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놓칠 수 없어.
크리스마스이브를 이틀 앞두고, 재현은 홀로서기 사무실에 와 있었다.
하루와 낙성은 고객님의 의뢰를 들어주기 위해 뭔가를 사러 나간 터였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하루와 낙성이 꽃과 포장지를 한 아름 들고 돌아왔다.
빨간색 아도니스와 노란색 루드베키아였다.
“와, 아도니스랑 루드베키아네요.”
재현이 일어나서 둘에게 다가가 짐을 받아들었다.
“이야, 재현 씨는 꽃을 아주 잘 아시나 봅니다. 전 이런 꽃들, 이름도 처음 들어봤는데.”
낙성이 감탄했다.
“전에 쓰던 소설 때문에 꽃들 조사를 한 적이 있었거든요.”
“아, 영원의 흔적이라는 소설이죠? 거기에서 남자 주인공이 꽃집 사장이었잖아요.”
하루가 말했다.
재현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자기 소설에 대해 잘 아는 것도 꽤나 간질거리는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네, 그 소설 쓰기 전에 한동안 꽃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었어요.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공부했죠.”
“그럼 꽃 포장도 잘하시겠네요?”
낙성이 눈을 빛냈다.
“꽃 포장이라면, 꽤 하겠죠?”
재현이 어깨를 으쓱하자, 낙성과 하루가 경외감 넘치는 시선을 보냈다.
“봐봐, 하루이틀사흘나흘. 재현 씨를 우리 직원으로 받아들이기를 잘했지? 역시 나는 안목이 있다니까.”
“네, 네. 서울대에 밀렸으니 안목이라도 있으셔야죠.”
“그놈의 서울대 타령! 그렇게 서울대가 좋으면 네가 서울대에 가지 그랬냐?”
“머리가 나쁜데 어떻게 서울대를 가요? 못 가요!”
“머리 나쁘다는 말을 참 당당하게도 하는구나!”
“창피할 일은 아니잖아요! 세상에 서울대 못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루가 투덜거리며 들고 있던 포장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사 온 것은 꽃뿐만이 아니라 막대사탕과 액세서리가 담겨 있을 것 같은 작은 선물 상자도 있었다.
“이별하는 건데 되게 정성껏 준비하네요.”
재현이 의아한 듯 묻자 하루가 대답했다.
“네,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동안 받기만 한 게 미안하거나 원래 성격이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준비해주는 사람들.”
“하루 씨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인가 봅니다.”
“별로라기보다는…… 헤어지는 마당에 이렇게 잔뜩 준비해서 선물해주면 미련만 남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번에도 어떤 남자분은 여자분이 준비한 선물 잔뜩 받더니,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고, 자길 잡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한참 동안 절 붙잡고 상담을 하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상담, 해주셨습니까?”
“저는.”
하루가 미소 지었다.
유쾌한 미소는 아니었다.
“사랑을 잘 몰라서요. 상담 같은 거 못해요.”
“포장도 꽃집에 부탁하지 말고 일일이 손으로 해달라더라고요. 정성을 가득 담아서. 너무 프로답지 않게, 열심히 했다는 느낌이 가득 담기도록.”
분위기가 묘해질 뻔했는데, 낙성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아, 그래서 꽃집에 부탁 안 하고 다 가지고 오신 거였구나.”
재현도 얼른 낙성의 말에 대꾸했다.
세 사람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꽃 사이사이에 사탕을 넣어달랬어요.”
하루가 말했다.
꽃과 사탕은 전부 재현의 앞에 있었다.
경험자인 재현에게 맡기기로 한 모양이다.
“네, 네. 성의가 느껴지도록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재현이 가위로 꽃줄기를 잘라 손질하는 동안, 하루는 작은 상자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작은 녹색 보석이 박힌, 심플한 디자인의 목걸이였다.
“이건 거의 프러포즈 수준이네요. 목걸이에 사탕이 들어간 꽃다발이라니. 하루 씨 말대로 이런 걸 받으면 미련이 남기도 하겠어요.”
“그러니까요. 목걸이도 딱 이 모양으로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별 펜던트 안에 녹색 보석이 박힌 거. 이런 걸 찾느라 액세서리 가게를 다 들른 거 있죠.”
“차라리 인터넷으로 링크라도 보내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요.”
“이별하는 날짜는 언제예요?”
“내일모레래요.”
“내일모레라면…… 크리스마스이브요?”
“네, 그렇더라고요.”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별이라니. 잔인하네요.”
“그런가요? 많은 날 중의 하나일 뿐인데.”
하루가 덤덤하게 말했다.
재현은 잠시 손을 멈추고 하루를 응시했다.
하루는 목걸이에 문제가 없는지 살피느라 재현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연인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설레는 날이다.
적어도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별이 너무하다는 생각 정도는 할 법도 한데, 하루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하루의 사랑 공포증에 대해 생각했다.
하루는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사랑을 무서워하게 된 걸까?
궁금했지만 아직은 물어볼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루의 속사정을 듣기 위해서는 하루와 좀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시선을 느껴서 고개를 돌렸더니, 낙성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재현을 보고 있었다.
재현은 아차 싶었다.
낙성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넉살 좋게 무슨 말이든 해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인데, 재현은 당혹감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래서야 하루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걸 낙성이 눈치챌 수밖에 없겠다.
‘하긴. 눈치챈다고 해도 상관없긴 하지. 난 왜 이렇게 당황하는 거야?’
아마도 하루를 향한 마음이, 지금껏 느껴온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리라.
재현 자신도 처음 느끼는 생경한 감정과 조급함을 타인에게 들키는 게 부끄러웠다.
다행히 낙성은 별말 없이 하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루이틀사흘나흘. 배 안 고프냐?”
“네, 안 고파요.”
“고프다고 해.”
“왜요?”
“난 지금 떡볶이와 순대가 먹고 싶으니까.”
“……고파요.”
“그럼 나가서 야식 좀 사 올게. 재현 씨는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습니까?”
낙성이 재현에게 물었다.
순간, 재현은 낙성이 하루와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저러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기분이 진짜라면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하루와 친한 낙성이 재현을 도와준다는 건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저도 떡볶이와 순대면 좋습니다.”
“거기에 오뎅 국물 한잔하면 죽이겠죠?”
“네, 진짜 죽이겠네요.”
“그럼 후딱 사 오겠습니다.”
낙성이 빨리 돌아오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하루는 낙성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듯,
“목걸이는 문제없네요. 흠집도 없고.”
라고 말하며, 상자를 열어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담았다.
“하루 씨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뭐하세요?”
재현은 낙성이 준 기회를 소중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출판사 파티에 가기로 했지만, 하루에게 약속이 없다면 출판사 파티는 취소하고 하루에게 데이트 요청을 할 생각이었다.
“이브에는 데이트를 해요.”
“아…… 데이트.”
하루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깜빡했다.
하루의 사랑공포증 얘기를 듣고 나서, 애인의 존재를 지워버린 것이다.
‘사정이 있어서 사귀는 거라고 했지. 대체 어떤 사정이기에 사귀기까지 하는 거지? 평범한 연인처럼 사귀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나 같은 날파리들을 쫓아내려고 사귀는 척하는 건가?’
몹시 궁금했지만 캐묻지 않기로 했다.
“부럽네요. 데이트도 하시고. 질투 납니다.”
“하하.”
하루가 어색하게 웃었다.
“재현 씨는 뭐 하는데요?”
“저는…… 출판사 파티에 가게 될 것 같아요.”
“와, 그럼 다른 작가님들도 많이 만나시겠네요.”
“좋아하는 작가 있으세요?”
“재현 씨요.”
하루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 ‘강재우 작가’인 재현을 좋아한다는 말이겠지만, 마치 고백을 들은 것처럼 심장이 반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이런 식으로 격하게 울리는 건 처음이라, 재현은 어떻게 이 감정을 갈무리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책 읽는 걸 되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는 재현 씨뿐이에요.”
설렘과 아픔이 동시에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걸, 재현은 오늘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좋아한다는 말에 두근거리면서도, 그녀가 좋아하는 게 그저 ‘작가 강재우’일 뿐이라는 사실이 아팠다.
저 고백이 ‘인간 강재현’을 향한 고백이라면 좋을 텐데.
“그거 영광입니다.”
재현이 간신히 말했다.
하루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다음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딱히 어색한 침묵은 아니었다.
하루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에 턱을 괸 채, 재현이 꽃을 포장하는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몇 번이나 재현의 손이 멈칫거렸다.
하루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재현은 열심히 꽃을 포장했다.
하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언젠가 ‘무슨 생각해?’라고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재현은 반드시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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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저녁.
희정은 내일을 위해 마련한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었다.
내일은 오전부터 피부 관리를 받고 미용실에 가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을 예정이었다.
‘화장도 안 했는데도 이렇게 예쁘네.’
희정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그때, 노크도 없이 희정의 방문이 열렸다.
“아, 뭐야?”
희정은 신경질적으로 오빠인 완우를 쏘아봤다.
희정을 본 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 집에서 드레스를 입고 있냐?”
“내일 입을 드레스거든.”
“흐응.”
“어때? 예쁘지?”
“흐응.”
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방으로 들어와 책상 의자에 앉았다.
“너, 강우현이랑 헤어졌다며?”
“안 헤어졌거든.”
“헤어졌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외할아버지가 실망이 크시더라.”
외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희정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희정의 외할아버지는 국회의원으로, 희정 집안의 실세였다.
희정의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들이 외할아버지의 지원으로 가능한 것이기에, 아버지도 외할아버지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네가 강우현이랑 결혼하게 될 것 같다고 설레발을 쳐서, 아버지도 이것저것 사업 크게 벌일 준비를 하고 계셨는데. 얼마나 사귀었냐? 한 달은 사귄 거야?”
“그 이상으로 사귀었거든! 그리고 지금도 헤어진 거 아니라고. 내일 파티에서 만날 거란 말이야.”
“아, 강우현이 만나주겠대?”
“그래!”
“흐응. 그럼 잘해봐라. 너도 알지? 네가 우리 집안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든든한 남자 잡아서 집안에 힘을 실어주는 것뿐이라는 거.”
“…….”
희정은 입을 꾹 다물고 완우를 노려봤다.
“떠먹여줘도 서울대 하나 못 들어가고, 그나마 대학원이라도 서울대 대학원에 갈까 싶었는데 그조차도 못하고. 어리광 피우는 것도 좋지만, 가족을 위해서 정신 좀 차려야지 않겠냐?”
외할아버지는 국회의원이지만 권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는 이름이 있기는 해도 대기업 축에는 들지 못하는 회사였다.
사교계에서 희정의 집안은 중간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현이나 재현은 서 있기만 해도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서지만, 희정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희정을 건드려 보고 싶은 남자들만 기웃거릴 뿐이었다.
그나마 희정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우현, 재현과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사교계에서는 여왕이 될 수 있었다.
때문에 희정은 우현을 놓칠 수 없었다.
개인적인 감정뿐만이 아니라 집안을 위해서도.
“우현이 오빠랑은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상관 마.”
“그래, 그거라도 잘해봐라. 너 때문에 골치 아프다, 진짜.”
완우의 말은 딱히 상처가 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유독 머리가 좋은 완우와 항상 비교를 당했고, 완우는 자기보다 공부를 못하는 희정을 늘 무시했다.
저런 말은 허구한 날 들었기에, 이제 와서 아플 것도 없었다.
완우가 나가자마자, 희정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침대에 앉았다.
희정은 엄지손톱을 깨물며 정면을 노려봤다.
‘두고 봐. 강우현은 반드시 내가 가질 거니까. 다들 날 무시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른 아침.
하루는 이미 일어나 씻고 나서, 벽에 걸린 원피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파티를 가는 건 처음이라 어떤 복장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하루가 가진 제일 좋은 옷도 ‘태산 그룹’이 주도하는 파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친구들에게 상담했더니, 은서와 미영이 자기들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제일 비싼 원피스를 선물해주었다.
무릎 아래로 살짝 내려오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는 하루가 가진 옷들 중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웠다.
‘이런 옷이 나랑 어울리려나? 아니, 그보다…… 이 정도면 되려나? 그래도 30만 원짜리 옷인데, 괜찮겠지?’
갑작스런 파티 초대이고, 우현도 하루에게 그런 파티에서 입을 만한 옷이 없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현의 파트너로서 함께 가는 것인데, 그를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문득 첫 주말 데이트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를 창피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바보 같은 짓은 다 했는데.
그때 입었던 복장이 떠올라 새삼 창피했다.
‘강우현 씨도 대단해. 그런 여자 데리고 다니기 쉽지 않았을 텐데,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같이 다니다니.’
우현의 얼굴이 떠오르자 빙그레 미소가 흘러나왔다.
하루는 자신이 우현을 생각하며 웃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이걸 입고 머리 손질 좀 하고, 인터넷으로 화장하는 법 찾아서 화장 좀 잘하면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겠지?’
화장도 문제였다.
하루는 원래 화장에 공을 들이는 편이 아니기에, 제대로 화장을 하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도 어제 집에 오는 길에 인조 속눈썹 사 왔으니까, 그것 좀 붙이고 하면 평소보다 나아 보일 거야.’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왜 이런 걸로 고민하는 거야? 어차피 오늘은 강우현 씨랑 조희정 씨를 만나게 해주는 자리인데. 내가 예뻐서 뭘 하겠다고!”
하지만 우현은 연기든 뭐든, 하루를 위해 많은 것들을 베풀었다.
처음에 몇 분쯤은 우현과 함께 있을 테니 부족한 여자로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 해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하루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했을 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응? 이 시간에 누구지?”
누군가 방문하기에는 이른 시간이기에, 하루는 의아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걸쇠가 걸려 있어서 한 뼘 정도 열린 문 사이로, 낯선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세련된 차림의 여자들이 하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