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41화 (41/119)

#(41) 말만 해. 내가 해줄게.

“아니에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이 남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하루는 어느 누구도 이 마음 안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찾겠어요. 강우현 씨, 인기 많던데. 얼른 들어가요, 우리.”

우현이 일어나려는 하루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루는 반쯤 일어선 채로 우현을 돌아봤다.

우현이 고개를 들고 하루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연두’가 떠오르는, 강아지 같은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다.

“속일 생각은 없었어. 나는 회장님과 약속한 게 있고, 그래서 회사 사람들에게는 내가 회장님의 손자라는 걸 알리지 않고 회사를 다니는 중이야.”

듣고 싶지 않아요.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는 도로 우현의 옆에 앉았다.

우현은 여전히 하루의 손목을 잡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손을 치우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회장님은 손자들에게 다 비슷한 조건을 걸었어. 때가 될 때까지는 세정그룹의 친인척이라는 걸 알리지 말고 스스로 살길을 찾으라고.”

“사자가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것 같은 건가요?”

우현이 피식 웃었다.

“집에서 지원을 못 받는 건 아니니, 절벽까지는 아니지. 게다가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아니까, 취업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하긴. 강우현 씨도 그냥 팀장일 뿐인데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으시죠. 우리 회사 팀장쯤 되면 연봉이 엄청나게 높아지는 줄 알고, 승진하는 데 목을 맬 뻔했어요.”

“그런데 회장님은 나한테만 조건을 하나 더 걸었어.”

“어떤 조건이요?”

“연애를 하라고.”

“아.”

단지 그 정도의 대답이었는데도, 하루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현이 왜 그렇게 열심히 여자를 만났는지, 왜 그 여자들이 얼마 못 가 우현을 찼는지, 그리고 왜 하루에게 큰돈을 줘가면서 계약연애를 하려는지.

“연애를 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항상 여자들이 다가오지.”

다른 사람이 했다면 재수 없는 소리로 들렸겠지만, 우현이 말하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조희정과 사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어. 사귀자고 해서 사귀었는데, 사귀는 동안 내 행동이 마음에 안 드니까 헤어지자고 한 거겠지. 다른 여자들이 그런 것처럼.”

하루의 예상대로였다.

우현이 회사에서 행동하듯 여자들을 대했다면, 여자들은 질리고 기분 나빠서 헤어지자고 했을 것이다.

‘조희정이 나한테 거짓말을 했구나.’

우현이 희정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다행은 무슨 다행! 이 남자가 누구를 사랑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런데 왜 저한테는 잘해주세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우현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루는 아차 싶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질문을 후회하는 듯이 보이는 하루를, 우현은 가만히 응시했다.

‘왜 잘해주느냐고?’

당연히 잘해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잘해줘도 부족하다 느껴질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니까.

아끼고 아껴도 혹여 깨지지 않을까 불안한 사람이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정말로 잘해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사람이니까.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네가 참 소중하다고.

네가 참 좋다고.

그래서 저절로 잘해주게 된다고.

하지만 하루의 표정을 보자, 아직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는 자신의 질문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지금 솔직하게 말하면, 하루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것이다.

간신히 이만큼 다가갔는데, 성큼성큼 뒤로 물러날 것이다.

“1년 동안 볼 사이고, 같은 회사이기도 하니까.”

“아, 그렇구나.”

우현의 대답에, 하루가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강우현 씨에게 회사 동료를 향한 배려가 남아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네요.”

“난 늘 배려심이 넘쳐.”

“그럼 다른 동료들한테도 좀 웃어주지 그래요?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 강우현 씨, 엄청 무서운 사람으로 소문났어요.”

“길게 볼 사람들도 아냐.”

“저랑은 길게 보시게요?”

“그럼 안 되나? 이유야 어쨌든 연애도 하는 사이인데.”

“아뇨, 뭐. 좋죠. 돈 많은 분, 길게 보는 게 싫을 리 없잖아요.”

이 정도만 해도 우현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계약연애가 끝나도 하루의 곁에 있을 자격을 얻었다.

“그럼 강우현 씨는 저랑 연애를 잘 해내면 회장님한테서 뭔가 받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재산이라거나 회사 경영권 같은 거?”

“아마도 그렇겠지.”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는 우현이 ‘회사 동료라서 잘해주는 거야.’라는 말에 안심했기 때문인지 질문이 많아졌다.

“지금도 돈 많은데 굳이 그걸 다 받아서 뭐하시게요? 저번에 강우현 씨 집 보니까 집 꾸미는 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재산 전부 쌓아놓으시게요?”

“아니. 이하루 씨, 부가티로 모시러 가게.”

하루가 웃었다.

“그놈의 부가티. 내가 부가티란 말을 괜히 꺼내서는.”

“부가티쯤은 척척 살 수 있는 남자를 원하는 거 아니었나?”

“아뇨, 필요 없어요. 남자, 안 원해요.”

“나도?”

“지금 그건 데이트 중이라서 묻는 말, 아니면 진심으로 묻는 말?”

“오늘은 데이트하는 날이고, 크리스마스이브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하루는 얼마든지 우현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줄 수 있었다.

하루는 우현을 향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강우현 씨를 원하죠. 언제나 원하고 있어요.”

순간 우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하루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완벽한 얼굴에 서서히 번지는 미소는, 마치 동틀 녘의 햇살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은은하게 시작된 미소가 얼굴 전체를 물들이자, 정오의 햇살처럼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싹 바뀌어, 달콤하고도 농밀한 자주색 와인빛으로 물들었다.

어째서인지 심장이 콱 죄는 통증과 함께 평소와 다른 박동이 시작되었다.

두근, 두근, 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우현에게까지 전해질까 걱정스러워 몸을 피하고 싶었지만, 손목을 잡은 우현의 손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숨을 멈춘 채, 그저 우현의 얼굴에 번진 햇살 같은 미소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우현이 하루의 손목을 잡은 채로 일어났다.

그제야 하루는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깨어 있는 채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근사한 대답을 해줬으니 나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줘야겠군. 나가자.”

“아니, 이미 잔뜩 받았는걸요. 드레스에 구두까지. 아, 이거 혹시 대여한 건데 제가 설레발 친 건가요?”

“아니, 그건 그냥 선물이고. 크리스마스 선물은 따로 있어.”

“그럼 너무 미안하죠. 전 준비한 게 없는데.”

“이하루 씨는 이하루 씨 자체가 선물이야. 아주 큰 선물.”

저 남자는 어쩌면 저렇게 두근거릴 말만 골라서 할까?

우현은 하루를 데리고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다.

“파티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얼굴 비췄으니까 됐어.”

그러고 보니, 우현은 아까부터 하루의 코트를 들고 있었다.

우현이 오늘 파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걸 모르는 하루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우현의 뒤를 따랐다.

우현이 지나가는 호텔 종업원에게 코트를 가져다 달라고 하자, 종업원이 두 사람의 코트를 가져다주었다.

우현은 하루를 데리고 호텔 주차장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밤인데도 주차장은 굉장히 밝았다.

우현은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서야 하루의 손목을 놔주었다.

우현이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안에는 우현이 골랐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운 쇼핑백이 들어 있었다.

꽤 큰 사이즈의 쇼핑백이었다.

우현이 쇼핑백을 꺼내 하루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크리스마스 선물. 열어봐.”

쇼핑백 안에는 포장지로 싸인 것이 있었는데, 모양으로 봐서는 베개나 쿠션처럼 보였다.

하루는 안에 든 것을 꺼내 포장지를 벗겼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숨도 쉬지 못하고 ‘그것’을 응시했다.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었다.

하루는 ‘그것’을 꽉 움켜쥔 채 과거로 돌아갔다.

하루는 그 공간에서 한 소녀와 한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 소녀와 그보다 조금 더 어린 소년이었다.

소녀는 찢어진 인형을 안고 울고 있었다.

보라색과 형광 분홍색, 파란색 천으로 만든 못생긴 코끼리 인형이었는데, 긴 코와 다리 한쪽이 찢어져 있었다.

엉엉 우는 소녀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소년도 울기 시작했다.

소년이 울자, 소녀가 울 때는 나와 보지도 않던 엄마가 부엌에서 뛰어나왔다.

엄마는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소녀의 등짝을 때렸다.

“왜 동생을 울리고 그래? 누나가 돼서!”

소녀도 울고 있는데.

소년이 소녀의 소중한 인형을 망가뜨려서 울고 있는 건데.

소녀는 소년에게 뭐라고 하지도 않고 그냥 울기만 했는데.

낡아빠진 인형이지만, 소녀 소유의 인형이라고는 그거 하나라서 참으로 소중하고 소중한 인형이었는데.

소녀는 어린 마음에도 부당하다 생각했지만, 말해봐야 더 맞는다는 걸 알기에 울기만 했다.

엄마는 서럽게 우는 소녀 대신 소년을 품에 안았다.

“울지 마, 우리 아들. 울지 마. 엄마가 누나 때찌 해줄게. 울지 마.”

소녀에게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소년이 잘못해도 소녀가 혼났고, 소년이 나쁜 짓을 해도 소녀가 혼났다.

누나니까.

누나면서도 동생을 잘 봐주지 않았으니까.

누나면서도 동생을 이해해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익숙해도, 아직은 부모의 품이 필요한 나이이기에 소녀는 울 수밖에 없었다.

계속 울면 시끄럽다고 혼난다는 걸 알면서도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아직 어리기에.

눈물을 감추기에는 너무도 어리기에.

늘 있던 일 중 하나라서,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라서,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진 과거의 일 하나가 아프도록 거칠게 하루를 찾아왔다.

하루는 이제 울고 싶어도 울음을 참을 수 있는 성인이 되었지만, 부당하면 부당하다 주장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포장지 안에서 나온 못생긴 코끼리 인형을 보는 순간, 밀어닥친 과거의 파편을 목격하는 순간, 갑자기 터져 나온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흐른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고개를 숙였지만, 아마도 우현이 이 눈물을 봤을 것이다.

하루는 희미한 시야로,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남기는 흔적을 보았다.

그 끝에 미동도 없는 그의 구두코가 보였다.

그가 이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아줘서 고마웠다.

“어떻게 알았어요?”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코끼리 인형이요. 어떻게 알았어요?”

알지 못했다면 결코 하루에게 선물해줄 수 없는 인형이었다.

하루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이 인형을 사려고 했지만 단종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하루는 인형에 대한 미련을 버렸었다.

“내가 그 인형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있나?”

우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하루는 고개를 들고 우현과 눈을 맞췄다.

우현은 정말로 하루의 반응에 놀란 표정이었다.

“이 인형, 어디서 났어요? 이 인형이요, 되게 옛날에 단종됐어요. 이제는 못 찾아요. 제가 인터넷도 다 뒤져봤는데 없더라고요.”

“알아.”

“그런데 대체 어디서…….”

“내가 어릴 때 갖고 있던 거야. 이하루 씨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내가 소중히 여기던 걸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준비한 건데. 마음에 안 드나?”

“지금 제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걸로 보여요? 이렇게 감동받아서 엉엉 울고 있는데?”

하루는 이번만큼은 감격을 감추지 않았다.

우현이 피식 웃었다.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우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요. 정말…… 정말 너무…….”

다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루는 울면서 말했다.

“너무 좋아요. 너무요. 정말…… 이거 정말 제가 많이 좋아했거든요. 너무 좋아서…… 매일 안고 다니고, 같이 자고…… 너무 들고 다녀서 여기저기 헤지고 낡았는데도, 제일 좋아서요. 너무 좋은 친구라서요.”

하루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주절거렸다.

우현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런 하루를 내려다봤다.

성인이 된 후 만난 하루는 늘 씩씩하고 당당해 보여서, 굳이 우현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하루는 그때와 똑같았다.

소중한 코끼리 인형을 잃고, 우현의 옆에 앉아 펑펑 울던 그 소녀와 똑같았다.

-엄마가…… 엄마가 갖다버렸어. 내가 고쳐서 쓰려고 했는데…… 엄마가 버려버렸어. 찾으려고 했는데…… 어헝…… 흑…… 못 찾았어. 못 찾았어, 오빠.

그 인형은 우현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하루가 가끔씩 들고 나올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 못생긴 코끼리 인형을 잃어버린 어린 소녀의 눈물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이 소녀를 반드시 그 집에서 데리고 나오자고 결심한 것은.

돈을 많이 벌고 소녀와 둘이 살 집을 구해, 이 소녀를 데리고 나와 코끼리 인형이든, 기린 인형이든, 갖고 싶은 것을 전부 갖게 해주자고 결심한 것은.

그날, 소녀의 그 서럽고 억울한 눈물 때문이었다.

지금 하루가 흘리는 눈물은 그때처럼 서럽고 억울하고 외로운 눈물이 아닐 테지만, 우현은 가슴이 미어졌다.

그때는 하루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지만, 이제는 하루를 위해 뭐든 해줄 수 있었다.

널 위해 심장도 줄 수 있는 남자가 곁에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말해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현은 하루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고, 그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루가 우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일부러 기억에서 지워버린 건지, 아니면 쉽게 잊을 정도로 별것 아닌 만남이었기 때문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확신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고백했다가, 그녀가 완전히 돌아서 버릴까 두려웠다.

우현은 하루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고개를 숙인 채 이 코끼리 인형이 얼마나 소중한지 계속 되풀이하는 하루를 안아주고 싶었다.

안아도 될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

고민하던 우현은 하루를 향해 천천히 팔을 뻗었다.

훌쩍이는 그녀를 소중히 감싸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우현은 하루의 등을 토닥거리며, 그때 그 놀이터에서 해주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내가 찾아줄게. 내가 사줄게. 이하루 씨가 소중한 걸 잃어버리게 되면 말만 해. 어디에 있든 내가 가져다가 이하루 씨 품에 안겨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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