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하루가 휴게실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우현은 강 회장과 마주 보고 서 있는 중이었다.
강 회장의 옆에는 심각한 표정의 강 전무와 어쩐지 들뜬 표정의 김 여사가 서 있었다.
우현은 김 여사의 들뜬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디어 애물단지를 내보내게 돼서 기쁜 건가?’
“결혼할 상대라고?”
이윽고 강 회장이 입을 열었다.
“네.”
우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 하루는 그럴 생각이 없겠지만, 우현은 하루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루와 결혼을 하지 못한다면 평생 혼자 살 작정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강 회장은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그런 강 회장과 우현은 아주 많이 닮았다.
강 회장이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이 많다. 네 결혼 선포를 모두가 들었지.”
“네, 압니다.”
“거짓말이나 위장으로 하는 소리라면 아주 곤란할 텐데.”
“거짓말도, 위장도 아닙니다. 저는 하루를.”
거기까지 말하고 우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루의 앞에서는 절대 하지 못하는 사랑 고백을, 타인 앞에서는 쉽게 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별생각 없이 지은 미소였지만, 그 미소를 본 강 회장과 강 전무, 김 여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강우현이 웃다니!
오래전, 그 사건 이후 우현은 가족들에게 결코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밖에서는 잘 웃고 다니겠거니 했지만, 어디에서도 웃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물론 상대를 조롱하는 미소는 짓겠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그런 미소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우현을 웃게 해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힘쓰던 가족들도, 10년쯤 지나자 우현의 미소를 포기한 터였다.
그런 우현이 웃고 있다.
비웃음도 아닌, 무척이나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다.
정작 모두를 놀라게 만든 우현은 그런 자각이 없는지, 금방 무표정으로 돌아가 말했다.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진심 가득한 목소리에 강 회장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러냐?”
“네.”
“그럼 언제 한번 보여줘야지.”
“네, 그러겠습니다.”
그럴 날이 올지는, 우현도 알 수 없었다.
우현은 하루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계약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하루에게 잘해줄 생각이었다.
계약이 끝난 후에도 하루가 우현과 연을 맺고 지내는 걸 허락한다면, 그 때도 최선을 다해 하루를 위해 살아갈 작정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하루의 마음이 열려 우현을 받아준다면.
그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환희로 가득한 일이다.
‘받아주지 않는다면, 난 평생 하루 곁에서 하루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지켜봐야겠지.’
우현은 하루를 찾아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연회장이지만, 우현은 어디에서도 하루를 한 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회사에서 슬쩍 보고 그녀를 알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루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어디서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네요.”
우현은 강 회장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강 전무와 김 여사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들을 무시했고, 그들 역시 우현의 인사를 기대하지 않은 것 같았다.
+++
짜악-!
날카로운 파열음이 좁은 휴게실에 울렸다.
뺨을 맞아본 것은 아주 오랜만이라서 통증이 낯설었다.
하루는 옆으로 돌아간 고개를 똑바로 한 후, 희정을 노려봤다.
하루의 뺨을 때린 희정의 손은 여전히 공중에 올라가 있었다.
“나쁜…….”
희정은 욕설을 끝맺지 못했다.
짜악-!
하루가 희정의 뺨을 똑같이 때려준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희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픔보다 놀람이 더 큰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너, 너, 너, 네가 뭔데 날 때려?”
“그러는 너도 날 때렸잖아.”
하루가 담담히 말했다.
“난 그럴 상황이잖아!”
“어떤 상황이라도 남을 때려도 되는 상황은 없어.”
“하? 웃기지 마! 그건 잘못한 사람이 하는 변명일 뿐이야.”
“아니, 잘못을 한다고 해도 폭행은 안 돼. 욕이라면 들어줄게. 하지만 때리는 건 안 돼. 때리면 나도 똑같이 때려줄 거야. 그러기로 했거든.”
“뭘 그러기로 했는데!”
“맞고만 있지 않기로 했어. 반격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나도 있는 힘껏 반격할 거야.”
그러기로 했다.
오래전, 그 집을 나오면서 다짐했다.
두 번 다시는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온 힘을 다해서 어떻게든 방어하고 상대하겠다고.
희정은 하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다가, 곧 지금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넌 아주 나쁜 년이야.”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뭐가 그렇게 잘났어? 뭐가 그렇게 담담해? 결혼? 겨얼호온?”
“나도 강우현 씨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웃기지 마! 너, 우현이 오빠가 그럴 줄 알고 날 부른 거지? 날 엿 먹이려고!”
하루가 희정을 부른 게 아니지만, 희정은 그 사실을 잊은 듯했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니? 우현이 오빠한테 프러포즈 받는 모습, 그렇게 나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그런 게 아니라니까.”
하루는 설명할 길이 없어서 답답했다.
이건 다 계약연애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강우현 씨가 연기한 거라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둘의 계약연애에 대해 타인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계약서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의 친구들이야 우현에게 말할 일이 없으니 괜찮겠지만, 희정은 우현의 지인이었다.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을 누가 믿어?”
물론 못 믿겠지. 나도 못 믿겠으니까.
하루는 이 모든 일의 근원인 우현을 원망했다.
그 남자는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아무리 계약연애 때문에 연기를 해야 한다지만, 결혼 얘기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우현과 동행한 것만으로도, 하루와 우현이 사귀는 사이라는 걸 믿는 것 같았는데.
희정에게 제대로 해명하자면 우현의 속내를 아는 게 우선일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현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상대를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처한 기분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휴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야?”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우현이었다.
하루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사태를 만든 우현을 웃는 낯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우현이 하루의 뒤에 와서 서는 게 느껴졌다.
“하? 이것 봐. 이런 데도 그런 게 아니라고?”
희정이 기가 막힌다는 듯 하루에게 말했다.
하루는 우현이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바랐다.
희정이야말로 우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아닌가.
아무리 기회를 보고 있다고는 해도, 이런 오해를 하게 놔두면 둘의 사이는 회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조희정. 너, 이하루 씨한테 왜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거지?”
하지만 우현은 하루의 바람대로 행동해주지 않았다.
희정을 향한 그의 음성에는 온기가 조금도 없었다.
하루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아니, 나한테 하듯이 조희정한테 해주라고! 그러면 계약연애를 1년간 하면서 돈 쓸 필요 없이 알콩달콩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될 거 아냐? 설마 이 남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한테는 까칠하게 대하는 츤데레인가? 그런 거야?’
“이것 봐. 감싸는 것 좀 봐. 아주 대단한 사랑 납셨어.”
아니나 다를까, 희정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하루의 어깨 위에 우현의 손이 내려앉았다.
하루는 움찔했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아직 계약연애는 진행 중이고, 우현에게 다른 언급이 있기 전까지는 애인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
“가라, 조희정. 이하루 씨는 네가 그렇게 함부로 대할 상대 아니니까.”
우현이 명령했지만 희정의 시선은 하루에게 꽂혀 있었다.
희정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하루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아도, 희정은 분명 상처를 받고 있었다.
“넌 왜 한마디도 안 하는데? 그렇게 남자 뒤에 숨어서 뭐든지 해결하려는 여자, 진짜 최악이야. 같은 여자로서 상대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최악이라고.”
“나는…….”
“그럼 상대하지 말고 나가.”
우현이 하루의 말을 끊었다.
“어때? 지금도 해명할 수 있겠어? 지금 이 상황에 대해?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하면서도 결국은 우현이 오빠 뒤에 숨어 있잖아.”
희정은 우현을 아주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다.
하루만 똑바로 응시한 채로 쏘아붙였다.
“지금 이건…….”
“이하루 씨는 그래도 돼. 언제든 숨고 싶을 땐 내 뒤에 숨어도 돼.”
우현이 강하게 말했다.
이 남자는 대체 어쩌려고 희정의 속을 긁는 걸까?
하루는 우현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고 봐, 이하루. 너,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가만 안 두면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우현이 오빠 뒤에 숨는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아니, 생각해도 돼. 나는 이하루 씨를 위해서 뭐든 다 해결해줄 거니까.”
“저기요? 강우현 씨. 저도 얘기 좀 합시다.”
계속 우현이 말하게 뒀다가는 희정의 분노만 더 크게 부풀릴 것 같아서, 하루가 끼어들었다.
그런 하루의 앞을, 우현의 팔이 가로막았다.
“아니, 이하루 씨는 그냥 가만히 내 뒤에 숨어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현의 말에 감동을 받는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보호를 받아본 적이 없기에, 하루는 이 와중에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현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지만, 그가 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단단히 버티고 선 그의 존재가 고마워서, 든든해서, 이런 기분을 느껴도 될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희정은 씩씩거리며 우현과 하루를 노려봤다.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의 뺨을 한 대 더 후려치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하루가 똑같이 때릴 것 같아서 관뒀다.
아까 하루한테 맞았을 때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비켜!”
희정은 우현을 밀치고 휴게실을 나왔다.
저 좁은 공간에서 딱 붙어 서 있는 우현과 하루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슬픔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이하루 따위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모멸감이 느껴졌다.
착해빠진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여우였다. 그것도 불여우.
‘못된 기집애. 나쁜 년.’
우현이 그런 여자 따위를 감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유명한 여배우나 어마어마한 재벌집 딸이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두고 봐. 정말 가만 안 둬.’
희정은 우현을 건드리지 않고도 하루를 괴롭힐 방법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내 앞에 무릎 꿇게 만들어주겠어.’
+++
하루가 먼저 휴게실에 있는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하루가 앉자, 우현도 그 옆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하루가 말했다.
“저한테 설명할 게 많은 것 같은데요.”
“응.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전부 대답할게.”
하루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빨간 드레스 아래로 녹색 힐이 보였다.
힐의 끝부분을 응시한 채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강우현 씨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 계약서에 나랑 결혼 운운하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고 명시된 것도 아니고, 회장님 손자라는 것도 뭐, 굳이 나한테 말할 이유가 없는 일이고, 조희정에 대한 것도…… 사실은 내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묻고 싶었다.
그의 입으로 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해줄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이런 계약연애를 시작했고 어째서 이렇게 무리하게 결혼 발표 같은 걸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 나는…….’
하루는 고개를 돌려 우현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보며, 하루는 생각했다.
‘그래, 나는 이 남자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거야.’
하지만 왜?
안다고 이 관계가 달라질 것은 없는데.
안다고 계약연애의 대가로 받는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우현에 대해 알고 싶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걸 아는 순간, 무서운 사실도 함께 알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의 침묵이 길었지만 우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하루는 조용히 기다려주는 우현이 사랑…….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하루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위험한 생각을 할 뻔했다.
사랑스럽다니.
이 남자에게는 그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관계는 그저 계약일 뿐이니까.
이 남자가 아무리 달콤해도, 다정해도, 든든해도, 결국은 계약이 끝나면 사라질 것들일 뿐이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싫어.’
하루는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그 비슷한 감정조차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지독히도 끔찍한 그 감정으로 물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마음을 굳힌 하루는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