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낚시입니다.
‘진짜야!’
재현은 우현의 집에서 나오며 생각했다.
‘형은 진짜로 사랑에 빠진 거야.’
그 미소는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튕기고 어려워 보일 여유 없어. 지금 나와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좋은 추억이 됐으면 좋겠으니까.
우현의 입에서, 그 냉정한 남자 강우현의 입에서 그런 대사가 나오다니.
우현은 연기로라도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재현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우현이 재현의 앞에서도 감정을 드러냈다.
그 감정을 도저히 감출 수 없다는 의미다.
잘 다고, 재현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견고한 갑옷을 전신에 두르고,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냉기를 뿜어내던 우현이 사랑에 빠졌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언젠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잘됐어. 정말 잘됐어.’
자꾸 미소가 배어나왔다.
재현은 웃으며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다가 문득 하루가 떠올랐다.
사랑에 빠진 우현을 보니, 재현도 하루가 보고 싶어졌다.
오늘은 쉬는 날인데, 하루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연락을 해봐도 될까?
잠시 망설이다가 하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루이틀사흘나흘. 뭐해?]
바로 답이 올 줄은 몰랐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낙성 선배 옮았어? 조심해, 그 선배 전염성 강해. 난 지금 친구들이 와서 뭣 좀 하고 있어.]
재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답 메시지를 받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안심하게 되다니.
‘사랑에 빠진 남자는 바보가 되는군. 우현이 형도 형수님 앞에서는 바보 같으려나?’
[홀로서기 사무실 지하에서 일한다는 친구들?]
[응.]
[나중에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소개 좀 시켜줘.]
[그래, 같은 건물이니까 오며가며 마주치는 일도 있겠지.]
[그럼 주말 잘 보내.]
[너도 즐주.]
평범한 친구처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성이 하루와 말을 놓으라고 해주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
새삼 낙성에게 고마웠다.
+++
[너도 즐주.]
재현에게 답을 보낸 후 휴대폰을 내려놓는데, 은서가 검지로 휴대폰을 가리켰다.
“어? 이하루, 방금 누구야? 그 남자야?”
“아니야.”
“그럼 누군데? 남자야? 여자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낙성대 선배야?”
“우리 사이에 너무 사생활 보장이 없는 것 같지 않니?”
“우리 사이에 사생활이 뭣이 중요해! 얼른 고해바쳐. 누구야?”
“그 작가님이야. 홀로서기에서 같이 일하게 됐다는.”
“아아. 아무튼 말 돌리지 말고 그 남자한테 어떤 선물을 줄지 생각해보자.”
자기가 물어본 주제에, 메시지를 주고받은 상대가 우현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은서는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하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휴대폰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우현이 만나겠다고 해서.
우현이 전화조차 받지 않을까 봐 긴장했는데, 의외로 우현은 금방 전화를 받았고 여전히 다정했고 하루의 데이트 요청을 쉽게 받아주었다.
“우선은 바다야. 난 바다라고 생각한다.”
미영이 말했다.
“당연히 바다지. 12월 31일부터 1월 1일까지는 바다야. 바다밖에 없어.”
도경이 크게 동감한다는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잠깐만. 그 남자랑 하룻밤을 같이 보내라고? 단둘이? 미쳤어? 어떻게 그래?”
하루가 끼어들자, 친구들이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하루를 돌아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바닷가에 차 세워두고 앉아 있거나 해변이나 24시간 카페에서 같이 있으면 되지. 설마…… 둘이 방 잡을 상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은서의 말에 하루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생각 안 했거든.”
물론 하루의 친구들은 방을 잡는 것이 베스트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티 내지는 않았다.
이럴 때만 죽이 척척 맞는 친구들이었다.
“같이 새해가 밝아오는 걸 보다가, 선물을 딱 주는 거지. 이 선물이 문제인데 말이야.”
미영이 검지를 턱에 대고 고민하다가 도경을 돌아봤다.
“도경아. 넌 여자한테 어떤 선물을 받아야 진짜로 기쁠 것 같아?”
“어? 진짜로 내가 받고 싶은 걸 말해도 돼?”
도경이 음흉하게 웃는 걸 보며, 은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쟤 또 야한 얘기하고 싶어서 발동 건다. 도경이는 이런 상황에서 절대 도움 안 돼. 로맨틱함이 없어, 쟤는.”
“그런데 어쩌냐. 지금 이 자리에 남자는 쟤밖에 없는데.”
“쟤는 남자라고 생각하면 안 돼. 사고방식이 인류 축에 들지를 않잖아.”
“개똥이라도 약에 써야지, 어쩌겠어.”
“저기요? 지금 저 아직 여기에 있거든요?”
거침없이 자기 욕을 하는 두 여자를 향해, 도경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은서와 미영은 도경의 손짓을 무시하고 하루에게 말했다.
“그 남자, 잘 꾸미고 다녀?”
하루는 잠시 우현을 떠올렸다.
“잘 꾸민다고 해야 하나? 얼굴이 워낙 잘생겨서 안 꾸며도 꾸민 것 같을걸.”
“하긴. 지난번에도 옷차림은 하나도 안 보이고 얼굴만 보이더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나도 그 남자 옷차림이 기억 안 나네. 우리, 제일 먼저 보는 게 옷차림인데.”
미영과 은서가 술집에서 본 우현이 얼마나 굉장했는지에 대해 한참 떠들었다.
친구들과 있을 때 대화가 삼천포로 빠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기에, 하루는 묵묵히 우현이 필요한 게 무엇일지 고민했다.
‘연두 장난감 같은 걸로 때우는 건 좀 그렇겠지? 강우현 씨가 필요한 걸 해줘야 하는데, 그 남자,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 없는 게 있긴 할까?’
하루는 시선을 발끝에 둔 채 우현의 모습을 하나, 하나 꼼꼼히 떠올렸다.
우현의 얼굴, 헤어스타일, 목덜미, 넓은 어깨와 가슴을 떠올리자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그 품에 안기다니! 가슴이 진짜…… 단단했어. 근육질이겠지? 도경이만큼은 아니겠지만, 그 예쁜 근육. 그런 몸일 거야.’
인터넷에서 보는 아이돌이나 배우들의 날씬하면서도 탄탄한 몸매 위에 우현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런 몸에 안겨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치 그 때로 돌아간 듯 심장이 두근, 두근 뛰기 시작했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눈을 들자, 도경이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생각을 읽힌 것 같아서 휙 고개를 돌렸는데, 도경이 말했다.
“얘들아. 아무래도 하루가 야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저 예리한 놈 같으니!
하루는 도경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야한 생각을 하는 건 너겠지. 어떻게든 야한 얘기 꺼내고 싶어서 하루 끌어들이는 거지?”
미영이 면박을 줬지만 도경은 꿋꿋이 말했다.
“아니, 진짜야. 야한 것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남들이 야한 생각을 하면 곧바로 눈칠 챌 수 있지. 야함에 일가견이 있는 내 눈에, 백 프로다. 하루는 백 프로로 야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
“시계!”
이러다가는 도경의 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질 것 같기에(물론 진실이지만), 하루는 얼른 말했다.
“시계를 안 차고 다녀, 그 남자.”
“그래? 의외네.”
다행히 미영이 하루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치? 그래, 맞아. 운전할 때 손목에 시계가 없어서, 시계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하긴. 요새 다들 휴대폰 들고 다니니까 손목시계는 잘 안 차는 추세지. 그래도 그렇게 정장 입고 다니는 사람이면 패션으로 차고 다닐 만도 한데.”
“그래도 시계면 선물하기 괜찮겠다.”
얼마나 돈을 쓸 수 있는지, 어떤 시계를 살지에 한참 얘기하다가 모두 함께 백화점으로 향했다.
선물을 고른 후, 같이 저녁을 먹고 식당 앞에서 헤어졌다.
미영과 도경은 집 방향이 같기에, 은서와 하루를 먼저 보내고 둘만 남았다.
미영이 도경을 돌아봤다.
“그 인형, 뭐야? 그거, 마루 맞지?”
미영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맞는 것 같긴 한데, 한편으로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확신을 할 수가 없어.”
“뭔 대답이 그래? 마루면 마루고, 아니면 아닌 거지.”
“마루의 클론이라고 해야 하나?”
“……클론이라니.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요새 SF 만화 봐?”
“응. 이렇게 하나씩 배워간다. 만화는 마음의 양식이야.”
“쓸 데 없는 소리하지 말고. 그거,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그 남자가 그 인형을 선물한 거래?”
“그건 하루도 모르지. 나도 모르고, 당연히 너도 모르고.”
“혹시…… 그 남자가 혀니 오빠인가?”
“하루 말로는 아니라는데? 나이 대가 다르대. 너도 봤으니까 알 거 아냐. 그 형 닮았든?”
미영은 그날 봤던 우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 아니야. 혀니 오빠는 평범하게 생겼었잖아. 아무리 10년 정도 흘렀다고 해도 그렇게 변할 얼굴이 아냐.”
“그럼 역시 우연인가? 그런데 우연일 리가 없는데. 우연히 여자한테 그런 걸 크리스마스 선물로 줄 리 없잖아. 아무리 봐도 해괴한 생김새인데.”
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걸 예쁘다고 생각하고 준 거라면 그 남자의 심미안을 의심해봐야지. 진짜 이상하다. 하루는 뭐래? 하루도 그 부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아?”
“의심하긴 하는데…… 얘기가 깊어지면 하루가 몸을 사릴 것 같더라고. 내가 봤을 때, 하루가 그 남자한테 마음이 있긴 있는 것 같거든.”
“그래? 하긴, 나도 오늘 느꼈어. 예전이었으면 우리가 뭐라 하든 그 남자 따로 만나서 선물 주고, 새해맞이하고, 그런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텐데.”
“응. 그런데 아직 무서워하는 것도 사실이니까. 자기 마음을 깨닫지도 못한 것 같고. 이런 상황에서 그 남자가 네 과거를 아는 것 같아, 연관이 있는 사람이야, 그러면.”
“도망치겠지. 뒤도 안 돌아보고.”
“응. 과거를 무서워하니까. 적어도 그 남자가 우리만큼 하루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야, 그 남자가 과거를 알아도 곁에 두지 않을까?”
“그래, 그럴 거야.”
미영은 새삼스레 도경을 응시했다.
역시 도경은 하루의 일이라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너도 참 하루 많이 아낀다. 난 정말로 네가 하루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전엔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하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는.”
도경은 인상을 찌푸리고 덧붙였다.
“하루 옆집에 살았잖아. 하루가 당했던 일을 본 건, 나한테도 트라우마가 될 정도였어. 하루는 오죽할까.”
+++
12월 31일 정오.
하루는 정확히 약속시간에 맞춰 서울역에 나갔다.
우현은 서울역 앞에 서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현을 흘끗흘끗 돌아보는 게 보였다.
하루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우현에게로 다가갔다.
하루를 본 우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이하루 씨.”
우현도 하루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둘은 가까이에서 멈춰 서로를 마주 봤다.
오늘은 계약연인으로서 데이트를 하는 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지, 하루는 조금 어색하고 민망했다.
그녀와 달리 우현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만면에 띤 미소는 평소처럼 옅지 않았다.
싱글싱글 웃으며 우현이 말했다.
“이하루 씨가 먼저 데이트 요청을 해줄지는 몰랐어.”
“12월 31일인데 괜히 폐가 될까 봐…….”
“폐라니. 이하루 씨와의 데이트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심장이 콩콩 뛰려고 하기에, 하루는 얼른 말했다.
“오늘은 기차를 타고 멀리 갈 거예요.”
“그래?”
우현에게는 아직 오늘의 일정에 대해서 설명해두지 않았다.
“오늘…….”
함께 밤을 지새워요.
같이 새해를 맞이해요.
바다에서 밤새고 해 뜨는 걸 봐요.
그런 말을 해야 하는데, 목에 돌이 탁 걸린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같이 밤을 보내자는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우현은 기대되는 눈으로 하루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그는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마치 소년 같은 분위기의 그를 보자, 의외의 감정 하나가 가슴을 물들였다.
그리움이었다.
애틋하고, 서글프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거운, 어떤 그리움 하나가 톡 하고 번져나갔다.
뭘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나는 이런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하루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강우현 씨. 우리 오늘, 바다낚시나 하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