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벗고 나올까?
“뭐래? 뭐래?”
미영이 전화를 끊자마자 숨죽이고 있던 은서가 달려들 듯 물었다.
“지금 바로 오겠대.”
“오오, 진짜? 목소리는 어땠어? 화난 것 같진 않았어?”
“응, 오히려 되게 기쁜 것 같던데.”
“기뻐? 뭐가 기쁜 거지?”
“이럴 때 자기를 불러준 게 기쁜 건가?”
“그런 거면 완전 그거 아냐? 그거.”
“응, 사랑.”
“그래, 사랑이지. 술 취한 진상 데려가라고 부르는데도 기뻐할 정도면 사랑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지. 정말 그렇고말고.”
하루의 두 친구는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그러는 동안 하루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자고 있었다.
우현이 도착한 건, 전화를 하고 30분 정도 지난 후였다.
술집 문이 열리고 우현이 들어오는 순간, 술집의 공기가 달라졌다.
시끌벅적했던 술집이 일순 조용해지며 우현에게 시선이 모였다.
우현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하루를 찾아 주위를 둘러봤다.
미영이 손을 올리자 우현이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그냥 걸어오는 건데도 그림이 되네.’
라고, 미영은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는 잠깐 봤을 뿐이라서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는데, 테이블 옆에 선 우현의 무표정한 얼굴은 조금 싸늘한 느낌까지 풍겨서, 회사 사람들이 ‘무섭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하루는 분명 우현이 굉장히 다정하게 대해준다고 했는데, 미영은 우현의 다정한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우현의 행동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루가 괜찮은지 확인한 우현이 미영과 은서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힌 것이다.
“하루를 잘 챙겨줘서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감사 인사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미영과 은서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우현을 올려다봤다.
다시 허리를 편 우현이 둘을 향해 미소 지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근사한 미소였다.
“이하루 씨에게 두 분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좋은 친구들이라고, 마음이 어려울 때 늘 곁에 있어준다고 하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남자, 진심이야.’
라고, 미영은 생각했다.
하루는 우현이 하는 모든 행동이 연기라고 했지만, 미영의 눈에는 도무지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저 곧은 눈동자와 다정한 미소, 묵직한 음성, 그 어디에도 거짓은 없었다.
우현은 진심으로 미영과 은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왜인지 콧등이 시큰했다.
저 오만해 보이는 남자가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 하루의 일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무척이나 기쁘고 고마웠다.
하루가 이 광경을 보았으면 했다.
저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아껴주는지, 얼마나 많이 생각해주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으면 했다.
“하루, 좋아하세요?”
미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은서가 물었다.
우현은 당황한 기색이 없이 대답했다.
“네, 아주 많이.”
그 말도 연기가 아니라는 걸, 미영과 은서는 알 수 있었다.
“그럼 왜 계약연애를 하시는 거예요?”
은서가 다시 물었다.
우현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는데, 그 모습마저도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우현의 시선이 엎드린 하루에게로 향했다.
하루를 향한 그의 눈빛은 더없이 달콤해서, 그걸 지켜보는 미영과 은서의 입안에도 달달한 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진짜 연애를 하자고 하면 하루가 도망칠 테니까요.”
무언가 있다고, 미영과 은서는 동시에 생각했다.
홀로서기 때 만나고, 회사에서 만난 것 이외의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게 분명했다.
“원래 하루를 알았어요? 홀로서기나 회사에서 말고요.”
미영의 질문에 우현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미영의 눈에는 그게 긍정의 대답으로 보였다.
미영과 은서는 더 이상 캐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의 대화에 대해 하루에게는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하루, 잘 부탁드려요.”
미영이 말했다.
“네, 이제 제가 지켜주겠습니다.”
우현이 대답했다.
미영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저 사람, 하루의 과거를 아는 게 분명해.’
잘 부탁한다는 말에 지켜주겠다는 대답은 어딘지 이상했다.
하지만 하루의 과거를 아는 미영에게는 그 대답이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우현도 하루의 과거를 안다는 의미였다.
미영은 하루가 좋았다.
그렇게 고된 삶을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하루가, 언제나 긍정적인 하루가 참으로 좋았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어떤 괴로움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알기에 안타깝고 속상했다.
이제 하루의 옆에는 하루를 잘 챙겨줘서 고맙다며 자기 일처럼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하루는 아직 모르겠지만, 하루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저 남자가 하루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싹텄다.
미영은 그 희망이 무럭무럭 자라 꽃피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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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깨어 있었다면 질색팔색할 공주님 안기로, 우현은 하루를 안아들고 있었다.
정말 깊이 잠들었는지 축 늘어진 하루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 모습을 사진을 찍어두고 싶은데, 처음 만난 하루의 친구들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는 없어서 관둔 터였다.
아쉽게 됐다.
하루를 놀려줄 거리를 이렇게 놓치다니.
하루의 친구들에게는 정말 고마웠다.
하루와 우현이 계약연애 중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취한 하루를 챙겨달라고 우현을 불러준 점이 고마웠다.
아마 우현의 태도를 봐서 하루를 맡길지, 그냥 돌려보낼지 결정하려고 했을 텐데, 우현을 믿고 하루를 맡겨준 점도 고마웠다.
하루도 모르는 우현의 마음을, 하루의 친구들은 눈치챈 것 같았는데 그 점까지도 고마웠다.
나중에 만나면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
하루의 집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에게 초대를 받지도 않았는데, 혼자 사는 여자의 집에 마음대로 들어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하루의 집 주소를 알고 있다는 걸 하루가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걱정이었다.
‘그냥 우리 집으로 가는 게 낫겠군.’
호텔은 너무 의미심장한 느낌이니, 우현은 자신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 집엔 연두도 있으니까.’
단둘이 있는 게 아니니까 하루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우현은 하루를 차 뒷좌석에 눕히고 집으로 향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하루를 안아들 때까지, 하루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진짜 잘 자네.’
이런 상황에서도 깨지 않는 하루가 감탄스러웠다.
‘아무 데서나 술 마시지 못하게 해야겠어.’
오늘이야 좋은 친구들과 함께 있었으니 다행이지만, 사내놈들 잔뜩 있는 자리에서 취하면 큰일이다.
잠든 모습도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우니, 사내놈들이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사랑하는 여자가 너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며, 우현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루를 안은 채 현관문을 여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그조차도 우현에게는 기쁨이었다.
하루를 안고 들어가자, 연두가 깡총깡총 뛰며 반가워했다.
우현은 “기다려.”라고 말한 후, 하루를 방에 데리고 가 침대에 눕혔다.
이 집에 침대라고는 우현의 침대 하나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침대 하나 더 사둘걸 그랬다.
커다란 침대라서 하루가 유독 작아 보였다.
쌕쌕 잠든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연두가 침대 끝에 있는 하루의 손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연두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위험한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우현은 연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연두야. 저번엔 제대로 말 못 했는데,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야. 정말 예쁘지?”
연두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하루가 너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네가 없었으면 충동에 졌을지도 모르겠어.”
연두는 그런 주인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는 듯 계속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우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하루를 향해 살며시 손을 뻗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넘겼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잠깐만 쓰다듬어줄 생각이었는데, 한 번 쓰다듬으니 손을 뗄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우현의 손길이 성가셨는지, 하루가 “으응.” 하고 몸을 뒤척였을 때에야 우현은 황급히 손을 떼었다.
하루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중얼거렸다.
“혀니 오빠…….”
혀니 오빠?
우현은 미간을 좁혔다.
하루의 입에서 ‘오빠’라는 호칭이 나온 게 거슬렸다.
내 안에 이런 감정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질투가 피어올랐다.
우현은 주먹을 꾹 쥐고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노력했다.
‘혀니 오빠가 누구지?’
아마도 ‘현이 오빠’라고 한 것 같다.
우현의 이름에도 ‘현’이 들어가지만, 하루는 어릴 적 우현을 현이 오빠라든가, 우현 오빠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현의 이름을 알기나 했는지 의문스러웠다.
‘누구지?’
잠결에 부를 정도라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의미다.
당장이라도 하루를 깨워서 혀니 오빠가 누구냐고 묻고 싶은 걸 참았다.
‘하루가 자면서 누굴 부르든, 난 아직 관여할 입장이 아냐.’
하루에게는 하루가 살아온 인생이 있었다.
우현이 없는 동안 하루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또 누구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든, 우현이 개입할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질투를 느끼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었다.
그 당시, 하루의 손을 놓은 건 우현이었다.
‘그래, 난 질투할 자격 없어.’
우현은 돌아섰다.
하지만 곧 다시 돌아서서 하루 위로 허리를 굽혔다.
하루의 동그스름한 이마 가까이에서 우현의 입술이 멈췄다.
종이 한 장 들어갈 정도로 약간의 여유를 둔 채, 잠시 그렇게 머물러 있다가 다시 허리를 펴는 우현의 얼굴엔 다시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우현은 다정한 눈으로 하루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좋은 꿈 꿔. 이 집에 무서울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
뭔가 얼굴을 할짝할짝 핥고 있다.
뭐가 내 얼굴을 이렇게 맛있다는 듯이 핥는 걸까?
이러다가 내 얼굴 녹아 없어지겠네.
하루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눈을 떴다.
낯선 천장과 함께 익숙한 강아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연두였다.
“꺄아, 연두야. 간지러워.”
웃으면서 연두를 끌어안던 하루는 지금 이 상황의 의미를 깨닫고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악! 뭐야!”
연두가 웡웡 짖었다.
“아, 미안. 놀랐지? 미안, 미안. 그런데 나도 너무 놀라서.”
하루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손바닥을 대고 주위를 둘러봤다.
대충 봐도 하루의 집이 아니었다.
커다란 방에 넓은 침대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연두야.”
하루는 혼란스런 눈으로 연두를 내려다봤다.
연두가 하루 옆에 예쁘게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설마 여기…… 강우현 씨 집인 건 아니겠지? 그렇지? 응? 이거…… 그래, 꿈이겠지? 그렇지?”
꿈이 아니라는 걸, 하루는 알고 있었다.
“꿈이야, 꿈. 그래, 나는 지금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눈을 뜨자마자 커다랗고 예쁜 강아지가 날 핥아주는, 그런 근사한 꿈. 그치, 연두야?”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이었다.
이 방 안에 가득한 우현의 향기가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연두야,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하루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가 어제 친구들이랑 술을 마셨거든? 좀 많이 마셨단 말이야. 그래서 아마 잠들었을 거야. 그래, 난 원래 취하면 잠을 자거든. 아주 깔끔하고 담백한 술버릇이지? 알아. 난 원래 깔끔하고 담백해.”
하루는 중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거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놀라운 건, 그 넓은 거실에 인테리어라고는 소파 하나, TV 하나, 그리고 강아지 장난감과 침대가 전부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뭘까? 왜 이렇게 강우현 씨 이미지랑 딱 어울리는 집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걸까? 그리고 왜…….”
하루의 시선이 욕실로 보이는 문 쪽으로 향했다.
“저 욕실에서는 샤워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까? 응?”
하루는 얼른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어제와 똑같은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그때, 샤워기 소리가 멈췄다.
하루는 마른침을 삼키며 욕실 문을 응시했다.
연두가 있다는 건, 이 집이 우현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저 욕실 안에서 샤워를 하는 인물은 우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저 안에 있는 인물은 팬티 차림이거나 수건 한 장만 달랑 두른 채 거실로 나올 것이다.
‘그럼 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지?’
하루는 마음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어째서 우현의 집에 있게 되었는지는 나중의 문제가 되었다.
하루의 온 신경은 욕실 문으로 향해 있었다.
우현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기대되는 한편, 그런 걸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기 싫기도 했다.
연두는 그런 하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루 옆에 단정하게 앉아서 하루와 함께 욕실 문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때.
달칵-
욕실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