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사랑을 한다는 건.
성준과 승혜가 다리 중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하루와 재현은 벤치가 있는 곳에, 낙성은 그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는 자신의 양손을 꽉 움켜쥔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광경을 응시했다.
승혜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지만, 그 말을 들은 성준이 울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루는 많은 사랑과 많은 이별을 봐왔다.
지금 이 순간 사랑해서 죽고 못 살아도, 그 사랑이 미움이나 증오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
대학교 때 CC가 되어 연애를 했던 누구와 누구는, 2년쯤 지나자 서로 얼굴만 마주쳐도 욕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저번 회사에서 만난 누구는 매일 자기 남자친구 자랑만 하더니, 몇 개월 지나자 남자친구 욕만 해댔다.
하루에게 사랑은 그런 거였다.
한순간 뜨겁고, 순식간에 차게 식는, 그런 부질없는 거.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저 사랑은, 달랐다.
뜨겁지는 않지만 따뜻하고, 열정적이지는 않지만 감미로웠다.
물론 저 커플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저 사랑 역시 나중에는 하루가 아는 그런 모습으로 바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루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그런 생각으로 저들의 사랑을 변질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성준이 승혜를 끌어안았다.
자기 일도 아닌데, 하루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승혜가 성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문득 우현이 떠올랐다.
하루를 볼 때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의 눈매.
이런 순간에 그가 떠오르는 이유를, 이제는 하루도 알고 있었다.
“신기하다.”
이럴 때에 그를 떠올리는 자신이 신기해서, 그런데도 두렵지 않은 자신이 이상해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가?”
옆에서 되묻는 소리가 들려온 후에야, 하루는 재현과 함께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냥. 저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게 신기해서.”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이 존재하니까.”
“그러게. 단 한순간만이라도 그의 부인으로 살고 싶다니. 난 그런 건 못 할 것 같아.”
“그래?”
재현이 하루를 돌아봤다.
말과는 달리, 하루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쓴웃음도, 비웃음도 아니었다.
이 눈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애정이 가득한 미소였다.
마치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그걸 확인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좋은 일이라도 있어?”
조심스레 묻자, 하루도 고개를 돌려 재현과 눈을 맞췄다.
선이 고운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맑았다.
가로등 불빛이 별처럼 그녀의 눈 안에 담겨 있었다.
“늘 이별만 해오다가 저런 모습을 보니까 좋아서.”
“아, 그래?”
왠지 하루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재현이 너는 비행기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해본 적 있어?”
“항상 노력하지. 약도 먹어보고, 제주도라도 가보려고 하고. 조만간 또 제주도에 도전해보려고.”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
“아주 조금은? 전엔 제주도 갈 생각만 해도 전날 잠이 안 왔는데, 요새는 그 정도는 아니거든.”
하루가 왜 비행기공포증 얘기를 꺼내는 건가 의아해하며 대답하다가 깨달았다.
재현의 비행기공포증은 하루의 사랑공포증과 같았다.
하루는 어쩌면 사랑공포증을 이기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닐까?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 상대는 지금 사귀고 있는 그 남자일까?
“하루야.”
“응?”
“혹시…… 너, 사랑을 하게 됐어?”
하루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재현은 똑똑히 목격했다.
재현을 향해 있던 연갈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재현을 비껴나갔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구나.
재현은 하루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가슴에 싸한 통증이 퍼졌다.
승혜와 성준을 보고 뜨거워졌던 가슴이 차게 식었고, 그 냉기가 손가락 끝까지 퍼졌다.
하루에게 묻고 싶었다.
누구야? 지금 사귀는 그 남자? 어쩌다가? 왜 갑자기? 나한테 좀 더 기회를 주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그 남자의 어떤 부분에서, 공포증을 이길 정도의 사랑을 느낀 거야?
수없이 많은 질문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재현은 꿀꺽 삼켰다.
다그치듯 물어봐서는 안 된다.
하루가 다시 겁에 질려, 저 마음을 거두게 해서는 안 된다.
하루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여야만 한다는 건 지독히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하루는 누구든 사랑할 자격이 있었고, 그건 축하해줘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루가 자기 입으로 시인한 건 아니니까.’
재현은 주먹을 꽉 쥐고 하루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러니까 아직 괜찮아. 난 아직 하루를 사랑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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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걷다가 남성의류를 파는 가게를 보면 그가 떠올랐다.
맛있어 보이는 가게가 보이면 그가 떠오르고, 가로등을 봐도 그가 떠오르고, 검은색 승용차를 봐도, 정장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을 봐도, 그가 떠올랐다.
하루는 종일 우현이 떠올랐다.
그가 떠오를 때면 가슴이 따스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와 옷을 고르고, 맛있는 것을 먹고, 가로등 불빛 아래서 대화를 하고, 그의 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그런 것들이 생각나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아아, 이래서 애들이 나한테 사랑을 해봐야 한다고 했구나.’
사랑을 자각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그런 건 영화나 소설에서 하는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정말로 달라 보였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었어도, 너무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그 모든 것이 유쾌하기만 했다.
가끔 계약기간이 끝나면 그를 못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싸해지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즐거우니까.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니까.
-있는 힘껏 행복해지는 거야, 하루야. 너는 행복할 자격이 있어. 행복해야만 하는 아이야.
그 사람은 하루의 손을 꼭 잡고 그리 말했다.
씩씩하게 살아야 해.
울지 말고.
있는 힘껏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남긴 말을, 하루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들 몇 개가 사라졌지만, 그 기억만큼은 또렷했다.
하루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듯, 하루를 똑바로 응시하던 그 강렬한 눈빛도.
그래서 하루는 울지 않고 씩씩하게,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사람이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잘 살아왔다고, 정말 잘 해냈다고, 그리 말해줄까?
하루가 고통스러웠던 시절, 곁에 있어주었던 그 사람이 그리웠다.
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있잖아요, 혀니 오빠. 나 생전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됐어요. 사랑, 이거 정말 좋네요. 정말 좋아요, 아직은. 계속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아니. 이 뒤에 덧붙인 생각은 취소! 벌써부터 불길한 생각을 할 건 없어! 현재가 중요한 거야, 현재가.’
하루는 고개를 휘휘 저어, 안 좋은 생각을 털어냈다.
우현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은 지도 벌써 열흘이 훌쩍 지났다.
오늘은 우현과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하루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옷장을 열고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요새 우현과 데이트하는 날만 되면, 하루는 전에 없이 들떠서 전날 밤부터 뭘 입고 가야 할지 고민을 하곤 했다.
언젠가 읽었던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즐거워지기 시작하지.]
여우가 한 말은 거짓말이다.
한 시간 전부터 즐거워진다니.
‘나는 전날 밤부터 즐거워지는걸.’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는 하루는, 고삐가 풀린 듯 사랑이란 감정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루는 들고 있던 빨간 드레스를 응시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휴. 이런 걸 입고 나갈 수는 없지.”
제일 좋은 옷을 고르다 보니, 크리스마스 파티 때 입었던 빨간 드레스를 선택하고 말았다.
굉장히 비싼 드레스일 텐데, 이런 드레스를 입을 날이 또 올지 모르겠다.
이리저리 뒤적여봤지만 입을 만한 옷이 없어서, 결국 청바지와 회색 니트 티셔츠를 선택했다.
‘옷 좀 살까?’
지금까지는 패션에 투자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요새 들어 부쩍 화장품이나 옷에 관심이 생겼다.
‘강우현 씨는 항상 정장을 잘 입고 나오는데. 둘이 같이 다니면 되게 안 어울려 보일 거야.’
우현은 하루가 뭘 입듯 예쁘다고 말해주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쯤은 제대로 예쁘게 차려입고 그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평소에는 잘 빗지도 않는 머리를 빗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6번 출구]
우현에게 온 메시지였다.
6번 출구라는 호칭을 보자,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굉장히 오만하고 재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때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난 집 앞이야.]
[금방 나갈게요.]
우현에게 얼른 답장을 하고 나가려다가, 다시 한번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예뻐 보이지? 옷도 너무 촌스러운 것 같고. 치마를 입을 걸 그랬나? 치마 입기에는 좀 추운데.’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고민을 하며, 하루는 거울 앞을 떠났다.
신발을 신고 1층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빌라 문을 나서기 전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빌라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는 순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현도 하루를 발견하고는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오늘도 예쁘네.”
하루의 앞에 멈춘 그가 말했다.
심장이 쿵, 쿵, 쿵 뛰었다.
전에는 이런 말 좀 듣는다고 심장이 이렇게까지 뛰지는 않았는데.
“강우현 씨도 오늘 멋있네요.”
“어떻게 알았어? 날 제대로 봐주지도 않으면서.”
하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냥 알죠. 강우현 씨는 항상 멋있으니까.”
“그래? 그래도 날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미쳤어요? 얼굴을 똑바로 보면 심장이 터질 거야!
하루는 우현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심호흡을 했다.
얼굴이 엄청 빨개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고개를 들면, 우현은 하루의 감정을 눈치챌 것이다.
어쩌면 하루의 감정을 아는 순간, 이 계약 관계는 관두자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덜컥 겁이 났다.
1년이라는 계약기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이 감정을 들켜선 안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약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노력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바뀌게 될 줄은 몰랐다.
“햇빛이 너무 따가워서 고개를 못 들겠어요.”
하루가 말했다.
우현은 뒤를 돌아, 하늘을 확인했다.
눈이 오려는지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그렇군. 햇빛이 따갑군. 그럼 햇빛 따가운 오늘, 뭐 하고 싶어?”
“오늘…… 오늘, 연두 보고 싶어요!”
우현과 단둘이 있다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하루는 연두를 끼워 넣기로 했다.
연두가 있으면 연두와 노느라 우현을 보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또?”
우현이 실망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바다 여행을 다녀온 후, 데이트가 있는 날마다 하루가 연두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네, 또요. 연두 보고 싶어요.”
“그거 질투 나네. 나보다 연두를 더 좋아하는 거 아냐?”
그럴 리가요. 나는 지금 강우현 씨한테 사랑에 빠졌다고요!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강우현 씨가 좋다고요!
하루는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고 우현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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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냄새 가득한 하루살이 사무실.
어젯밤 사무실에서 은서와 둘이 술을 마신 미영은 아직 술이 깨지 않아 잠들어 있었다.
습관처럼 일찍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은 은서는, 하루살이 주문내역을 확인하고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믿어지지 않는 주문수량이라서, 은서는 프로그램에 오류가 있나 싶어 이것저것 클릭했다.
하지만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아니,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웬일이야!’
은서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게 웬일이야!’
은서가 벌떡 일어났다.
“미영아! 야, 김미영 팀장!”
빽 외치는 소리에, 미영이 힘겹게 눈을 떴다.
“머리 울린다. 작게 좀 말해.”
“야, 야, 야. 얼른 이리 와봐. 이것 좀 봐봐. 얼른!”
“왜 그래? 뭔 일 있어?”
“뭔 일 있어. 아주 큰일이 났어!”
그제야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듯 미영이 일어나서 은서의 옆으로 다가왔다.
“뭔데 그래?”
모니터를 확인한 미영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우리 대박 터진 거지!”
“헐. 대박.”
미영이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홀로서기의 주문수량이 평소의 10배가 넘었다.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몰라. 누가 소셜에 후기 남긴 게 빵 터진 거 아니겠어?”
“그런가? 누가 올린 거지?”
“야, 지금 그게 문제야? 이대로면 우리 진짜 대박이라니까. 완전 복권 당첨이라고.”
“그러게. 우와. 이거 다 결제완료된 거지?”
“그렇다니까! 우리 얼른 옷 주문하고 택배 포장할 사람도 고용해야 돼. 이거, 이젠 우리 둘이서 다 못 해. 우리, 이제 진짜로 사장님 되는 거야!”
“와. 우와! 우리 진짜 사장님 되겠네.”
은서와 미영이 서로를 마주 봤다.
둘이서 인터넷쇼핑몰을 시작하며 고생을 참 많이도 했다.
그 노력을 이제야 보상받는 것 같아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둘은 눈시울을 붉힌 채 서로를 끌어안았다.
+++
희정은 하루살이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지사항을 확인했다.
[하루살이 고객님들께 배송관련 소식을 전합니다.
주문량이 많아 순차적으로 배송을 할 예정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제작하여 배송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오래 기다리시는 분들을 위해, 저희 하루살이에서 마련한 사은품도 넣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신나 죽겠지? 오늘이랑 내일은 계속 즐거워하도록 해. 다음 주부터는 웃지 못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