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47화 (47/119)

#(47) 너로 흘러넘쳐.

“낚시? 그래, 좋아.”

라고, 우현은 말했다.

이런 추운 겨울날, 왜 갑자기 낚시인지 묻지도 않고, 하루가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 좋다는 듯한 그의 빠른 대답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가 문득 왜 기분이 좋아지는 건지 의아해졌다.

친구들 역시 하루가 뭔가 하자고 하면 알겠다고 해주고, 하루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기 일처럼 달려와 준다.

그런데 왜 이 남자가 해주는 것들은 친구들이 해주는 것과 다른 느낌이 드는 걸까?

생각에 빠져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하루의 뺨에 그의 따스한 손이 닿았다.

그제야 하루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뭘 그렇게 봐? 키스하고 싶어지게.”

“예? 어? 예? 아, 하하하하. 그러게요.”

순간 그와 계약연애 중이라는 걸 깜빡하고 당황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볼에 닿은 손바닥의 느낌이 좋아서, 하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공기가 변했다.

차갑기만 했던 바람에 그의 숨결이 섞였다.

그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짙어졌다.

‘속눈썹, 되게 기네.’

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하루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이 하루를 온몸을 옭아맸다.

코끝에 닿는 숨결이 더 가까워지고, 공기의 농도가 더 진해졌다.

숨도 쉬지 못하고, 침도 삼키지 못한 채, 하루는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닿겠다.’

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어쩌면 입술이 닿을지도 모르겠어!’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는 그저 하루의 볼에 손을 대고 있을 뿐이고, 그 어디도 붙잡고 있지 않았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나는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나는 왜 이 거리가 부담스럽지 않은 거지? 나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머릿속은 혼란스럽지만 육체는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깜빡임조차 없던 하루의 눈꺼풀이 슬며시 감기고 있었다.

이 눈을 감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지만, 제멋대로 감기는 눈꺼풀을 멈출 수가 없었다.

큰일이라는 생각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서서히 지워지고 있을 때였다.

“야! 너 때문에 늦었잖아! 기차 못 타면 네 책임이야!”

역 근처에서 누군가 버럭 외치는 소리에, 하루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번쩍 떴다.

다음 순간, 그의 이마가 하루의 이마 위에 툭 닿았다.

그의 코끝이 하루의 코끝을 살짝 눌렀다.

그의 입술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잘못하면 입술이 닿을 것 같아서, 하루는 정신을 차렸음에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하루의 귀에, 그의 나직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바다는 어느 바다로 가는 거야?”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하루는 마법에서 벗어난 것처럼,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우현을 흘겨봤다.

이 마성의 남자 같으니.

어느 바다로 가느냐는 질문을 이렇게 섹시하게 하다니.

한 발 늦게 감정이 가슴으로 내려가,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져서, 하루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계약사항에 키스에 대한 언급은 없었어. 이 남자가 계약서에 없는 행동을 할 리 없는데, 난 뭘 기대한 거야? 기대? 내가 기대를 해? 아니, 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어!’

머릿속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무심코 튀어나온 ‘기대’라는 생각에 혼란에 빠진 하루를, 우현은 지그시 내려다봤다.

‘큰일 날 뻔했네.’

하루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키스를 할 뻔했다.

그녀에게 내 진심을 전하고, 우리의 과거를 알리기 전까지는 참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하루의 동그란 눈을 마주하자, 그녀를 꽉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기 힘들었다.

그래서 ‘키스하고 싶어지게.’라고 장난치듯 경고했는데, 당황한 듯 웃으면서도 피하지 않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몹시도 귀여워서.

성급한 욕망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녀의 깊은 트라우마를 해결해주지도 못한 채 진행하는 육체적 접촉.

그것이 그녀를 더 멀리 물러서게 만들 거란 생각은, 욕망에 밀려 희미해지다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하루와 계약연애를 시작하며 세웠던 수많은 계획을 깨끗이 잊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여행가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간신히 끌고 온 관계를 완전히 망칠 뻔했다.

늘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계획에 맞춰 움직이던 우현이었는데, 하루의 앞에만 서면 바보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네가 너무 귀여운 탓이야.’

속으로 그녀를 원망해보았다.

‘지금보다 조금만 덜 귀여웠어도, 내가 이렇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거야.’

이런 생각조차 바보 같아서, 우현은 피식 웃으며 자신을 흘겨보는 하루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하루의 눈동자가 흔들리듯 보인 건, 아마도 착각이리라.

이것이 계약연애인지 아는 그녀가 나의 행동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할 리는 없으니까.

“그럼 차 타러 갈까? 저 앞 주차장에 세워뒀어.”

우현이 말했다.

하루는 그의 말을 들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전에도 한 번 느꼈지만, 방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알 수 없는 그리움과 뭉클함을 자아냈다.

‘나, 진짜 왜 이러지?’

처음 느끼는 감정들이 자꾸만 하루를 쿡쿡 찔러댔다.

하루는 잡념을 털어내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조작한 후,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짠. 제가 벌써 기차표를 구해뒀답니다. 오늘은 기차 여행이에요.”

항상 우현만 운전을 하는 게 마음에 걸렸었다.

이번 여행은 우현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여행인데 우현에게 먼 길을 운전하게 시킬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대신 운전을 해서 여행을 떠나면 좋겠지만, 하루는 면허가 없었다.

게다가.

‘강우현 씨는 기차 여행 좋아할 것 같아.’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정말로 기쁜 듯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그거 좋은데. 기차 여행이라니. 운치 있어.”

잘생긴 얼굴 전체를 밝히는 미소를 보자, 괜찮아진 줄 알았던 심장이 또 두근거렸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그저 기차여행일 뿐인데도, 세상을 얻은 것처럼 즐거워하는 우현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 맞다. 이해할 필요 없지. 어차피 연기니까. 이번에는 연기 실패입니다, 강우현 씨. 보통 기차 여행을 간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아요.’

“몇 시 기차야?”

우현이 물었다.

“아, 얼른 가야겠네요. 10분 후에 출발이에요.”

하루는 잠깐 망설이다가 우현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연인이니까, 우현도 계약연애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니까, 나도 이 정도 연기쯤은 해줘야겠지.

하루는 여행 생각에 신난 여자 친구처럼 팔짱을 끼고 그를 팔을 당겼다.

이 행동이 괜히 부끄러워서 정면만 보고 있었기에, 하루는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우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

하루는 기차에 타서,

“우리는 동해에 갈 거예요. 동해, 가본 적 있어요?”

같은 말을 한참 하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꾸벅거리는 머리가 창문에 부딪치려 하기에, 얼른 이쪽으로 당겨서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하루는 잠시 끙끙거렸지만 곧 편안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지난밤, 잠을 잘 못 잔 걸까?

우현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하루를 내려다봤다.

나와의 여행이 기대되어서 잠을 설쳤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과한 희망이겠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간지러운가 보다.

잠결에 코를 찡긋거리는 하루가 귀여워서, 우현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잠시 하루를 지켜보다가 하루 옆으로 보이는 기차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창밖의 경치는 도심을 벗어나 밭이 펼쳐진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겨울의 마른 들판을 보며, 우현은 과거의 기억으로 빠져들었다.

.

.

그날은 좋지 않은 꿈을 꾼 날이었다.

유독 우울한 기분인데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내내 하루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어린 소녀의 활짝 웃는 얼굴과 쨍한 목소리를 들으면, 비에 겹쳐 우울해진 마음이 조금쯤은 괜찮아질 것 같았다.

우연히 하루를 알게 되고 반년쯤 지난 그때에, 하루는 이미 우현에게 햇살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먹구름을 밀어내고 하늘을 밝히는 햇살.

‘비가 내리니까, 오늘은 집에 있겠지?’

약속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니기에, 하루의 동네를 찾아간다고 항상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현은 아직 하루의 집이 어딘지도 몰랐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산을 들고 하루의 동네로 찾아갔다.

그 즈음에는 비가 더 세차게 내리고 있어서, 하루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더 커졌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노란색 우산을 들고 바닥에 고인 빗물을 찰방거리는 하루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루야.”

소녀의 이름을 부르자, 기울어져 있던 우산이 휙 올라가며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우현을 발견한 하루의 자그마한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왕자 오빠.”

이제 하루는 우현을 ‘왕자 같은’ 오빠가 아니라 ‘왕자’ 오빠라고 불렀다.

우현이 하루를 보면 항상 웃었기 때문이다.

“하루야. 비 오는데 나와 있었네.”

“응. 오늘 같은 날은 오빠를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짐짓 어른스럽게 말하는 하루가 귀여웠다.

“집에서는 뭐라고 안 해?”

“응, 엄마는 내가 집에 없는 걸 더 좋아해.”

슬픈 이야기를, 하루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현은 아직 하루의 집안 사정을 모를 때였기에, 그 말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 집도 내가 집에 없는 걸 더 좋아해.”

“정말? 오빠는 이렇게 잘생겼는데?”

“잘생긴 거랑은 상관없어. 집에 있는 그 여자는 내 친어머니가 아니거든.”

왜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아직 어린 하루는 ‘친어머니’나 ‘새어머니’ 같은 걸 모를 텐데.

하지만 하루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도 그렇구나. 우리 아빠도 내 친아빠가 아니야. 내 동생 친아빠야. 우리 엄마는 내 친엄마인데, 내 동생 친엄마이기도 해. 그래서 내 동생은 아빠랑 엄마랑 다 진짜 아빠, 엄마인데, 나는 엄마만 진짜 엄마야.”

하루의 설명에 심장이 덜컥 움직였다.

하루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구나.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애도 집에 잘 들어가지 않는 거구나.

그래서 내가 이 애를 신경 쓰게 되는 거구나.

우현은 그리 생각했다.

같은 아픔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어서인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 쉽게 흘러나왔다.

“우리 아버지는…… 내 어머니를 쫓아냈어. 그리고 날 억지로 어머니에게서 빼앗았지.”

우현을 뺏기지 않기 위해 꼭 끌어안고 절규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했다.

어젯밤 꿈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우현을 끌어안고 냉정한 표정의 아버지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이 애는 절대 못 줘! 절대 못 데려가!

하지만 아버지는 우악스럽게 우현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힘이 부족한 어머니는 우현을 놓치고, 울었다.

우는 어머니를 달래줄 수 없어서 한탄스러웠다.

어머니에게 달려가 울지 마시라고, 난 어머니 아들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삶의 낙이었어. 그런데 날 뺏기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어디서 뭘 하고 사시는지도 모르겠어.”

하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현을 보고 있었다.

우현이 하는 얘기를 다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했다.

하루는 이런 일들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니까.

하지만 하루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울렁거리던 마음이 가라앉았기에, 우현은 계속해서 말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데리고 있고 싶어 했어. 그래서 나랑 같이 아버지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려고 했거든. 기차를 타고 멀리 갔는데…… 거기서 아버지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가 날 어머니랑 떨어뜨려놓은 거야. 아버지는 어머니를 기차역에 버려뒀어.”

내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저 먼 곳의 작은 기차역이 떠올랐다.

유독 거센 바람을 찢던 어머니의 절규가 귓가에 울렸다.

“나는 아버지가 싫어. 그 집에 있는 새어머니도 싫고. 내 어머니를 버려두고 떠나야만 했던 기차역도 싫어. 그래서…… 다음 주에 기차를 타고 소풍을 간다는데, 거기도 못 가. 어머니가 생각나서 기차를 못 타겠어.”

가슴이 다시 죄여왔다.

오랜만에 그날의 일을 꿈으로 꾼 이유는, 다음 주의 소풍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런 꿈을 꾼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이 우현의 손을 잡았다.

고개를 들자 우산을 옆에 내려놓고 우현을 향해 웃는 하루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는 두 손으로 우산을 잡고 있는 우현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괜찮아, 오빠. 내가 어른이 돼서 돈이 많아지면 기차를 사서 예쁘게 꾸며줄게. 오빠가 좋아하는 인형이랑 장난감이랑 맛있는 것들을 잔뜩잔뜩 채워둘게. 그럼 우리 같이 그 기차에서 인형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 하나도 안 무서울 거야.”

기차를 어떻게 사?

그 허무맹랑한 말인데도 눈물이 나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루의 앞에서 울 수는 없기에,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고 있었다.

잿빛 구름 사이로 보이는 햇살에, 유독 눈이 시렸다.

.

.

우현은 미소를 지으며 하루를 내려다봤다.

하루는 어른이 됐지만 돈이 많아지지도 않았고, 기차를 사지도 못했고, 기차 안을 인형과 장난감, 맛있는 음식으로 채우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루는 우현의 가슴을 채웠다.

하루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우현의 가슴은 이하루로 가득 찼고, 그리하여 우현은 ‘그날’ 이후 처음으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이 가슴이 이하루로 흘러넘쳐 두려울 것도, 슬플 것도 들어올 틈이 없어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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