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모든 걸 줄 수 있어.
하루의 예리한 추리대로 욕실 안에 있던 사람은 우현이었다.
하지만 하루의 예리한 추리력이 맞추지 못한 것이 있었다.
우현은 정장 바지에 흰 셔츠를 제대로 갖춰 입고 있었다.
얼굴과 손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 하나 피부가 드러난 곳이 없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이 얹어져 있다는 점 하나였다.
“깼나?”
우현이 욕실 앞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하루와 연두를 보며 물었다.
전혀 당황하지 않은 눈치였다.
“네, 깼어요. 그런데…… 샤워하신 거 아니에요?”
“했어.”
“옷을 되게 꼼꼼히 차려입고 나오시네요. 저 안에서 옷 다 입고 나오는 거 안 불편하세요?”
“불편하지. 하지만 이 집에 여성분이 있는데 다 벗고 나올 수는 없잖아.”
“아, 그건 그렇죠.”
“흐음.”
우현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하루를 응시하다가 피식 웃었다.
“혹시 내 알몸을 기대했나?”
“예에? 아니요. 그런 거 절대 아니거든요.”
“표정은 실망한 표정인데.”
하루가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아차 싶어 손을 내렸다.
우현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실망시켜서 미안하게 됐군. 함부로 알몸을 보여주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실망하긴요.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참으로 다행이십니다.”
“뭐, 이하루 씨는 특별한 사람이니, 간절히 부탁하면 한 번쯤 보여줄 수 있기는 한데.”
“절대요. 전혀 부탁하고 싶지 않아요. 전 지금 강우현 씨가 꼼꼼히 옷을 차려입고 있어서 박수라도 쳐드리고 싶은걸요.”
“그럼 쳐봐.”
“예?”
“박수.”
하루는 입술을 비쭉거렸다.
역시 데이트를 하지 않는 날의 강우현은 못됐다.
아주 못됐다.
우현을 째려보며 짝, 짝, 짝 박수를 쳐드렸더니, 우현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박수를 받는 기분도 나쁘지 않군.”
“예, 그러시겠죠. 박수받는 데 워낙 익숙하실 테니까요.”
“속은 괜찮은가? 어제 많이 마신 것 같던데.”
“아……!”
그제야 하루는 지금 이렇게 실없는 농담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저기, 제가 왜 강우현 씨 집에 있는 거죠?”
“이하루 씨가 만취해서 잠들었으니까.”
“네. 저는 원래 만취하면 곱게 잠이 들거든요. 그런데 왜 제가 강우현 씨 집에서 자고 있는 걸까요? 술집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이하루 씨 친구들이 불렀어.”
“제 친구들이요?”
그제야 하루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우현을 궁금해하던 미영과 은서가 이 남자를 불러내서 얼굴도 보고, 잡담도 하고, 그다음에 하루를 들려 보낸 게 틀림없었다.
‘이, 이, 김미영 팀장!’
미영은 모 회사 스팸 광고로 자주 오는 ‘김미영 팀장’이란 별명을 몹시도 싫어했다.
“좋은 친구들이던데.”
“네, 제 친구들이야 뭐, 좋죠. 그 자리에 강우현 씨를 불러낸 건 정말 나쁘지만.”
“나쁘다고? 왜? 우리 집 침대가 불편했나?”
“아뇨. 엄청 포근하고 편했던 것 같아요. 이불도 폭신폭신하고 진짜 좋은 냄새도 나고.”
“그거 다행이군.”
우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에 심장이 덜컥, 움직였다.
하루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젖은 머리카락의 우현은 평소보다 섹시했다.
저 얼굴을 똑바로 보는 건 위험하다.
메두사를 앞에 둔 사람이 된 기분으로, 바닥을 응시한 채 하루가 말했다.
“강우현 씨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서요.”
“별로. 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하지만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데이트하는 날이 아니고…….”
“그런 건 상관없어. 꼭 데이트하는 날이 아니라도.”
“하지만 계약상…….”
“계약이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죠, 당연히. 돈이 오고 가는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게 계약서예요.”
하루가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우현이 빙그레 웃었는데, 이번 미소는 아까보다 조금 울적해 보였다.
우현이 다가왔다.
샴푸 향기와 바디클렌저 향기가 짙게 다가와 하루의 후각을 자극해서 아찔해졌다.
우현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맞나? 한 대 맞는 건가?
움찔하며 몸을 움츠린 하루의 머리 위에, 우현의 손이 살며시 놓였다.
우현은 헝클어뜨리듯 하루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어째서인지 그 손길이 무척 익숙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진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데이트하는 날이 아닌데도, 그의 손길을 거부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좀 더 오랫동안 머리를 쓰다듬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리카락만이 아니라, 볼을, 귀를, 목덜미를…….
“이하루 씨.”
우현의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루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이하루 씨가 필요할 땐 언제든 불러도 돼. 언제든 도움을 청해도 되고. 이하루 씨에게는 수요일과 토요일이 데이트하는 날이겠지만, 나에게는 모든 요일이 이하루 씨와 데이트하는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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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사무실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발개진 얼굴이 여태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미쳤나?’
머리를 쓰다듬던 우현의 손길이 너무도 생생했다.
그때 느꼈던 감정도.
‘그래, 내가 미쳤지.’
더 오래 만져주기를 바라다니. 더 많은 곳을 만져주길 바라다니.
그런 생각을 해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하루는 오히려 타인이 자신의 몸에 접촉하는 걸 싫어하는 편이었다.
정면에 서 있는 사람이 손을 올리면 ‘맞는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에게는 모든 요일이 이하루 씨와 데이트하는 날이니까.
우현의 그 발언도 자꾸 떠올랐다.
모든 요일이 나와 데이트를 하는 날이라니.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것도 연기인가? 하지만 오늘은 데이트하는 날도 아닌데 연기할 필요가 없잖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만약 그게 진심이라면, 마치 우현이 매일, 매일 하루를 생각한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강우현 씨가 나를 매일 생각할 이유가 없잖아. 강우현 씨는 나한테 좋은 감정이 없을 텐데.’
우현과는 그저 홀로서기를 통해서 알게 된 관계일 뿐이다.
오며 가며 회사에서 본 적이 있더라도, 그때는 대화조차 안 했으니 예외로 뒀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데, 우현의 일까지 고민하려니 머릿속이 완전히 헝클어진 것 같았다.
하루는 책상에 엎드렸다.
‘아, 진짜 모르겠네. 그 남자 속을 진짜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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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은 회사에서 표정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우현과 오랜 시간 일한 과장이나 차장급 직원들조차도 우현의 얼굴에서 감정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오늘 식품생산본부 직원들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 강우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죽인 거야.’
‘살해계획을 세우는 게 틀림없어.’
‘무섭다. 무서워.’
‘눈에 띄면 안 돼. 숨도 쉬지 마.’
‘회사, 관둘까?’
직원들이 숨 막히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우현은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보면 안 돼요. 갑자기 문 열고 들어오기 없어요.
욕실에 들어가기 전, 하루는 우현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니까 오히려 봐주고, 갑자기 문 열어줬으면 좋겠다고 들리는데. 그런 걸 바라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들어가서 욕실 문을 잠그면 그만이야.
-아, 그러네요.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하루가 정말 귀여웠다.
하마터면 하루가 우려하는 대로 그녀를 덮칠 뻔했다.
-우와! 뭔 욕실이 이렇게 넓어? 우리 집보다 넓네! 축구를 해도 되겠어!
욕실에 들어간 하루가 버럭 외치는 소리가, 닫힌 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바람에 우현은 연두를 끌어안은 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루는 갈아입을 옷이 없다며 세수만 하고 나왔다.
세수만 할 거면서 뭘 그리 긴장하고 경계했었는지 모르겠다.
내심 샤워하고 나온 하루의 모습을 기대했던 우현이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몇 번이나 위험한 충동에 휩싸이는데, 샤워하고 나온 하루를 보면 잘 견뎌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차를 타고 회사 근처로 향하는 동안에도, 하루는 계속 넓은 욕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화장실 바닥이 따뜻하더라고요. 화장실에도 보일러가 들어오는 거예요? 진짜 깨끗하고 좋던데. 욕조도 엄청 넓고. 강우현 씨는 매일 반신욕해요? 그래서 그렇게 피부가 좋은가? 반신욕이 몸에 그렇게 좋다던데. 의외로 건강을 되게 신경 쓰시는 분인가 봐요.
재잘재잘 떠드는 하루의 음성을 듣는 게 좋았다.
그 어떤 음악보다도 듣기 좋은 소리였다.
-그런데 강우현 씨. 그 넓은 집이 왜 그렇게 휑해요? 공간 낭비야, 진짜. 그 집 저한테 주면 제가 진짜 꽉꽉 채워서 잘 사용해드릴 수 있을 텐데.
-그럼 줄까?
-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강우현 씨가 말하면 진짜 줄 것 같아서 무서우니까.
-진짜 줄 수 있는데.
-제 안에 있는 깊고 어두운 욕심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저는 청렴결백하게 살고 싶어요.
-내가 준 집을 받는다고 부정부패를 하는 건 아니잖아.
-어우, 됐어요. 강우현 씨랑 얘기하다 보면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겠어.
-항상 진심인데.
-예, 그러시겠죠. 그런데 오늘은 데이트하는 날 아니니까 그렇게 오해할 소리는 하지 마세요. 저, 진짜로 새집 생겼다고 사방팔방 자랑하게 될 것 같으니까.
-자랑하고 싶으면 해. 곧 생길 테니까.
-이것 봐, 이것 봐. 또 이런 소리 하시고. 데이트하지 않는 날까지 그렇게 프로의식 발휘하실 거 없거든요.
하루는 절대 모를 것이다.
그녀가 원한다면 넓은 집 한두 채 정도는 사줄 수 있다는걸.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됐으면 좋겠군.’
그녀가 원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줄 수도 있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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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와서 오늘은 홀로서기에도 가지 않고 독서의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책상 옆에는 태산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의 초대장과 더불어 여러 파티의 초대장들이 쌓여 있었다.
재현은 사교적이라 지인이 많아서,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여기저기서 초대장을 받는 일이 많았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출판사에서 하는 연말 파티에 참가해달라는 요청도 받아서, 잠시 대답을 미뤄둔 상태였다.
사실은 하루와 함께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욕심도 있었다.
소설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다다랐을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으아, 깜짝이야.”
책에 깊이 빠져 있던 재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야, 강재현!]
전화를 받자마자, 희정이 인사도 없이 말했다.
“넌 인사도 안 하냐?”
[됐고. 너, 크리스마스 때 뭐해?]
“네가 알아서 뭐하게?”
[태산에서 하는 파티, 초대장 받았지? 난 거기 갈 거야.]
“흐응.”
[거기에 우현이 오빠도 오기로 했거든. 너도 와. 와서 도울 일 생기면 나 좀 도와줘.]
그 말을 듣는 순간, 태산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파티만큼은 절대로 가지 말자고 결심을 굳혔다.
“이거 어쩌나. 나, 그날 출판사 파티에 가기로 했거든.”
[거짓말 마.]
“진짜야. 저번에 드라마도 잘되고, 영화도 잘돼서 이번에 크게 파티를 연다더라고.”
[아씨, 진짜. 도움이 안 되네. 넌 내 인생에서 제일 도움이 안 돼!]
“우와, 고맙다. 그런 칭찬을 다 해주다니.”
[진짜 못 와? 야,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이럴 때 도와줘야지. 내가 우현이 오빠랑 결혼하면, 너한테도 좋잖아.]
“나한테? 대체 어떤 점이? 너 같은 형수님을 둔다는 점이?”
[당연히 좋지. 난 어머님이랑 아버님한테도 싹싹하게 할 거고, 너도 잘 챙길 거고.]
“에이,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네가 챙겨주다니. 그렇게 살기 싫어.”
[너,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지?]
“그거, 진짜 큰 칭찬인 거 알지?”
희정은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재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휴대폰을 내려놨다.
물론 우현에게 다시 도전하는 희정의 모습과 그에 대응하는 우현이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우현이 희정을 어떻게 대할지는 뻔했고, 그 불똥이 재현에게 튈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재현은 크리스마스를 기분 좋게 보내고 싶었기에, 아무리 호기심이 생겨도 그 파티만큼은 절대로 가지 말자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