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같이 자자.
키가 크진 않지만 몸이 다부지고, 피부가 검은 50대의 남자를 앞에 두고, 하루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50대의 남자는 아주 단호하고 조금은 무서운 표정으로 하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루는 침을 꼴깍 삼킨 후 물었다.
“오늘, 정말 안 떠요?”
“오늘 안 뜨는 게 아니라, 그 시간엔 안 떠. 어두울 땐 위험하거든.”
“하지만…….”
하루가 흘긋 뒤를 돌아봤다.
우현은 멀찍이 서서 기대에 찬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여기에 오면서 하루는 “강우현 씨, 배 타고 낚시 해봤어요? 전 딱 한 번 해봤거든요. 엄청 재미있어요.”라고 한껏 설레발을 친 터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면, 우현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저번엔 떴잖아요.”
하루가 다시 선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루의 앞에 있는 50대의 남자는, 지난 번 친구들과 배낚시를 하러 왔을 때 탔던 배의 주인이었다.
“저번엔 그 시간이 아니었잖아. 누가 밤 12시에 배를 타고 바다엘 나가? 그러다 죽어.”
“죽긴 싫은데.”
“나도 싫어. 그런데 하루야.”
선장이 허리를 굽혔다.
“저놈, 네 이거냐?”
선장이 자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가, 다시 엄지로 고쳐 들었다.
“아뇨, 아, 네. 뭐, 그런 거죠.”
“그으래애? 그럼 말이 달라지지.”
“그래요? 달라질 수 있어요? 12시에 배를 띄워도 안 죽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저놈이랑 그러고 싶은 거지?”
“그, 그러고 싶은 게 뭔데요?”
“뭐긴 뭐야. 알잖아.”
“아뇨, 전혀 모르겠는데요. 전 순수하고 순박해서요.”
“순수하고 순박하긴. 지난번에 도경이랑 그 누구냐. 김미영 팀장, 걔랑 은서랑 왔을 때 밤새도록 야한 얘기했잖아. 다 들렸어.”
“……아저씨는 기억력 진짜 좋으시네요. 딱 한 번 만난 사이인데, 남들이 보면 제 삼촌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한 번 봤으면 삼촌이지. 아무튼 그런 거라면, 좋아. 내가 힘 좀 쓴다! 우리 집 방 하나 내주지!”
선장은 민박집도 운영하고 있어서, 저번에 하루가 친구들과 왔을 때도 방을 빌려줬었다.
“아뇨, 그 힘 아껴두셨다가 와이프 분께 쓰시고요.”
“거절할 거 없어. 저놈, 저거. 엄청 잘생겼네. 저거 부자지? 딱 봐도 귀티가 흘러. 저런 남자, 만나기 힘들다. 만났을 때 콱 물어버려야 돼.”
“개도 아니고 물긴 뭘 물어요. 전 아무것도 물고 싶지 않고요. 그럼 배는…….”
“신년 해돋이, 배 위에서 보고 싶은 거잖아. 안 그래?”
선장이 오지랖도 넓고 눈치도 빨랐다는 게 기억났다.
“오늘 같은 날, 모텔 가봐야 예약 꽉 찼어. 우리 집에도 방 딱 하나 비어 있거든. 그거 빌려줄게. 거기서 하룻밤 딱 보내고, 내일 새벽 동트기 전에 배 타고 나가는 거야. 시간 딱 맞춰서 해 뜨는 거 볼 수 있어. 오늘이 날이다, 하루야. 가자. 가는 거야.”
“아뇨, 전 아무 곳에도 가지 않을 거예요.”
“이봐요, 거기 잘생긴 총각!”
선장은 하루를 설득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우현을 불렀다.
얘기가 길어지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우현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른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 바람에 하루는 선장을 말릴 틈도 없었다.
“내일까지 여기 있을 건데 방을 잡기 힘들다면서? 다행이야. 우리 집에 남는 방이 딱 하나 있거든. 거기 있다가 내일 서울 올라들 가.”
금시초문이었던 우현이 휘둥그런 눈으로 하루를 돌아봤다.
하루는 우현을 볼 낯이 없었다.
원래는 밤에 뜨는 배가 있으면 그걸 타고 바다에 나가서 낚시하다가, 배 위에서 동트는 걸 보고 뭍으로 돌아올 작정이었다.
선장이나 다른 사람들도 배에 같이 있을 테니, 단둘이 밤을 보내는 은밀하고 미묘한 상황은 생길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선장의 오지랖을 잊고 있던 결과, 이런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루가 뭐라 변명을 하려는데, 우현이 먼저 말했다.
“그거 감사합니다.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뭐라는 거야, 이 남자는!
하루는 황당해서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선장과 우현은 이미 선장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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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하루가 걱정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민박집 입구에서 선장의 부인을 마주쳤고, 선장의 부인은 방이 몇 개 있냐는 하루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방? 다섯 개나 비어 있어. 요새 모텔이 좋아져서, 다들 민박은 잘 안 오려고 하거든.”
“이 눈치 없는 여편네 같으니.”
선장이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현과 같은 방에서 단둘이 밤을 지새우는 짓은 절대로 못한다.
우현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오늘 일에 대해서는 이따가 제대로 해명해야지. 이상하게 오해할지도 몰라.’
“방이 하나만 비었다는 말을 듣고 온 건데, 아쉽게 됐군요.”
우현에게 변명할 말을 생각하던 하루는, 옆에서 들려오는 그의 음성에 화들짝 놀랐다.
선장의 부인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현을 올려다보다가, 곧 상기된 얼굴로 “어머, 어머.” 하더니 말했다.
“그래요? 그럼 방이 딱 하나 비어 있어요. 이거 어쩌지, 하루야?”
선장 부인이 안타깝다는 듯 하루를 돌아봤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이 정도로 짜고 치기 힘들 것이다.
다들 하루를 놀려먹으려고 한통속이다.
하루는 어깨가 움직일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 저도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방 두 개 주시겠어요?”
결국 방 두 개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한 번 와본 적 있기에, 하루는 열쇠를 받아들고 마당 안쪽으로 향했다.
우현이 하루의 뒤를 따라오며 중얼거렸다.
“아쉽게 됐군. 기대했는데.”
“저기요, 강우현 씨.”
하루가 걸음을 멈추고 우현을 돌아봤다.
“이런 장난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난 장난치는 거 아닌데?”
우현이 하루와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루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휙 돌아섰다.
“어휴. 강우현 씨는 진짜 장난을 하는 건지, 진심인 건지 모르겠어요. 연기를 너무 잘해.”
뒤에서 우현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짜증나야 하는 상황일 텐데, 하루는 이런 상황이 그리 싫지 않았다.
오히려 우현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거 이쪽 방 열쇠고요. 저쪽으로 가면 화장실이랑 욕실 있어요.”
하루가 마당 안쪽에 있는 민박용 방 앞에서 우현에게 열쇠를 건넸다.
“원래 방 빌려서 하루 자고 그럴 계획 절대 아니었는데…… 저한테 다른 계획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오해하시면 안 돼요. 알겠죠?”
“오해 안 해.”
다행히 우현은 더 이상 하루를 놀리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아직 날이 밝으니까 밖에 나가서 밥 먹고 시내 구경이나 하다가 들어올래요? 근처에 되게 맛있는 황태 해장국 집이 있거든요.”
“그래, 그러자.”
“그럼 10분만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쉬다가 만나요.”
“그래.”
하루가 먼저 들어갔고, 우현은 잠시 마당에 서서 하루의 닫힌 방문을 지켜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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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은 오랜만에 컴퓨터를 켜고 쇼핑몰 이름을 검색했다.
[하루살이]
조사에 의하면 하루와 친한 친구들이 운영하는 패션 쇼핑몰이었다.
아주 유명하지는 않지만 판매하는 제품의 질이 좋아서 조금씩 판매량이 늘고 있었다.
유명한 소셜 사이트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크게 광고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이런 작은 패션 쇼핑몰을 망하게 하는 데는 그리 큰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건드려볼까?”
크리스마스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날 느낀 모멸감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더 크게 부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정은 하루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우현의 옆에서 보란듯이 미소 짓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하루가 두 번 다시 웃지 못하게 해주고 싶었다.
“쇼핑몰 이름이 하루살이인 걸 보면, 이 친구들이랑 이하루가 아주 친한 사이라는 건데.”
하루살이의 ‘하루’가 하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모르는 희정은 그렇게 판단했다.
희정은 아직 하루를 직접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가만 안 두면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하루를 협박하는 희정을 향해, 우현은 그리 말했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 눈빛.
말뿐인 협박이 아니라 경고였다.
하루를 건드리는 순간, 우현이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친구라면 다르지. 강우현이 이하루의 친구들을 위해서까지 움직일 리는 없고.”
우현이 하루를 위해 나서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긴 했어도, 아직까지 희정은 어릴 때부터 알아온 우현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현이 움직이는 건, 딱 이하루를 위해서만.
그렇게 판단했다.
“가족들이랑은 거의 안 만나는 것 같으니까 가족들을 건드리는 것보다는 친구들을 떼어내는 게 좋겠지.”
희정은 ‘우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자기들에게 벌어지는 온갖 나쁜 일이 하루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친구들은 하루를 떠날 것이 분명했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이하루. 네가 사랑을 선택할지, 우정을 선택할지.”
+++
시내에 가서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근처에 보이는 작은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이 연두에 대한 이야기였다.
연두를 어떻게 입양하게 되었는지, 새끼일 때 얼마나 말을 안 들었는지, 어떤 사고를 쳤는지,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우현의 음성을 듣는 것이 좋았다.
저녁까지 뭘 하고 시간을 보내나 걱정했었는데,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해가 질 무렵에는 커피숍에서 나와 시내를 한 바퀴 걸었다.
친구들과도 걸었던 거리인데, 그때와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추운데도 가슴이 폭신폭신하고 포근해지는, 하루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아쉬울 정도로, 느긋하게 보낸 한겨울의 오후가 무척이나 즐거웠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욕실은 공동으로 사용했기에, 씻고 나오다가 우현과 마주쳤다.
젖은 머리가 쑥스러워서 씩 웃었더니, 우현이 빙그레 마주 미소를 지어줬다.
내 바보 같은 미소에 비해, 너무도 감개무량한 미소로 화답해주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데, 우현의 뒤쪽에서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6시에 출발할 거니까, 일찍 자고 일찍들 일어나.”
자러 들어가는 길인지, 선장의 목소리에는 졸음이 섞여 있었다.
“잘 자요, 강우현 씨.”
하루가 말했다.
“이하루 씨도 잘 자.”
서로 잘 자라는 인사를 주고받는 게 괜히 민망했다.
하루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와 젖은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불을 펴고 있는데 저벅, 저벅, 우현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 씻었나 보네.’
방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겠다.’
하루는 누워서 무거운 솜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어제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해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심장이 평소보다 빨리 뛰고 가만히 있기 힘든 미미한 긴장이 하루를 지배하고 있었다.
우현과 같은 방에 자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우현이 옆방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일 눈을 뜨면 우현을 볼 수 있단 사실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이유가 뭘까?
누웠는데도 잠이 안 오니 자꾸만 잡생각이 들었다.
잡생각의 대부분이 ‘강우현’이라서,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들고 이북 어플을 켰다.
재미없는 소설이라도 읽다 보면 잠이 오지 않을까?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 벌써 12시네. 얼른 자야 하는데. 요 앞에 나가서 산책이나 좀 하고 들어올까?’
밤바람이라도 쐬면 이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정리될지도 모른다.
하루는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바깥은 어두웠다.
하루는 바닥을 보며 걸어가 툇마루 끝에서 멈춰 신발을 찾았다.
신발을 신으며 고개를 드는 순간.
그가 보였다.
양손을 점퍼 주머니에 꽂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뒷모습.
청량한 달빛에 휘감긴 그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하루의 시야를 지배했다.
대충 말려서 흐트러진 머리칼, 그 아래로 뻗은 굵은 목과 넓은 어깨, 꼿꼿하게 세운 허리와 쭉 뻗은 긴 다리.
그 무엇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멋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안 그래도 긴장 상태였던 심장이 크게 반응했다.
쿵, 쿵, 쿵.
박동이라기보다는 지진이었다.
가슴에, 몸에, 머리에, 지진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아플 정도로 뛰는 심장이 당혹스러워, 하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때, 인기척을 느낀 듯 우현이 뒤를 돌아봤다.
시간이 길게 늘어진 듯, 그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하루의 망막에 새겨졌다.
시간이 1초로 쪼개진 듯,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하루의 눈에 각인되었다.
“이하루 씨?”
하루를 본 그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스며들었다.
마치 하루가 그의 기쁨이라는 듯.
그걸 보는 순간, 하루는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두렵다고 피할 수가 없었다.
‘이거구나.’
눈을 가려도, 도망을 쳐도, 부정을 해도, 모르는 척해도, 그동안 느낀 이 감정의 이름은 명확했다.
‘이게 사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