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55화 (55/119)

#(55) 만지지 마. 내 거야.

주말 내내 과거의 기억을 헤집어봤지만 우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잊고 있던 나쁜 기억들만 떠올라서, 하루는 심각한 두통에 시달렸다.

하루는 억지로 기억을 파헤치는 걸 관두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떠오를 일이었으면 코끼리 인형을 선물로 받았을 때 이미 떠올랐을 것이다.

하루의 뇌는 강우현이라는 등장인물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혀니 오빠’도 잊지 않았는데, 우현을 지워버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혀니 오빠 때보다 더 안 좋은 일이? 그럼 강우현 씨는, 내 과거에 나쁜 사람이었나? 나한테 안 좋은 짓을 했나?’

우현은 하루와의 과거에 대해 또렷한 대답을 주지 않았지만, 하루는 그와 과거에 연관이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우현이 코끼리 인형 ‘마루’를 알 리 없으니까.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그 코끼리 인형을 선물해준 것만으로도 확신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강우현 씨가 나한테 나쁜 짓을 했을 리는 없어. 그 남자가 나쁜 짓을 하는 게 상상이 안 돼.’

회사 모든 직원이 상상할 수 있는 그것을, 하루는 상상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희의 말에, 하루는 정신을 차렸다.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는 거 아니에요?”

오늘은 나희가 밖에서 식사를 하자고 해서, 나희와 둘이 회사 밖에 있는 조용한 일식집을 찾아왔다.

최근 회사는 신입사원들이 연수를 끝내고 업무를 시작해서, 다 같이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 때에 나희가 단둘이 밖에서 식사를 하자고 하니, 할 말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하루의 질문에 나희의 표정이 눈에 띠게 어두워졌다.

나희는 말을 꺼내기 힘든 듯, 앞에 놓인 명란마요덮밥을 한동안 내려다봤다.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 같아서, 하루는 채근하지 않고 나희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나희는 명란마요덮밥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하 대리가 하는, 그 일 말이야. 그 이별 일. 그거 이름이 뭐라고 했지?”

“홀로서기요.”

“그래, 홀로서기라고 했지. 홀로서기.”

하루는 나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했다.

그래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가만히 나희를 응시했다.

얘기를 꺼내기 쉽지 않은 듯 홀로서기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던 나희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그걸 이용해야 할 것 같아.”

이런 말일 것 같았다.

하루가 처음 이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희는 종종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독 예쁘게 꾸미고 와서 “오늘 어디 가세요?”라고 물어보면, “데이트!”라며 상큼하게 대답하곤 했다.

대화중에도 종종 남자친구에 대한 언급을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남자친구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게 되었고, 또 어느 순간부터인가 다른 사람들이 남자친구 얘기를 물어보면 쓴웃음만 지었다.

그래서 하루는 나희가 애인과 헤어졌는데도 그 사실을 감추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아직 헤어진 건 아니었나보다.

하루가 대답이 없자, 나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지인은 받아주지 않는다거나…… 그런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래, 다행이네. 진짜 웃긴다. 내가 그런 걸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 사실은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 속으로 비웃었거든. 얼마나 용기가 없고 자신이 없으면 그런 업체를 이용할까, 하고.”

나희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하루 역시 낙성이 이런 일을 하자고 할 때, 과연 이런 걸 이용할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고민을 많이 했어. 하 대리한테 이런 얘기하기 창피하기도 하고, 내가 그런 걸 이용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그런데 못 하겠어.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못하겠어.”

나희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하루는 나희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희는 딱히 하루의 위로를 기대하지는 않았나 보다.

그저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듯, 계속해서 말했다.

“권태기라는 생각은 한참 전부터 하고 있었어.”

권태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권태를 느끼는 시기.

권태.

어떤 일이나 상태에서 느끼는 지루함이나 싫증.

권태기라는 이유로 홀로서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하루는 권태기에 대해 검색해본 적이 있었다.

“슬픈 게 뭔지 알아? 권태기가 오는 시점이 같지가 않다는 거야. 나는 여전히 그 인간이랑 같이 있는 게 행복했는데, 그 인간은 그렇지 않았나 봐. 나라는 여자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나 봐.”

처음에는 매일 만났다고, 나희는 말했다.

매일 만나도 부족해서 헤어지기 싫어 같이 밤을 새우고 회사에 출근한 날도 여러 번이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는 주중에 한 번, 주말에 한 번. 그렇게 데이트를 하게 됐어. 주말에는 가끔 여행을 가기도 했고, 서로의 집에서 같이 자기도 했고.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그 인간은 주중에 피곤하다고, 주말에는 약속이 있다고, 나랑 만나는 걸 피하더라. 나는 여전히 그 인간이 보고 싶었거든. 그 인간이랑 있는 시간이 좋았거든.”

“…….”

“거의 한 달 만에 만났는데 그 인간, 참 피곤해 보이더라고. 회사 일이 많이 바쁘대. 그래서 나는 바보처럼 그 말을 믿고 안쓰럽게만 생각했지. 그런데…… 그 인간이 휴대폰을 놔두고 화장실을 갔거든. 나는 참 운도 좋아. 아니,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못 보던 여자의 이름이 ‘그 인간’의 휴대폰에 떴다고 했다.

“원래는 안 그러는데. 서로의 휴대폰을 확인하거나 그런 짓 안 하는데. 다른 때였다면 그냥 일 때문에 어쩌다 알게 된 여자를 등록한 거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텐데. 예감이라는 게 정말로 있나 봐. 뭔가 이상해서 그 인간 휴대폰을 확인했거든. 그랬더니…… 잔뜩 나오더라. 나 아닌 여자들이랑 주고받은 메시지. 그리고 여자 소개시켜달라고, 친구들한테 부탁하는 메시지.”

나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모르는 척 휴대폰을 내려놨는데, 화장실에서 나온 그 인간이 그러더라. 이제 슬슬 집에 가자고. 만난 지 1시간밖에 안 됐는데. 난 말이야. 가끔 내 애인이 바람을 피우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상상한 적이 있어. 내 상상 속에서 나는 정말 당당하고 멋있어. 아주 단호하게 헤어지자고 말하고, 아무리 붙잡아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울음을 터뜨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나희는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었다.

“현실에서 나는 그렇게 당당하지 않더라. 말을 못 하겠더라. 그런 인간인데도 정이 들어서, 그 인간이 없는 내 삶을 상상할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바람을 피우는 거냐고 캐묻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왔어.”

많이 울었단다.

고민도 많이 했단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고 전화를 했다가도, 그의 음성을 들으면 그 말이 나오지 않아 딴소리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단다.

“메시지로 이별하는 건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그 방법을 사용해야 하나 싶더라. 그래서 메시지를 썼는데, 그것도 못 보냈어. 못 하겠는 거야, 정말로. 순식간에 이별하기에는, 너무 오래 사귀었거든. 그 사람이 내 일상이 되어버렸거든.”

한 사람이 나의 일상이 되는 것.

그것이 어떤 건지 하루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인간한테 헤어지자고는 해야 하는데, 그 인간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너져. 만나면 더 그러겠지. 그거 알아? 그 인간이 바람피운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도 한 번 더 만났거든. 그런데 나는 바보처럼 헤어지잔 말도 못하고, 바람피운 것에 대해 추궁도 못하고, 그냥 맛있게 밥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잘 가, 사랑해, 그런 말을 지껄이고 헤어졌어. 가슴은 너무 아픈데, 이대로 사귀어봐야 평생 아플 텐데…… 그걸 머리로는 아는데…….”

고여 있던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 툭, 떨어졌다.

나희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나희를, 하루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미 점심시간이 끝났지만 하루는 나희를 재촉하지 않았다.

이윽고 눈을 뜬 나희가 냅킨을 뽑아 눈가를 닦아냈다.

“그래도 하 대리한테 말하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다.”

“죄송해요. 무슨 말이든 위로를 해드리고 싶은데.”

“아냐. 들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친구들한테는 쪽팔려서 이런 얘기 못 하겠더라고. 그래도 하 대리는 입 무거운 거 아니까 얘기한 거야. 어디 가서 내가 헤어지지도 못하는 바보라는 말, 하면 안 돼.”

“당연히 안 하죠.”

“아무튼 그런 이유로, 부탁 좀 할게. 나, 홀로서기에 의뢰하고 싶어.”

“네, 그 의뢰, 받아들이겠습니다.”

“아, 그리고. 옵션, 붙일 수 있다고 했지? 추가비용 내면 되는 거야?”

“네, 그렇긴 한데…….”

“지난번에 하 대리, 거북이 천 마리 접느라 고생 많았다고 했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도 부탁해. 학 천 마리, 아니, 995마리가 필요해.”

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

+++

나희에게 학 천 마리의 사연을 들으며 회사 로비로 들어선 하루는, 앞에 보이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우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낯선 여자가 있었다.

물론 회사니까 우현이 일 때문에 여직원과 함께 다닐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현이 누군가와 함께 다니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우현과 여자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일반적인 직원과 직원 사이의 거리라기보다는, 친구, 아니, 연인, 그렇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우현의 팔에 가슴이 닿을 정도로 붙어서, 여자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현에게 뭐라 얘기하고 있었다.

여자의 옆모습은 보였지만, 우현은 뒷모습만 보여서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명치에 돌이 걸린 듯 불편해졌다.

‘질투! 난 질투를 하고 있어!’

하루는 이제 이 불편한 기분에 정확한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 원인 또한 알고 있었다.

내가 저 남자를 사랑하니까.

저 남자의 옆에 여직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날 만큼 좋아하니까.

사랑한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그 마음의 크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저 딴 여자와 있는 모습에 질투를 할 정도로 커졌을지는 몰랐다.

‘나, 진짜 질투쟁이구나! 웬일이야!’

하루는 새삼 깨달음을 얻었다.

“왜 그래?”

하루가 갑자기 멈춰 서자 나희가 물었다.

그러다가 저 앞에 보이는 우현을 발견한 듯 말했다.

“아, 쟤가 걘가 보다.”

나희는 우현의 옆에 있는 여자의 정체를 아는 것 같았다.

“걔가 누군데요?”

“요새 유명한데, 하 대리는 모르나? 회사 소문에 너무 어두운 거 아냐? 식품 쪽에 들어온 신입 한 명, 엄청 유명하잖아.”

“그래요?”

“이름이 뭐라더라. 무슨 유명 어쩌고였는데. 대학 졸업하자마자 입사한 앤데, 귀엽게 생겨서 신입 연수 때 인기가 꽤 많았나 봐.”

“아하.”

그러고 보니, 우현의 옆에 있는 여자는 꽤 귀엽게 생긴 편이었다.

키도 작아서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걔가 강우현 팀장님 팀이 됐는데, 강우현 팀장님한테 아주 확 꽂혀버린 거야. 근무 첫 날, 사람들 다 있는데서 강우현 팀장님한테 고백을 했대. 좋아한다고. 첫눈에 반했다고.”

“하…….”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우현에게서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하긴. 나한테 그런 말까지 다 해줄 관계는 아니지.’

“그런데 강우현 팀장님 성격 알잖아. 이번에도 차갑게 웃으면서 꼴에? 일이나 해. 뭐, 그런 식으로 말했다나 봐. 그래서 다들 쟤가 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생글생글 웃으면서 쉬운 남자는 매력 없다고, 역시 우현 ‘오빠’는 내 생각대로 매력 넘친다고 그랬대. 그러면서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그러고 물어봤다더라.”

“그래서…… 강우현, 아니, 강 팀장님은 뭐라고 대답했대요?”

“안 된다고 했다는데, 그래도 꿋꿋하게 오빠, 오빠거리면서 따라다니나 봐. 얘기는 들었는데, 저렇게 졸졸 따라다니는 거 보니까 재밌네.”

우현과 ‘유명 어쩌고’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돌아선 우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하루를 발견한 우현의 눈이 커졌다.

우현은 다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유명 어쩌고’도 우현을 따라 내렸다.

“오빠, 어디 가요? 엘베 안 타요?”

이번에는 조금 크게 말해서, 하루의 귀에까지 ‘유명 어쩌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희에게 듣긴 했지만, ‘유명 어쩌고’가 진짜로 우현을 오빠라 부르는 걸 들으니 더 짜증이 났다.

우현이 하루에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하루는 휙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응? 하 대리, 어디 가?”

“커피 사러요. 어차피 늦은 거 커피 마시러 가요. 저 멀리, 예쁜 커피숍 있거든요.”

“그래? 그럼 그럴까?”

나희가 하루를 따라왔다.

하루는 빠르게 걸으며 흘긋 뒤를 돌아봤다.

우현은 하루가 아는 체 하기 싫어하는 걸 눈치 챈 듯, 로비 입구 쪽에 멈춰 서 있었다.

‘유명 어쩌고’가 우현의 옆에 서서 그의 팔에 손을 얹는 모습이 보였다.

만지지 마! 내 거야!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걸 꿀꺽 삼켰다.

‘내 거가 아냐. 강우현 씨는 내 게 아냐. 알잖아.’

하지만 싫었다.

저 여자가 우현에게 마음대로 손을 대는 것도, 우현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 못할 질투가 이 가슴을 검게 물들이는 것도.

전부 싫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