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32화 (32/119)

#(32) 왜 이럴까?

‘비행기 공포증이라고? 진짜 안 어울린다.’

집에 돌아온 하루는 재현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재현은 세상에 무서운 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이미지였기에, 그가 무서워하는 게 있다는 게 신기했다.

-원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해보려고 애쓸 것도 없어요. 하루 씨는 그냥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쭉 살아가면 돼요.

하루가 ‘사랑을 못한다.’고 할 때마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래도 한번 해봐.

네가 너무 마음을 닫고 있는 거야.

사랑이 얼마나 좋은데, 마음을 열어봐.

다들 사랑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며, 한 번뿐인 인생인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재현은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굳이 노력할 것 없이 지금까지처럼 쭉 살아가면 된단다.

-그러다가 언젠가 시간이 흘러, 제가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그 날이 오면. 그때 한 번 더 생각해봐요. 사랑을 받는 것이, 그리고 사랑을 하는 것이 하루 씨에게 여전히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인지에 대해서.

하루는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을, ‘공포증’과 연장선상에 두고 하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그래서일까.

사랑을 하려고 노력할 것 없다는 재현의 말이, 오히려 깊게 각인되었다.

처음으로 사랑을 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사랑공포증일까?’

침대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하루는 앞으로 쭉 팔을 내밀었다.

예전에는 이런 자세를 취하지 못했다.

이렇게 하면 옷소매가 위로 올라가고, 그러면 팔뚝에 있는 멍이 친구들에게 보일지도 모르니까.

‘내 몸에 멍이 사라진 것처럼, 내 가슴의 두려움도 사라지게 될 날이 올까? 그때가 되면 나도 남들처럼, 사랑이라는 게 굉장히 행복하고 영원한 것이라고 믿게 될까?’

하루의 입가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 타령을 하며,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그릴 수가 없었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지만, 과연 겉으로 보이는 그 행복이 진짜일까 의심이 되었다.

하루의 가족도 밖에서는 완벽하고 화목한 가족이었다.

하루의 아버지도 밖에서는 친절하고 다정한 아버지였다.

-저 집 남편이 집에 그렇게 잘한대요.

-돈도 잘 벌고 애들한테도 잘하고. 부러워 죽겠어.

-하루는 좋겠네, 멋있는 아빠가 있어서.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루는 늘 미소를 지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라고 말하면 엄마가 울 테니까, 아빠의 손이 올라갈 테니까.

하루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도 무자비하게 내리치던 커다란 손이 생생했다.

그때는 그 손이 너무 크게만 보였다.

성인이 되어 그 집에서 나오면 그 손이 더 이상 크게 느껴지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 우악스러운 손은 여전히 거대하게 하루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난 평생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할 거야.’

한때는 자유로워질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과거 따위 다 지워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찬 소망을 품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나온 후로도 하루는 그때의 공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1년이 지나면, 2년이 지나면, 그리고 또 5년이 지나고 6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그런 희망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옅어졌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지금과 달라질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저 그 사람이 씩씩하게 살아가라 했기에, 그렇게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했기에 그 말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난 지금 이하루 씨를 꼭 끌어안고 위로해주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나?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우현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은 여전히 무서운데.

-괜찮아. 무서워할 거 없어.

그의 미소가 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보여주는 친절도, 다정함도 전부 내 것이 아닌데, 진짜가 아닌데.

나는 왜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걸까?

하루는 침대 옆에 내려둔 휴대폰을 돌아봤다.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이 울렸다.

마치 생각을 읽힌 것 같아 깜짝 놀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도경이나 은서, 미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셋 다 아니었다.

[6번 출구]

우현이었다.

왜일까.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나려고 하는 이유는.

하루는 코를 훌쩍이며 전화를 받았다.

“네.”

[이하루 씨. 자고 있었나?]

“자고 있었으면 어쩌시려고요?”

[미안해하려고.]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공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다행히도 안 자고 있었어요.”

[그럼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침대에 앉아 있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두근, 하고 심장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이 말도 진심이 아닐 텐데.

데이트하는 날인 오늘이 끝나지 않아서 나오는 말일 텐데.

“그러시군요. 마침 잘됐네요. 저도 강우현 씨 목소리가 듣고 싶었거든요.”

그는 연기겠지만 하루는 자신이 연기하는 게 아니라는 자각이 있었다.

[그거 기쁜걸.]

그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웃음기가 전해졌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무표정할까, 아니면 미소를 짓고 있을까?

[이하루 씨. 기분은 괜찮아?]

“네, 괜찮은데요. 왜요?”

[아까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했거든.]

“아아.”

하루는 희정에 대해 잠시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당당하게 우현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밝히던 희정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들떴던 기분이 훅 가라앉았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랬나 봐요. 데이트하는 날이라 즐겼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아냐. 나는 이하루 씨가 내 앞에서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아. 기분 나쁠 땐 나쁜 티 내도 되고, 우울할 땐 우울한 티 내도 돼. 그게 좋아.]

“강우현 씨는 정말 다정하네요.”

[그래? 이하루 씨가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다행이네.]

‘지금 저한테 하듯 희정 씨에게 해주면 좋아할 거예요. 앞으로는 차일 일 없을 거예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기 싫어서 하지 않은 건지, 오늘은 연인이어야 하는 날이기에 하지 않은 건지, 하루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늦었다. 얼른 자.]

“네, 강우현 씨도요.”

[잘 자.]

“강우현 씨도 잘 자요.”

평범한 연인 같은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은 후에도, 하루는 잠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우현이 하는 모든 행동이 그저 계약연애를 위한 연기일 뿐이라도, 지금은 휴대폰으로 전해진 온기가 고마웠다.

하루를 지배하고 있던 공포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 것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

희정은 어머니가 건네준 초대장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태산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장이었다.

태산은 종종 이런 식으로 호화로운 파티를 열곤 했다.

태산의 회장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까닭이었다.

“귀찮아.”

희정은 초대장을 읽어보지도 않고 책상 위로 휙 던졌다.

우아한 척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같이 우아한 척하는 건 아주 피곤한 일이었다.

희정은 호텔 연회장에서 하는 파티보다는 클럽에서 노는 게 더 좋았다.

크리스마스에는 친구들과 클럽에 가서 신나게 춤을 추기로 약속을 잡아둔 터였다.

“누가 미쳤다고 크리스마스에 그런 파티를 가겠어?”

물론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한편, 남편감으로 좋은 남자를 찾기 위해 파티에 참가하는 양갓집 규수들이 꽤 많이 오기는 할 것이다.

그런 파티는 돈 많은 사람들이 자기 딸과 아들을 자랑하고 선보이는 자리로도 쓰였다.

“아, 맞다. 강우현.”

침대에 드러누웠던 희정은 벌떡 일어나 던져둔 초대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래, 우현이 오빠도 이 파티에 오게 하면 되겠다.”

우현은 이런 파티에 참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희정은 몇 번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여자들은 참석하지 않은 우현을 궁금해하고, 우현에 대해 들은 소문에 대해 떠들어댔다.

-엄청 잘생겼다던데. 키도 크고.

-강재현이랑 닮았나?

-강재현은 댈 것도 아니래. 조각이라던데? 강 전무님이랑 많이 닮았다더라.

-성격 안 좋다는 소리가 있던데.

-성격 안 좋은 건 문제가 안 돼.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잖아. 그거야 우리가 고쳐주면 되는 거고.

-하긴. 세정인 데다가 외모까지 끝내주면 반드시 잡아야지.

-전 저번에 세정 본사 쪽 갔다가 한 번 본 적 있는데요. 진짜 장난 아니에요.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희정이 제일 좋아하는 순간은, 그 여자들이 희정을 발견하면 다가와서 우현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였다.

우현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것만으로도, 희정은 사교계의 여왕이 될 수 있었다.

우현을 손에 넣는다면, 여왕이 뭔가. 여신도 될 수 있을 터였다.

“내가 가자고 할 때는 한 번도 안 갔지만 이하루, 그 여자가 같이 가자고 하면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계약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이하루한테 웃어주기까지 하니까 파티쯤은 같이 가주겠지?”

희정은 하루가 한 말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

우현이 하루에게 웃어주는 것도, 잘해주는 것도, 전부 계약연애이기 때문이라는 걸 믿어야만 자존심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집안도, 능력도, 외모도 자기보다 못한 하루에게, 우현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렇게 친절하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현이 오빠는 내가 드레스 입은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나, 드레스 입으면 진짜 예쁜데.”

희정은 방 안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늘씬한 체구의 예쁘장한 미인이 거울 안에 있었다.

“내가 드레스 입은 걸 보면 깜짝 놀라겠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남자들이 자기 여자친구의 드레스 차림을 보고 환호하거나, 평범한 줄 알았던 여자인 친구의 새로운 모습에 감탄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우현이 아무리 까칠하고 눈이 높다 해도, 남자는 남자였다.

게이가 아닌 한, 희정의 다른 모습에 감탄할 것이 분명했다.

희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하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안주로 나온 주꾸미 볶음 하나를 집어 들던 하루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하는 걸 느꼈다.

얼른 주꾸미를 입에 넣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주꾸미가 생각보다 너무 매웠다.

입안에 번지는 싸한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며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하루는, 매움을 잊을 정도로 당황하고 말았다.

[조희정]

희정이 조만간 연락하겠다고는 했지만, 하필이면 매운 걸 먹어서 입안이 화할 때에 전화를 걸어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지금 하루가 있는 곳은 안주 3개에 15000원인 데다가 맛있기까지 해서 사람이 많은 술집이었고, 맞은편에는 은서와 미영이 앉아 있었다.

희정의 전화를 받기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희정의 성격에 전화를 받지 않으면 난리를 칠 것 같았다.

하루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술집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에 ‘겉옷 입고 나올걸.’이라고 후회하며 전화를 받았다.

“어오에오.”

주꾸미 때문에 혀가 얼얼해서 제대로 발음이 되질 않았다.

[……이하루 씨?]

“에. 예. 네. 아, 에가. 아니, 제가. 제가 지금.”

[뭐예요? 무슨 일 있어요?]

의외로 희정은 하루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하루는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고 차가운 공기를 하하 들이마셨다.

혀에 찬 공기가 닿자, 얼얼함이 조금 가셨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어쩐 일이세요?”

[이하루 씨. 날 도와주겠다고 했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물론 희정이 하루에게 전화를 걸 이유는 우현과 관계된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루는 우현과의 계약연애를 끝내고 싶었고, 그걸 위해 희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를, 하루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예, 물론이죠.”

[크리스마스 때 파티를 해요. 태산에서 주최하는 파티인데 들어본 적 있어요?]

얼마 전 우현이 말한 그 파티였다.

“예, 들어본 적 있긴 한데.”

[잘됐네요. 이하루 씨 집으로 초대장 보낼게요. 우현이 오빠한테 잘 얘기해서 파티에 참가하라고 해줘요.]

이미 우현은 그 파티에 가기로 했지만 하루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희정에게 조금은 생색을 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제가 책임지고 데리고 갈게요.”

[굳이 같이 오진 않아도 될 텐데.]

“네, 혼자 보낼 수 있으면 혼자 보낼게요. 하지만 강우현 씨가 파트너와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고 하면 저도 어쩔 수가 없어서.”

[……좋아요, 그럼. 방해나 하지 말아요.]

“하하하. 제가 방해할 이유가 없죠.”

[이하루 씨 믿을게요. 그날 봐요.]

희정은 하루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웠지만, 하루는 춥다는 것도 잊고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내 기분은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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