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52화 (52/119)

#(52) 프러포즈를 하려고요.

“왕자 오빠, 이거 봐봐! 나 이제 어른 됐어.”

그날 놀이터에서, 어린 하루는 평소보다 신난 얼굴로 우현을 맞이했다.

한 손을 들어 올리고 있어서 뭔가 싶었는데, 하루의 손목에 못 보던 손목시계가 있었다.

“이게 뭐야?”

“내 시계. 어른들만 차는 거야.”

누가 봐도 다른 사람이 쓰던, 남자아이용 시계였다.

인조가죽으로 된 파란색 줄은 낡았고, 안쪽에 로봇이 그려진 시계 유리는 흠이 잔뜩 있었다.

아마도 동생이 쓰던 걸 물려받은 게 아닐까?

그런데도 좋다고 웃는 하루의 모습에, 가슴이 지끈 아파왔다.

“그래, 예쁘네. 잘 어울린다.”

“그치? 나도 이제 어른이야.”

흥얼거리듯 말하는 하루가 안타까워서, 우현은 하루를 안아주고 싶어졌다.

보통은 누나가 쓰던 걸 동생이 물려받는 법인데.

다 낡은 시계를 차고도 좋다고 웃는 하루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어떻게 하루는 늘 웃을 수 있을까?

나는 힘을 써야, 애를 써야 웃을 수 있는데.

“오빠는 왜 시계 없어?”

“난 어른이 아니라서.”

“오빠가 나보다 어른인데.”

“아직 어른이 아닌가 봐.”

우현이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

하루도 얼른 우현의 옆에 앉았다.

“그럼 오빠, 조금만 기다려. 난 이제 어른이니까 돈 많이 벌어서, 내가 왕자 오빠 시계 사줄게. 알겠지?”

.

.

그 약속을, 우현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현은 한 번도 시계를 산 적 없었고, 선물 받은 시계를 찬 적도 없었다.

하루를 다시 만날 줄 몰랐던 그때에도, 우현은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 약속이 오늘 지켜질 줄은 몰랐다.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사온 선물이겠지만, 우현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우현이 반응을 안 하자, 하루는 걱정스러운 듯 우현을 보고 있었다.

그 어린 날, 낡아빠진 시계를 차고도 좋다고 웃던 어린 소녀와 하루가 겹쳐져서 가슴이 아팠다.

이 애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이 애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게 해주고 싶다.

남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닌, 가장 좋은 것들로 이 애의 전부를 채워주고 싶다.

“고마워.”

우현은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내리누르며, 간신히 말했다.

“정말 고마워. 이렇게 멋진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어. 최고야. 정말 고마워.”

“아니, 아니요. 그렇게까지 좋아하시면 오히려 민망한데요.”

“아니, 진짜야. 정말 고마워. 내 평생에 이런 선물은 못 받을 거야.”

“절 놀리는 거죠?”

“놀리다니, 그럴 리가. 앞으로 평생 이 시계를 차고 다닐게.”

“평생 찰 만큼 좋은 건 아닐 텐데.”

“좋은 거야. 정말 좋아.”

하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현을 응시했다.

‘뭐야, 이 반응은?’

우현은 정말 기쁜 듯 눈시울까지 붉어져 있었다.

‘이게 눈물 날 정도로 좋은 거야? 몇십만 원밖에 안 하는 건데?’

물론 하루에게는 큰돈이지만 우현에게는 큰돈이 아닐 것이다.

우현이 사려고 마음만 먹으면 열 개라도 살 수 있는 시계일 텐데,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 연기를 하는 중이지. 하지만…… 왜 눈까지 빨개져?’

우현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대단한 연기력은 인정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지금 그건 너무 오버해서 연기해준 거라고.

하지만 신나서 시계를 꺼내 손목에 차는 우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때? 어울리나?”

우현이 시계 찬 손목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어린 소년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네, 잘 어울리네요.”

“잘 쓸게. 앞으로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행복해지겠네.”

우현의 말에, 문득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나도 어릴 때 시계 받고 저렇게 좋아했는데.’

동생은 이미 손목시계가 있는데도, 그 당시 유행인 만화 캐릭터의 시계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결국 엄마는 동생이 갖고 싶어 하는 시계를 사주었고, 동생이 차던 시계를 하루에게 주었다.

하루는 시계를 갖게 된 게 기뻐서, 신이 나서, 매일 자기 전 시계를 깨끗하게 닦아 베개 옆에 두고 잤었다.

그리고.

‘하나 더…… 뭔가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생각나지 않았다.

‘뭐, 별 거 아니겠지.’

어릴 때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큰 충격을 받아, 뇌가 하루를 보호하기 위해 아픈 기억 몇 개를 지운 거라고 했다.

언젠가 서서히 기억날 수도 있고, 어쩌면 평생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루는 지워진 기억을 굳이 되살리고 싶지 않았다.

그 기억 중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테니까.

“슬슬 기차역에 가야 해요.”

“그래, 일어나자.”

우현이 먼저 일어나 하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계를 찬 왼손이었다.

일부러 시계가 보이도록 옷소매를 살짝 올리고, 뿌듯하게 웃는 우현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남자는 뭐가 이렇게 귀엽지? 잘생긴 데다가 귀엽기까지 하면 반칙 아냐?’

하루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잠도 안 자고 같이 있었는데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아쉬웠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좀 더 같이 있자고 하면 우현은 분명 알겠다고 하겠지만, 오늘 하루에게는 ‘홀로서기’ 업무가 있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며 하루는 우현의 어깨에, 우현은 하루의 머리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잠든 순간에도, 둘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서울에 도착해 우현과 헤어진 후에야, 하루는 배터리 때문에 배에 타면서 휴대폰을 꺼뒀다는 걸 떠올렸다.

휴대폰을 켜자,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 수 백 개가 와 있었다.

[겸둥이 : 뭐야, 뭐야. 이하루, 왜 연락이 안 돼?

김미영 팀장 : 지금쯤 해 다 뜨고 기차 탔을 텐데.

근육 바보 : 너희들, 아직 어리구나.

근육 바보 : 누가 해 뜨는 걸 보러 가서 진짜로 해 뜨는 걸 보겠냐?

근육 바보 : 하루는 지금쯤 역사를 이루고 그의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거다.

김미영 팀장 : 넌 헛소리 좀 작작할래? 채팅방이라서 입을 틀어막을 수도 없고.

근육 바보 : 그렇지. 여기서는 내가 할 말을 끝까지, 전부 다 할 수 있어. 너희들에게 무시 받는 삶도 이젠 끝이야.

겸둥이 : 됐고. 그런데 진짜 도경이 말이 맞는 거 아냐? 안 그러면 아직까지 연락이 안 될 리가 없잖아.

김미영 팀장 : 그러게. 벌써 점심때가 다 되어 가는데. 했나?

겸둥이 : 한 거야.

근육 바보 : 했다니까! 두고 봐라. 하루는 했어. 왜 안 하겠냐? 제일 좋은 기회인데.]

친구들이 남긴 메지지를 쭉 읽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들이 진짜.

하루가 메시지를 읽는 순간에도 메시지가 들어오고 있었다.

[겸둥이 :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기념할 만한 일이잖아.]

이대로 있다가는 진짜로 기정사실이 될 것 같아, 하루는 얼른 메시지를 껐다.

[하긴 뭘 해? 휴대폰 배터리 없어서 꺼놨었고, 지금 서울이야. 홀로서기 일 때문에 사무실 가는 중. 일 때문에 휴대폰 다시 꺼놓을 거니까 헛소리들 하지 마. 특히 도경이 너!]

하루는 전화가 걸려올 것 같아서, 메시지를 보낸 후 휴대폰을 껐다.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과 그 감정에 대해서는 아직 혼자만 알고 싶었다.

이 감정에 대해 혼자서 생각하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홀로서기’ 사무실이 있는 당산까지 이동한 하루는, 건물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잠시 우현은 잊자.

이제 일을 해야 할 시간이다.

사무실에는 낙성과 낯선 여자가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이별을 당했던 승혜였다.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승혜가 하루를 보고 표정을 풀었다.

낙성과 단둘이 있어서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루, 피곤해 보인다?”

어색한 건 낙성도 마찬가지였는지, 하루가 들어오자 안심한 표정이었다.

“잠을 좀 못 자서요.”

하루는 승혜의 옆에 앉았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뭐예요? 남자 쪽, 아니, 그, 뭐였더라?”

“이성준이요.”

자기 남자친구 얘기를 한다는 걸 알았는지, 승혜가 옆에서 말해주었다.

“아, 맞다. 이성준 씨요. 이성준 씨랑은 얘기가 잘됐어요?”

“응, 일단 이번 이별의 경과보고를 직접 만나서 해야 한다고, 만나자고 했어.”

“순순히 알겠다고 하던가요?”

“그냥 전화 보고도 괜찮다기에, 절대 안 된다고 했지. 우리 회사 방침에 어긋난다고. 선유도역에서 만나서 약속 장소로 데리고 갈 거야. 너는 조승혜 씨랑 먼저 거기 가 있어라. 재현이도 시간 맞춰 올 거야.”

“네, 알겠습니다.”

낙성이 나간 후, 하루가 승혜를 돌아봤다.

“우리도 슬슬 나갈까요?”

“네.”

승혜가 백을 들고 일어났다.

하루는 그 백 속에 뭐가 들어 있을지 궁금했다.

‘설마 칼 같은 게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저번에 한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한 후 죽을 뻔한 기억이 있어서 불안했다.

요새 헤어지자는 이유로 칼부림을 한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오기에, 걱정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굳이 하루가 승혜와 동행하고, 이따 재현까지 오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든 막아내야만 한다.

승혜는 마음이 복잡한 듯 말이 없었고, 하루도 승혜와 할 말이 없었기에 대화 없이 선유도공원으로 향했다.

날이 추워서 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헐벗은 나무가 쓸쓸해 보였다.

선유도 공원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보이는 벤치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부쩍 짧아진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리에 불이 켜졌다.

“예전에요. 한 3년쯤 전인가? 성준이랑 여길 온 적이 있어요. 그때는 더운 날이었지만.”

갑자기 승혜가 말을 시작했다.

승혜의 시선은 조명으로 밝아진 다리를 향해 있었다.

“그날이 또렷하게 기억나요. 주말이었는데. 점심때 만나서 떡볶이랑 순대를 먹고, 오락실에서 놀다가 커피숍에 가서 아이스크림이랑 커피, 케이크를 먹고, 영화를 한 편 본 다음에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둘 다 너무 배가 불러서 소화도 시킬 겸 한강이나 갔다가 야식을 같이 먹고 헤어지자고 했었죠.”

마치 어제의 일을 이야기하듯, 승혜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한강을 쭉 걷다가 여기로 왔어요. 그날은 날이 좋아서인지 사람이 참 많더라고요. 저기 계단 중간에서 셀카를 찍는 사람들이 많아서, 우리도 저기서 셀카를 찍었어요.”

승혜가 다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거기에 서서 저쪽을 봤죠.”

승혜가 한강 쪽을 가리켰다.

빛을 밝힌 대교들과 반짝이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참 예쁘더라고요. 그래서 성준이한테 그랬어요. 언젠가 프러포즈를 하게 된다면 여기서 해달라고. 이런 곳에서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고.”

하루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승혜가 하루를 돌아보더니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네. 하려고요, 프러포즈.”

“아…….”

“그 사람이 안 해주겠다면, 제가 하려고요. 프러포즈.”

승혜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녀의 미소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하루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원인이 뭐든, 성준은 승혜를 찼다.

승혜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결국 승혜의 손을 놔버린 것이다.

게다가 승혜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준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프러포즈를 하겠다니.

그 끝이 빤히 보이는데.

하루의 생각을 읽은 듯 승혜가 말했다.

“성준이는 내 첫사랑이에요. 물론 성준이를 만나기 전에도 연애는 해봤어요. 그런데 성준이만큼 내가 사랑받는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 남자는 없었어요. 성준이와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는 하루, 하루가 정말 소중하고 행복했어요.”

“…….”

“성준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병원에서는 살려는 의지만 있다면 예정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다고 했지만…… 글쎄요. 성준이가 많이 아파서요. 몸이 많이 아파서 차라리 죽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승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전 욕심이 많아서…… 안 죽었으면 좋겠어. 아프더라도, 고통스럽더라도, 내 옆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요. 살고 싶어지게 만들어주려고요. 그 남자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래도 살만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들도록, 온힘을 다해서 행복하게 만들어주려고요.”

하루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애써 담담하게 말하는 승혜의 모습이 오히려 가슴 아팠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요. 단 한순간만이라도, 그 사람의 부인이고 싶어요. 그러면 정말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거예요. 그래서 전 오늘.”

승혜가 다리 쪽을 보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저 멀리, 낙성과 재현, 그리고 성준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프러포즈를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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