 하루가 우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하루는 언제나 욕심이 많지 않고, 아주 착한 아이니까.
+++
하루가 도경의 연습실에 있을 때, 은서와 미영은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사무실을 꽉 채웠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은서의 갈라진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미영은 대답 없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은서의 음성이 신경질적으로 변했지만, 미영은 대꾸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문량이 많아져서 제작 주문을 넣고 창고를 임대했다.
어제 물품이 들어와, 포장 아르바이트까지 뽑아 오늘 하루 종일 포장을 하다가 사무실에 들어온 터였다.
주문이 더 늘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 컴퓨터를 켰는데.
“주문 취소가 왜 이렇게 많아? 이게 말이 돼?”
은서가 절규하듯 외쳤다.
그랬다.
사람들이 주문의 50프로 이상을 취소했다.
배송이 조금 늦어질 거라고 공지하긴 했지만 그 때문에 이렇게 많이 취소하지는 않는다.
은서와 미영도 배송으로 인한 주문 취소를 고려해서 제작 의뢰를 넣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도 주문 취소가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이상해.”
간신히 감정을 억누른 미영이 침착하게 말했다.
“주문, 그래. 취소할 수 있어. 그런데…… 주문 취소한 시간 봐봐. 너무…… 한꺼번에 취소한 것 같지 않아? 마치 누가 명령이라도 한 듯이.”
“그러네?”
“뭔가 이상해. 그래, 애초에 주문량이 너무 많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어. 우리가 따로 홍보한 것도 아닌데…… 누가 소셜에 홍보 좀 했다고 이렇게까지 주문이 많아질 리는 없잖아.”
“그건 그래.”
“우리가 그 부분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거야. 좀 더 의심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런데 누가 우리한테 이런 짓을 하는데? 우리, 못된 짓 한 적 있나?”
“글쎄. 라이벌 사에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고.”
“라이벌? 우리 그런 거 생길 정도로 유명한 쇼핑몰도 아니잖아. 근근이 벌어먹고 사는데.”
은서와 미영은 머리를 모으고 이 사태에 대해 의견을 나눴지만,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히는 구석이 없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둘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바닥을 노려봤다.
“괜찮아. 그래도 아직 40프로가 남았잖아.”
미영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말했다.
“40프로만 해도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많이 파는 거야.”
“하지만 남은 것들은 어떡해?”
“일단 배송해야 할 거 배송하고 나서 쿠폰 쏘고 그러면 언젠가는 팔리긴 할 거야. 내년까지 안 팔리면 할인 붙이고 그러지, 뭐.”
“…….”
“좋게 생각하자.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세상 너무 평탄하게만 살긴 힘들잖아.”
미영의 말에 은서가 피식 웃었다.
“방금 그 말, 되게 하루 같다.”
“아, 역시 그랬어?”
“응. 하루는 항상 좋은 쪽으로 생각하잖아. 여러분, 나는 이 실패를 발판 삼아 더욱 더 신중한 이하루로 거듭났습니다. 새로운 이하루를 기대해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겠지.”
둘은 눈을 마주치고 키득키득 웃었다.
“우리도 신중해지자. 일단 배송부터 끝내고,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건지 고민해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