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59화 (59/119)

#(59) 입술이 겹치는 순간

자기가 내뱉은 말에 자신이 놀랐지만 취소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어때. 내가 뭐 대단한 걸 하려는 것도 아니고. 옆에 살짝 눕는 것 정도면 성적접촉에 들어가지도 않잖아. 안 그래? 우리는 필요할 땐 이마에 뽀뽀 정도는 할 수 있는 관계니까. 맞지?’

하루는 또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변명을 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옆 빈 공간에 누웠다.

그는 깊이 잠든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심장이 뛰었다.

쿵, 쿵, 쿵.

시끄럽게 뛰는 소리에 그가 깰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거야. 중간에 강우현 씨가 깨면 나도 좀 피곤해서 누웠다고 변명하면 되지.’

하루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맞닿은 팔에 온 신경이 쏠렸다.

그 부분으로 심장이 옮겨간 듯 했다.

‘우와, 이거 되게 긴장되는 거구나. 대체 진짜 연인들은 어떻게 같이 끌어안고 자는 거지? 만약 그러면…….’

우현의 팔베개를 베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자신을 상상했다.

‘난 진짜 심장이 터져서 죽을 거야.’

이렇게 누워 있으니 자꾸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푹 잠든 듯 들려오는 그의 고른 숨소리에 나른해지기는커녕 심장만 더 펄떡펄떡 뛰어서 난감했지만, 그렇다고 일어나고 싶진 않았다.

‘나 되게 야한 생각 많이 하는 애였구나. 도경이를 욕할 게 아니었어.’

사랑이라는 걸 하기 전에는, 친구들과 하는 야한 이야기가 그저 재미있는 주제일 뿐이었다.

딱히 공감이 되지도, 이 몸이 그런 이야기에 반응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랑을 하게 되니, 단지 함께 누워 있을 뿐인데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생각을 하자, 이하루. 강우현 씨의 몸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다른 생각을 좀 하자고.’

하루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강우현 씨, 우리요.”

그래, 말을 하면 야한 생각도 안 들 것이다.

이런 생각을 안 하려면 그냥 그의 옆을 벗어나면 되는데, 그 선택지는 하루에게 없었다.

“언젠가 본 적 있어요?”

공원에서 재현과 마주친 후부터 쭉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우리요. 되게 옛날에, 내가 아무 힘도 없어서 소중한 것들을 다 잃었을 때에, 혹시 알던 사이예요? 강우현 씨도 나의 소중한 사람이었는데 내가 잊은 건가요?”

혀니 오빠가 떠올랐다.

오래전, 하루는 잠시 ‘혀니 오빠’조차도 잊은 적이 있었다.

하루의 뇌는 하루의 마음을 더 이상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비워버렸다.

의사는 충격으로 인해 뇌가 잠시 멈춘 것뿐, 조만간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했다.

기억은 돌아왔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알았던 거죠? 내가 혀니 오빠를 알고 있을 때? 아니면 혀니 오빠를 만났을 때보다 훨씬 전에? 하지만…… 내가 이렇게 왕자님 같은 사람을 잊었을 리가…….”

또 가슴 속에서 뭔가가 술렁, 움직였다.

왜일까?

왜 왕자님이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리움과 슬픔, 안타까움이 섞인 기묘한 감정이 가슴을 때리는 걸까?

하루는 눈을 뜨고 우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든 그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코가 그의 귀에 닿을락 말락 했다.

떨어져야 해, 라고 생각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간신히 야릇한 생각을 떨쳐냈는데 또 그런 생각이 들려고 한다.

시선을 돌려야겠다.

그를 그만 봐야 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현이 천천히 하루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굳게 감겨 있던 그의 눈이 살며시 뜨였다.

가늘게 뜬 눈매 안에 검은 눈동자가 하루에게 고정되었다.

하루를 발견한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이 움직여 하루의 볼 위에 놓였다.

하루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루야.”

그의 입술이 움직이며 다정하고 애달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루야.

그는 하루를 이렇게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언젠가 이런 식으로 불렸던 것도 같았다.

뭔가 기억이 나려고 했다.

심장이 콱 죄여왔다.

그때.

겹쳐졌다.

입술이.

하루의 눈이 커졌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의 입술이 하루의 입술 위에 살포시 겹쳐져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입술을 내리누르다가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촉촉한 것이 나와 하루의 입술을 핥았다.

두 손으로 우현의 가슴을 밀어내거나, 얼른 얼굴을 돌리거나, 벌떡 일어나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루는 그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입술의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

입술을 더듬던 그가 안으로 들어와, 하루의 고른 이를 훑고 더 깊이 들어와, 하루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들었다.

심장이 입술로 옮겨진 듯했다.

조심스럽고 섬세하고 달콤한 움직임이 하루를 지배했다.

코가 그의 코에 닿아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이 떨어지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숨이 막혀 죽더라도,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차라리 그의 입술에 녹아 그에게 스며들고 싶었다.

그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러면 강우현만 생각할 수 있을 텐데. 다른 생각, 다른 걱정 아무것도 없이 강우현만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우현이 정신을 차린 건, 하루의 볼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목덜미를 스쳐 그녀의 팔로 향했을 때였다.

‘내가 왜 하루랑 키스를 하고 있는 거지?’

꿈인가?

아니,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에 정신을 차린 거였다.

그전까지는 꿈인 줄 알았다.

하루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아주 기분 좋고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루가 스스로 내 옆에 누울 리 없으니까.

일부러 찾아와서 옆에 누워 잠든 내 모습을 보고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러니까 잠결에 느낀 그녀는 꿈이라고, 아주 오랜만에 참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꿈이니까 괜찮겠지.

꿈이니까 뭘 해도 되잖아.

그래서 그녀의 볼을 만졌다.

꿈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촉촉한 눈으로 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발간 볼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꿈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우현을 밀어내지 않았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입술을 벌려, 우현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입술 안을 신중히 탐색하며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런 꿈은 좀처럼 꿀 수 없으니까, 온 힘을 다해 이 꿈을 누리기로 했다.

꿈이라도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그동안 만져보고 싶었던 그녀의 목덜미를 엄지로 쓸었다.

하루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작은 새 같은 움직임이 사랑스러웠다.

‘걱정 마.’라고, 우현은 생각했다.

꿈이라도 널 아프게 하진 않을 거야. 나는 널 다치게 하지도, 무섭게 하지도 않아.

하루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아주 살짝만 목을 만지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런데 이거…… 너무 생생한데?’

손에 닿는 감각이,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입술에 닿는 촉촉함이,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달콤했다.

마치 꿈이 아닌 현실인 것처럼.

거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현은 눈을 번쩍 떴다.

하루의 감긴 눈이 보였다.

그녀의 뒤로 다용도실의 싱크대도 보였다.

그제야 우현은 자신이 홀로서기 사무실의 다용도실에서 잠이 들었던 걸 떠올렸다.

‘이럴 수가! 현실이잖아!’

우현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럴 수가…….’

진짜다.

이 입술도, 손에 닿아 있는 그녀의 팔도, 전부 진짜다.

우현은 혼란에 빠졌다.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런 와중에도 우현은 하루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어내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그동안의 갈증을 해결하려는 듯, 멋대로 하루의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는 현실인데도 우현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있었다.

어색하긴 하지만 열심히 우현을 받아들이는 그녀가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러웠다.

심장이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현은 그냥 꿈만 같은 이 현실을 조금 더 누리기로 했다.

길고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이라도 그녀와 키스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하루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입술을 맞대고 있은 지 얼마나 흘렀을까.

드르르르르-

하루의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두 사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때.

벌컥-

사무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이틀사흘나흘! 어디 갔어? 튀었나?”

낙성이 외침에 하루와 우현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민망한 표정으로 서로를 한 번 쳐다봤다.

“저기.”

우현이 뭐라 말하려는데, 하루가 검지를 자기 입술 위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다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괜찮다는 뜻이었다.

우현이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는 “하아!”하고 그동안 제대로 못 쉰 숨을 내뱉은 후 다용도실을 나왔다.

“뭐야? 한숨 잤냐?”

낙성이 비닐봉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검은 봉지 안에서는 떡볶이 냄새가 났다.

야식을 사 온 모양이다.

“아뇨, 그냥 커피를 좀 마시려고요.”

“그래? 6번출구는?”

“아, 그게…….”

다용도실에서 자요,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우현이 다용도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모습에, 낙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낙성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하루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눈치챈 건가? 이 선배는 눈치가 빠른데.’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심장이 콩콩 뛰었다.

“한숨 잤습니다. 피곤해서.”

우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낙성은 우현을 빤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피곤하시겠지요. 그런데 둘 다 입술이 아주 촉촉해 보입니다? 우리 사무실 습도가 좀 높은가?”

낙성의 말에 우현과 하루가 동시에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낙성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낙성은 이 나이에 첫키스라도 한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모르는 척하자. 끼어들고 싶어서 죽겠지만 모르는 척해야지.

“강우현 씨가 자기 일도 아닌데 이렇게 도와주는 게 고마워서 야식 좀 사 왔습니다. 제가 쏘는 떡볶이와 순대와 튀김과 오뎅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떡볶이에, 순대에, 튀김에, 오뎅까지 사 오시다니.”

“많이 드세요. 많이 드시고 힘내서 학을 마무리 지읍시다.”

“그러죠.”

하루는 숨을 삼킨 채, 두 남자의 어색한 대화를 지켜봤다.

‘눈치챘구나, 낙성 선배!’

이 사무실에 쥐구멍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서 이 자리를 피할 수 있도록.

하루는 주먹을 꽉 쥐었다.

“뭐 하냐, 하루. 너도 앉아.”

낙성이 봉지 안에서 떡볶이를 꺼내며 말했다.

“네, 그래야죠.”

하루는 자리에 앉다가 아까 휴대폰이 울렸던 걸 떠올렸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나희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하 대리, 미안해. 내일 약속 말이야. 모레로 미뤄졌어. 정말 미안해. 그 인간이 또 일이 생겼다면서 취소를 해서. 모레는 반드시 만나기로 했어. 그날로 시간 변경할 수 있을까?]

+++

약속이 미뤄진 덕분에, 학을 접을 수 있는 날이 하루 더 생겼다.

그래서 세 사람은 12시쯤에 일을 마무리 짓고, 나머지는 다음 날 하기로 했다.

재현이 낮에 와서 해둔 것에, 오늘 셋이 함께 접은 것까지 합치니, 내일 접을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낙성은 내일 오지 않아도 된다고, 둘이 데이트라도 하라고 했다.

“아니요. 내일도 와서 돕죠. 이하루 씨와의 데이트는 목요일로 미뤄졌으니까.”

우현은 수요일도, 목요일도 하루를 만날 속셈으로 말했다.

하루가 반박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하루는 가만히 있었다.

“강우현 씨가 돕고 싶다는데 굳이 말리진 않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먼저들 가세요. 저는 할 일이 좀 남아서. 아,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는 거라든가,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민망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낙성은 안 해도 되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우현과 하루를 놀리려는 것 같은데, 우현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어색한 침묵이 하루와 우현 사이에 내려앉았다.

우현은 하루의 침묵이 폭풍전야 같아서 불안했다.

설마 계약을 위반했으니 이 계약은 끝이라고, 두 번 다시 보지 말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데려다줄게.”

우현이 침묵을 깼다.

하루가 우현을 올려다봤다.

“강우현 씨.”

“응?”

“저는…… 첫 키스였어요.”

우현은 하루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거짓말!”

“진짜야.”

“하지만 강우현 씨는 애인이 넘치도록 많았고…….”

“진짜야, 이하루 씨.”

하루가 입을 다물었다.

“또 할 말은 없고?”

“……네, 없어요.”

“그럼 데려다줄게.”

“네.”

우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하루는 키스를 한 게 싫지 않은 것 같았다.

차를 타고 하루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침묵이 흘렀지만, 이번 침묵은 아까처럼 어색하진 않았다.

하루를 내려주고 나서도 우현은 한동안 하루의 집 앞에 머물렀다.

차 안에서 하루의 집 창문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다가 자신의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다.

아직도 그 입술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썩 괜찮은 꿈을 꾸었다.

또 꾸고 싶다.

너와의 입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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