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결혼하겠습니다.
희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표정은 뭐야?’
우현은 희정에게 다정한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저토록 싸늘한 눈빛을 보낸 적도 없었다.
마치 자기 새끼를 지키는 호랑이처럼, 우현은 하루의 어깨를 감싸고 희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루의 어깨에 닿아 있는 우현의 손이 신경 쓰였다.
그저 대화를 한 것뿐인데, 혹여 하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노려보는 우현의 시선이 거슬렸다.
‘설마…… 진짜로 이하루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
우현은 눈이 높고 높아서 평범한 여자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우현이 유명한 여배우와 사귄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요새 엄청 뜨고 있는 아이돌그룹의 멤버와 사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와도 오래 사귀지 못했다.
그런 우현이 저렇게 평범한 여자를 좋아할 리 없다.
‘물론 좀 예쁘긴 하지만.’
그뿐이다.
예뻐봐야 여배우나 아이돌 가수보다 예쁠 리 없다.
하루는 아무것도 없는 여자였다.
희정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살이 되자마자 집을 나와서 혼자 살아왔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좁아터진 집에서 혼자 사는 여자가 우현의 눈에 찰 리 없었다.
‘그래, 절대 아냐. 강우현이 저런 여자를 진심으로 상대할 리 없어.’
희정의 눈에 하루의 난처한 표정이 들어왔다.
‘이 남자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행동을 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이하루가 저렇게 당황하지.’
“왜 그렇게 째려봐?”
희정이 턱을 올리고 물었다.
“이하루 씨한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우현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희정은 안심했다.
‘이하루 씨라니. 진짜로 좋아하면 저렇게 딱딱한 호칭을 쓸 리 없지.’
완전히 마음을 놓은 희정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친하게 지내자고 했어. 우리, 동갑이니까.”
“아, 그래? 정말이야, 이하루 씨?”
“네, 정말이에요.”
하루의 대답에 우현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울컥울컥 화가 났지만 벌써부터 화내지 않기로 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모든 것은 하루가 우현을 1층의 약속 장소로 데리고 온 다음부터 시작될 것이다.
거기서 희정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우현에게 매달릴 작정이었다.
우현의 뒤로, 오빠인 완우의 모습이 보였다.
와이프와 동행한 완우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아니, 이하루는 강우현 애인이 아냐. 그런 척하고 있는 것뿐이지!’
희정은 완우에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드레스 입은 차림으로 우현을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건 하루 때문에 망쳤다.
인정하기 싫지만 오늘의 하루는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예뻤다.
‘그래도 상관없어. 강우현은 그냥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우현도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알아온 희정이 울면서 매달리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회를 주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어쩌면 평소와 다른 희정의 모습에 호감을 느낄지도 몰랐다.
태산그룹에서 준비한 사회자가 나와 파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개그맨이었다.
사회자는 적당한 농담을 섞어가며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지만, 희정은 잠시 후에 있을 우현과의 대면을 생각하느라 즐길 틈이 없었다.
“아! 이게 웬일입니까? 마침 우리 세정그룹 회장님께서 등장하셨네요.”
사회자가 입구 쪽을 보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강 회장과 함께 우현의 아버지인 강 전무와 새어머니인 김 여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의 주목을 받은 세 사람은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태산그룹 회장이 얼른 일어나 강 회장에게 다가갔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한 기업의 회장이 다른 기업의 회장에게 인사하는 모습은 드물지만, 상대가 세정그룹의 강 회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세정은 그만큼 힘이 있는 그룹이었다.
“이렇게 초대해줘서 고맙습니다, 회장님.”
강 회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연단에서 내려온 사회자가 강 회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참 뵙기 힘든 분이 오셨으니, 우리 세정그룹 회장님께 축사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파티 주최자인 태산 회장이 아닌 세정 회장에게 축사를 부탁하는 게 무례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태산 회장은 기분 나쁜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세정그룹 회장이 자신의 파티에 참가해준 게 고맙다는 눈빛이었다.
강 회장이 사회자가 넘긴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제가 주최자도 아닌데 무슨 축사를 하겠습니까? 축사는 태산 회장님께 들어야지요. 저는 그저…….”
강 회장의 시선이 우현에게로 향했다.
“우리 손주가 이 파티에 연인을 데리고 온다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우현에게로 향했다.
다들 경악한 표정이었다.
세정그룹의 강우현이 애인을 수시로 갈아치운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애인을 선보이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우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너구리 영감 같으니.’
축사를 바라는 마이크를 잡고 굳이 이렇게 ‘우현의 연인’ 이야기를 꺼낸 건, 우현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애인을 쉽게 갈아치우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수작인 게 뻔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평생의 연인은 하루 한 명뿐일 테니까.
만약 하루가 내 것이 되지 않으면, 재산이고 뭐고 필요 없이 평생 혼자 살아가게 될 테니까.
우현은 하루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하루는 거의 겁에 질린 눈으로 우현을 보고 있었다.
우현은 하루에게 조금 미안했다.
사실은 아까 자신이 세정그룹 강 회장의 손자라는 걸 말해두고, 오늘 벌어질 일에 대해 설명을 해둘 생각이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인사를 하는 바람에 미리 얘기를 못 해뒀다.
그저 계약연애를 하는 입장에서 파트너로 파티에 참가한 하루에게는, 지금 벌어지는 일이 아주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안.”
우현이 작게 속삭였지만, 그 말은 하루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우현은 하루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 연인입니다. 조만간 결혼할 예정입니다.”
그 순간 희정이 벌떡 일어나 연회장을 나가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세정그룹 강 회장의 손자인 강우현.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철벽남이, 어쩐지 겁에 질린 듯 보이는 여자를 자신의 약혼녀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너무도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다들 머릿속으로 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여자는 뭘 저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강 회장과 강 전무 역시 놀라고 있었다.
우현이 애인을 데리고 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평소처럼 가볍게 만나는 여자를 데리고 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우현의 입에서 결혼할 여자라는 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들 당황하는 가운데, 가장 당황한 사람은 하루였다.
‘이게 뭔 소리래!’
짧은 순간, 너무 많은 생각이 하루의 머릿속에 해일처럼 밀려들어왔다.
‘강우현 씨가 세정그룹 회장님 손자라고? 진짜?’
‘결혼? 누구랑? 나랑? 아니겠지?’
‘조희정 씨. 조희정 씨는 어떡하지?’
‘아니, 난 어떡해? 난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 거야? 이게 뭐야?’
‘뭔 상황이야? 원래 크리스마스 파티가 이렇게 결혼 선포하고 그런 파티인 거야? 진짜 평생 잊지 못하겠네!’
‘그런데 결혼이라니. 그냥 계약연애인데, 이런 말까지 해도 되는 거야? 사람들 다 있는 데서?’
‘나 어떡해!’
오만가지 생각들을 간신히 밀어냈다.
지금은 웃어야 할 때였다.
하루는 미소 지었지만, 차라리 웃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사람들이 ‘저 여자, 지금 협박당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괴한 미소였기 때문이다.
그 후의 시간은 아주 정신없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린 사회자가 축하 인사를 하고,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강 회장과 강 전무에게 소개하고 인사하는 모든 일들이 꿈같았다.
하루가 정신을 차렸을 때, 우현은 강 회장과 단둘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하루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루는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혼란으로 헝클어진 머릿속을 조용히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로 가지?’
연회장 앞 복도에서 두리번거리던 하루는, 희정이 말했던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는 공간을 떠올리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우현과 이곳에서 만나고 있어야만 했다.
계단 옆 조용한 휴게실에서, 희정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믿을 수 없어!’
제 눈으로 보고 들었는데도 믿을 수 없었다.
우현의 입에서 ‘결혼할 여자’라는 말이 나오다니.
거짓말? 연기?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는 이런 자리에서 그런 말을 농담이나 거짓말로 해서는 안 된다.
하루는 어떨지 몰라도 우현은 진심일 것이다.
‘이하루. 날 속였어!’
순진하고 착해빠진 얼굴이라 속아 넘어갔다.
‘날 속였어!’
잠깐이나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실이 화가 났다.
배신감에 주먹이 떨렸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렸다.
희정은 휙 돌아봤다.
우현일 거라는 기대감, 혹은 하루가 변명을 위해 찾아왔을 거란 분노를 담고서.
하지만 휴게실로 들어온 건 우현도, 하루도 아니었다.
오빠인 완우와 그의 아내였다.
“일이 그렇게 돼서 울고 있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네.”
완우가 비아냥거렸다.
“내가 왜 울어? 안 울어, 난!”
“그래? 그런데 안 우는 건 그것대로 너무 뻔뻔하다. 강우현이랑 결혼할 거라며? 그런데 어쩌냐? 강우현은 그 여자랑 결혼할 거라는데?”
“…….”
“너 말이야. 그동안 내가 소개시켜준 남자들 다 걷어차고 온리 강우현이었잖아. 강우현, 반드시 잡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강우현은 너한테 잡혀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어쩌냐? 이제 나이도 차서 너 좋다고 할 남자도 없는데.”
“내가 나이가 차긴 뭐가 차?”
“아가씨, 이제 서른 다 되어 가는데 아무래도 좀 그렇죠. 이이 친구들은 젊은 여자를 선호하니까요. 어떡하면 좋아요.”
완우 부인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희정은 새언니를 쏘아봤다.
항상 선량한 척, 약한 척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여자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여자들은 대부분이 저런다.
“그러게 내가 소개시켜줄 때 적당히 골라서 만났으면 좋잖아. 너 이제 나이 들어서 괜찮은 집안 남자들은 만나기 힘들어. 걔들이 뭐가 아쉬워서 너처럼 아무것도 없이 나이만 든 여자를 선택하겠냐? 얼굴 예쁜 거? 그런 건 얼마 못 간다는 거,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걔들도 알잖아.”
“…….”
“그나마 괜찮은 녀석 잡아서 집안에 보탬 좀 되려나 싶었는데, 진짜 할 줄 아는 게 없구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희정은 완우처럼 서울대를 졸업하지도 못했고, 의대에 진학하지도 못했다.
집안의 이름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우현을 잡아 세정그룹의 며느리가 되는 것뿐이었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희정을 보며 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실망이 너무 크실 거야. 너, 얼른 만회할 길 찾아봐라. 더 늦기 전에.”
+++
희정이 말한 휴게실을 간신히 찾았다.
계단 옆으로 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문 하나를 발견했는데, 거기인 것 같았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못 찾지.’
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려는데, 안에서 두런두런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그제야 희정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희정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엿듣고 싶지 않아 돌아서려는데, 기가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
“나이도 차서 너 좋다고 할 남자도 없는데.”
나이가 차다니? 우리 나이가 어때서?
고작 29살인 희정이 저런 소리를 듣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이제 서른 다 되어가는데 아무래도 좀 그렇죠. 이이 친구들은 젊은 여자를 선호하니까요. 어떡하면 좋아요.”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말을 들으니 셋의 관계를 알 것 같았다.
희정과 희정의 오빠, 그리고 그 오빠의 부인인 듯했다.
희정의 오빠는 희정을 가차 없이 깔아뭉갰다.
마치 희정의 존재가치는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가족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밖에 없다는 듯.
놀라운 점은, 오만해 보였던 희정이 저런 말을 들으면서도 아무 대꾸도 못 한다는 점이었다.
‘역시 가족이란 건 정말 별 거 없어.’
하루는 가족이 가족에게 악담을 퍼붓는 게 딱히 신기하지도 않았다.
이윽고 휴게실 문이 열리고 희정의 오빠와 와이프가 나와서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겠지?’
하루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때, 휴게실 문이 열리고 희정이 밖으로 나왔다.
신경질적으로 나오던 희정과 하루의 눈이 딱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