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귀여워 죽겠네.
낙성은 약속 장소에서 고객을 기다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별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내 인생.’
홀로서기 일이 잘되는 거야 좋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별은 심했다.
하필이면 오늘 이별을 해달라고 의뢰한 고객도 참으로 악취향이다.
어제 해도 되고, 내일모레 해도 되는 건데.
‘이별도 이별이지만, 나도 슬슬 연애를 해야 할 텐데.’
2년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연애할 기회가 없었다.
아니, 기회가 아니라 인연이 없었다.
발이 넓고 성격 좋은 낙성이라 소개팅을 해주는 친구들도 많았고, 주위에 여자도 많았다.
하지만 연애로 이어지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딱 홀로서기 시작할 쯤부터 연애를 못 했네. 설마…… 나한테 이별 당한 여자들의 저주인가? 혹시 그래서 하루도 더더욱 연애를 안 하는 건가?’
생각해보면 안 그래도 연애를 피하는 하루가 이런 일을 하면서 연애할 생각이 들 리가 없었다.
이별 일을 하다 보니, 연애지상주의자들도 연애를 기피할 만한 이별이 자주 있었다.
언젠가 이별을 당한 여자는 10년간 뒷바라지를 해줬는데 공무원 시험 합격하더니 이런 식으로 자기를 찰 줄은 몰랐다고 울기도 했었다.
처음에 홀로서기를 만든 의도는, ‘정말로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마음이 약해서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아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이별을 해준다.’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과연 이런 식으로 쉽게 의뢰를 받아들이고 이별을 해도 괜찮은 건지 의심이 생겼다.
‘지난번에 하루 사건도 있었고.’
이별을 당한 남자가 하루를 공격했단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하루는 ‘폭행’이란 것에 이상할 정도로 민감했다.
물론 누구나 폭행당하는 걸 싫어하겠지만, 하루는 그 정도가 심했다.
대학생 때 동아리방에서 어떤 선배가 장난삼아 하루에게 “어휴, 요걸 확!”이라고 말하며 손을 든 적이 있었다.
당연히 그 선배는 하루에게 손끝조차 댈 생각이 없었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 하루도 알았을 텐데, 크게 뜬 눈에 가득한 공포와 굳어버린 몸,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 끝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당혹케 했다.
선배도 하루의 이상 증상을 깨닫고 얼른 사과했고, 하루도 웃으면서 “에이, 장난인 거 알죠.”라고 말했지만, 그 후로도 종종 하루가 그런 장난에 굳어버리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다.
눈치가 빠른 낙성은 하루에게 말하지 못할 과거가 있을 거라고, 어쩌면 가정폭력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은 그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때문에 하루가 공격을 당한 게 무척 걱정스러웠는데, 그 자리에 우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현 덕분에 하루는 괜찮아 보였다.
‘그래, 만약 강우현 씨가 그 자리에 없었으면 하루는 괜찮지 않았을 거야. 어쩌면 홀로서기 일을 관뒀을지도 몰라.’
어쩌면 하루는 그녀 자신이 깨달은 것보다 더 우현을 신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념에 젖어 있던 낙성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오늘의 고객이 보내준 메일에 있던 ‘그녀’였다.
그녀는 오늘 이별을 당할 거라는 걸 상상도 못 한 듯 즐거워 보였다.
목 부분에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털이 달린 코트와 코트 아래로 보이는 검정색 정장 바지, 예쁜 흰색 힐을 보니,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위해 한껏 꾸미고 나온 듯했다.
저렇게 행복한 데이트를 할 생각에 즐거운 여자들을 상대해야 할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낙성은 근처에 서서 애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조승혜 씨?”
낯선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경계의 눈빛으로 낙성을 응시했다.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며 긴장하는 그녀를 보며, 낙성은 말했다.
“이성준 씨를 대신해서 이별을 하러 나왔습니다.”
순간, 승혜의 눈빛은 낙성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별할 때, 상대하는 여자들은 두 종류였다.
연인과 사귀는 것이 행복한 여자. 연인과 사귀는 것이 그리 행복하지 않은 여자.
첫 번째 부류의 여자들은 이별을 하러 나왔다고 하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했고, 두 번째 부류의 여자들은 당황하면서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라는 체념의 눈빛을 지었다.
낙성이 봤을 때 승혜는 연인과의 데이트를 행복한 표정으로 기대하는, 첫 번째 부류의 여자였다.
하지만 이별을 하러 나왔다는 말을 들은 승혜는 당황하지도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
“뭐라던가요, 그 사람이?”
승혜의 태도에 오히려 낙성이 당황했다.
낙성은 당혹감을 감추고 가지고 온 쇼핑백과 꽃다발을 내밀었다.
승혜는 받아들지 않고 낙성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낙성은 어쩔 수 없이 준비해온 대사를 말했다.
“그동안 함께해줘서 정말 고마워. 부족한 남자인데도 사랑해줘서 고마워. 네가 해준 모든 것들을 기억할 거야. 네게 받은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행복해야 해, 승혜야.”
승혜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낙성이 내민 선물과 꽃다발을 받아들지 않았다.
낙성은 이쯤에서 “그럼 가보겠습니다.”라고 물러나야 했는데, 그녀가 선물을 받아주지 않으니 갈 수가 없었다.
보통은 쇼핑백 안에 담긴 선물이 뭔지 궁금해서라도 받아드는데, 승혜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의 쓸쓸한 시선이 꽃다발로 향해 있었다.
“루드베키아. 아도니스.”
승혜가 입을 열었다.
“꽃말이 뭔지 아세요?”
‘아니요. 궁금하지도 않은데요. 전 얼른 집에 가고 싶은데요.’
낙성은 목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켰다.
“영원한 행복이에요. 정말 웃기고 있어.”
승혜는 낙성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혼자서 중얼거렸다.
“자기 없이 내가 어떻게 행복하라고. 그러지 않을 거 알면서. 안 그래요?”
승혜가 낙성과 눈을 맞췄다.
낙성은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 남자, 만나봤어요? 만나서 의뢰를 하던가요?”
낙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만났으면 아셨을 텐데. 그 남자, 병에 걸렸어요. 암이에요.”
병 얘기를 듣자, 지난번 남자가 병에 걸려서 헤어지고 싶다던 여자의 의뢰가 떠올랐다.
“몇 개월 안 남았대요. 발견이 늦어서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더라고요. 우리, 꽤 오래 사귀어서 이제 결혼할 준비를 하려던 참인데. 원래는 오늘 프러포즈를 받을 예정이었는데.”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승혜는 눈시울조차 붉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슬퍼 보였다.
낙성의 머릿속에서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시한부라는 거 알고 나더니 헤어지자더라고요. 그래서 싫다고 했어요. 며칠 후에 또 헤어지자기에, 또 싫다고 했어요. 또 헤어지자고 했고, 또 싫다고 했죠. 예정대로 진행하자고, 결혼하자고. 크리스마스에 근사한 프러포즈를 해달라고. 그 남자가 웃기에, 내가 이겼구나, 프러포즈를 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
“그런데 이게 뭐야. 영원한 행복이라니. 정말 우습지 않아요?”
승혜가 낙성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애달픈 미소에 낙성은 가슴이 아팠다.
“이 정도 각오를 했다면 이젠 제 전화를 받지도 않겠네요. 아마 집에 찾아가도 없을 거고요. 그렇죠?”
낙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홀로서기를 이용해서 이별하는 사람들은, 의뢰 완료 연락을 받고 나면 상대의 연락처를 차단하곤 했다.
하지만 승혜에게 그 사실을 말하기가 힘들었다.
낙성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승혜가 또 웃었다.
꽃다발과 쇼핑백을 내민 채 굳어버린 남자와 그 앞에서 쓸쓸히 웃고 있는 여자.
두 사람의 모습은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브에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흘끗흘끗 쳐다보고 지나갔지만, 둘은 그들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낙성은 승혜의 슬픔에 압도당해 있었다.
“만나게 해줘요.”
승혜가 말했다.
‘아, 이럴 줄 알았어.’
낙성은 속으로 한탄했다.
“1월 1일에 한강으로 데리고 와줘요. 나, 그 남자 만나야겠어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그건…….”
“알아요. 이런 요청하는 사람들 많을 거고, 절대 만나게 해주지 않으셨겠죠. 하지만 안 돼요. 그 남자, 고아예요. 가족이 없어요. 아픈데 옆에 있어줄 사람이 없어요.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혼자서 아픈 거, 안 돼요. 그 꼴 못 봐요. 안 그래요?”
물론 혼자서 투병하는 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낙성은 승혜가 진실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루 같은 사건도 있었는데, 이 여자가 뛰어난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어쩌란 말인가.
대답하지 않는 낙성을 보며 승혜가 절박하게 말했다.
“그 남자, 1월 1일 신년에도 혼자 있을 거예요. 늘 그랬거든요. 나랑 처음 새해를 맞이하던 날 그러더라고요. 소중한 사람이랑 같이 새해를 맞이하는 건 처음이라고.”
승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슬프잖아요.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맞이할 새해가 혼자인 건. 너무 아픈데 1월 1일조차 혼자인 건. 너무…… 슬프잖아요.”
낙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승혜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준이 승혜를 여전히 사랑하는데도 자신의 병 때문에 이별을 고한 거라면, 슬픈 일이었다.
이별을 위한 ‘홀로서기’지만, 어떻게든 해주고 싶다고 생각될 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여기요. 제 연락처예요.”
승혜가 낙성의 손에 종이를 쥐여주었다.
“규칙이 있을 테니 쉽게 결정하지 못하시겠죠. 연락해주세요. 제발 그 남자가 혼자서 쓸쓸히 새해를 보내지 않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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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루의 얼굴은 우현의 가슴에 폭 묻혀 있었다.
우현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비누 냄새 같기도 하고, 스킨 향 같기도 했다.
‘아니, 지금 이 남자가 좋은 향기인 게 문제가 아니잖아!’
바보처럼 펑펑 운 것도 문제인데, 우현의 품에 안겨서도 엉엉 울다니.
하루의 얼굴이 닿아 있는 우현의 코트는 흠뻑 젖어 있었다.
어쩌면 콧물이 묻었을지도 모른다.
‘어떡하지? 엄청 비싼 코트일 텐데. 이런 코트, 세탁하는 비용도 어마어마하지 않나? 세탁비, 물어줘야겠지? 아니면 코트 하나 사내라고 할지도 몰라. 그럼 어쩌지? 아니, 지금 이게 문제가 아냐!’
하루는 머리가 핑핑 돌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심장이 쿵, 쿵, 쿵, 아플 정도로 격하게 뛰고 있었다.
-내가 찾아줄게. 내가 사줄게. 이하루 씨가 소중한 걸 잃어버리게 되면 말만 해. 어디에 있든 내가 가져다가 이하루 씨 품에 안겨줄 테니까.
꿈결처럼 들려왔던 그의 음성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아니면 코끼리 인형 보고 너무 기뻐서 내 멋대로 상상한 건가?’
우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도저히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자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 얼굴이 굉장히 빨개진 것 같은 기분이다.
우현의 손이 하루의 등을 토닥이는 게 느껴졌다.
아까부터 쭉 다정한 토닥임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이런 식으로 다정하게 등을 두드려주는 것도 처음이다.
아니, 처음이 아닌가?
그래, 아주 오래전에 몇 번쯤은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지옥 같았던 그날 이후로는 한 번도 없었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날 뻔했기에, 하루는 서둘러 감정을 갈무리했다.
이러다가는 밤새도록 그의 품에 안겨 있게 생겼다.
물론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아니, 싫어야지. 그냥 계약연애 상대가 날 안고 있는데, 당연히 싫어야지!’
속으로 그렇게 주장했지만 역시 싫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루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어떻게 됐나 봐.’
정신을 차리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하루는 우현의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주차장으로 오고 있나 보다.
그런데도 우현은 하루를 밀어내지 않았다.
하루가 벗어나려고 할 때까지 계속 등을 두드려줄 생각인가 보다.
말소리가 가까워지기에, 하루는 이제 그의 품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남자의 품에 안겨본 적이 없는 하루는 고민했다.
‘슬쩍 뒤로 물러나면 되나? 그럼 강우현 씨가 거절당한 기분이 들어서 마음 상하지 않을까? 두 손으로 밀어내는 건…… 더 거절하는 기분이고. 그럼…… 아, 그래.’
하루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별똥별!”
“응?”
“별똥별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슬쩍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뒤로 돌아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 하루를 지켜보며, 우현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별똥별이라니.
품에 안겨 있느라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어색하지 않게 포옹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하루의 속이 빤히 보였다.
정말 귀여워 죽겠다.
‘어떻게 저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오늘 파티에 있던 놈들 대부분이 하루한테 반했을 거야. 안 반할 리가 없지. 저렇게 말도 안 되게 귀여운데.’
우현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하루는, 적당히 잘 벗어났다고 생각하며 우현을 향해 돌아섰다.
“저, 강우현 씨.”
“응?”
“정말 고마워요.”
하루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울어서 화장도 다 지워지고 눈은 퉁퉁 부었을 얼굴을 우현에게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예전엔 추한 모습도 우현에게 마음껏 보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자신의 심리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야.”
“정말로 최고예요. 앞으로도 평생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을 거예요. 제 베스트 1위예요.”
“그거 영광이지만, 앞으로는 1위 탈환할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민하느라 힘들어지겠네.”
“아무리 고민해도 못 이길 거예요, 이것만큼은.”
하루는 우현이 은근슬쩍 앞으로의 크리스마스를 언급하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하루의 심장은 쿵, 쿵 뛰고 있었다.
이 울림이 쉽게 멎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물론 심장이 멎으면 죽겠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뛰는 건 문제 있는 거 아냐? 나,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