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31화 (31/119)

#(31)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넓은 거실에 있는 거라고는 소파 하나와 TV가 전부였다.

아니, 강아지용 소파와 장난감 여러 개가 바닥에 널려 있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던 우현의 집에 온기가 스며든 것은 연두를 키우고 나서부터였다.

씻고 나온 우현이 소파에 앉자, 창밖을 구경하던 연두가 얼른 달려와 소파 위로 올라왔다.

허벅지에 턱을 괴고 누운 연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현은 하루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하루의 어두운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지?’

사람이 항상 행복하고 밝은 표정만 지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걸, 우현도 알고 있었다.

문제가 없으려면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듯, 사람은 항상 크고 작은 문제를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현에게 하루의 어두운 표정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큰 문제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손목의 멍 자국을 가리며 고개를 휘휘 젓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생생했다.

눈물 자국이 남아 있으면서도 애써 웃으려 하던, 깨질 듯 불안한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막 8살이 된 하루를 처음 만난 순간의 일을, 우현은 바로 어제의 일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날의 공기도, 바람도, 들려오던 여러 소음도.

파란 하늘을 흘러가던 구름의 모양도, 햇살의 번짐까지도.

우현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

집을 뛰쳐나온 건, 아버지와 새어머니인 김 여사가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 어머니를 쫓아낸 주제에, 내 어머니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는 김 여사를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났다.

얼마나 달렸는지, 어디로 달리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달렸다.

숨이 턱에 차올라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죽어도 나쁠 건 없었다.

살아봐야 지옥인데, 죽은들 뭐가 달라질까.

오히려 더 좋아질지도.

퍽-!

무언가와 부딪친 건, 어느 골목 앞에서였다.

골목을 달려 나오던 누군가가 우현의 허리에 세게 부딪쳤고, 나가떨어졌다.

우현은 그리 아프지 않았지만, 상대에게는 큰 타격이었나 보다.

달리기를 멈추고 돌아보니, 자그마한 소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부딪친 후 그대로 넘어졌으면 아플 법도 한데, 소녀는 멍하니 앉은 채로 우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찮아.’

하지만 자기 때문에 넘어진 아이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우현은 소녀의 옆에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야, 괜찮아?”

소녀는 말간 눈으로 우현을 보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야, 너 왜 갑자기 울고 그래?”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을, 우현은 알지 못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소녀가 앙앙 울며 말했다.

“무서워, 무서워.”

“어? 뭐가?”

우현은 혹시 다른 누군가 있나 싶어서 골목을 돌아봤다.

“오빠가.”

“엉?”

“오빠가 무서워. 엉엉.”

“…….”

우현의 인생 11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그 시간 동안, 무섭다는 평가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우현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바람이 옅게 불어오는 쌀쌀한 오후, 무서워하는 소녀와 충격을 받은 소년은, 사람 없는 골목길에 그렇게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우현이 정신을 차린 건, 소녀의 손바닥 때문이었다.

넘어질 때 다쳤는지, 소녀의 손바닥은 엉망으로 까져 있었다.

몇몇 부분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너, 손 다쳤다. 어디 봐봐.”

손수건 하나 없었지만 옷으로라도 소녀의 손에 묻은 오물을 닦아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소녀의 손을 잡아 끌어당기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긴 소매가 위로 올라가면서 소녀의 가느다란 팔뚝이 드러났는데.

“너, 이거 뭐야?”

도저히 그냥 생겼다고는 할 수 없는 거뭇한 멍이 잔뜩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당황한 듯 손을 빼내고 소매를 끌어 내렸다.

“이거 누가 그랬어?”

우현도 어린 나이였지만 심상치 않은 멍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어딘지 모르게 간절한 눈으로 우현을 응시하며 입술을 벌렸다.

“아…….”

거기까지 말한 소녀는 조개처럼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누가 때렸어?”

소녀는 답 없이 고개만 휘휘 저었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말 좀 해봐. 누가 때린 거지? 누구야? 말해봐. 이거 경찰한테 신고해야 해!”

갑자기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우현은 다시 당황했다.

“야, 왜 울어?”

“오빠가 무서워서…….”

쿵-!

충격이다.

무섭다는 말을 두 번이나 듣다니.

“내가 뭐가 무섭다는 거야?”

소녀가 검지를 들어 우현의 얼굴을 가리켰다.

“내 얼굴이? 야, 난 귀엽고 잘생겼다는 말 많이 듣거든?”

우현은 어렸기에, 자기 입으로 귀엽다는 말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무서워. 화가 났잖아.”

그제야 우현은 소녀가 정말로 무서워서 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집을 뛰쳐나올 때 짓고 있던 표정이 여전히 얼굴에 남아 있었나 보다.

하지만 우현은 원래 잘 웃는 편이 아니었기에, 소녀의 울음을 멈추게 하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난처해서 입술 안쪽 살만 잘근잘근 씹는데, 간신히 울음을 멈춘 소녀가 말했다.

“왕자 같은 오빠.”

“왕자 같은……?”

“응, 왕자 같은 오빠. 웃어봐. 오빠는 웃으면 정말 왕자님 같을 거야.”

“난…… 난 원래 잘 안 웃어.”

“원래 잘 안 웃는 게 어딨어?”

“너도 안 웃잖아.”

“난 웃어. 난 잘 웃어.”

“웃어봐, 그럼. 그만 좀 울고.”

그러자 소녀는 웃었다.

그 순간, 소년은 이 순간이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리라는 것을 막연하게 느꼈다.

옅게 불어오는 바람이 소녀의 머리칼을 살랑이고, 흐트러진 머리칼이 소녀의 눈썹 위에서 한들거렸다.

가지런한 눈썹 아래, 속눈썹이 길고 커다란 눈이 살그머니 접히는 광경은 마치 낮에 뜬 달처럼 아련하고도 신비로웠다.

작고 오뚝한 코 아래에 비쭉이던 붉은 입술이 부드러운 반원을 그렸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하고 하얀 이가 보였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오빠도 웃어봐, 나처럼.”

소녀가 말에, 우현은 정신을 차렸다.

“나는 너처럼 못 웃어.”

그러자 소녀는 양손을 뻗어왔다.

단풍잎 같은 두 손이 우현의 양쪽 볼을 감쌌다.

소녀의 손바닥은 흙과 피로 더러웠지만, 우현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볼에 닿는 손이 무척이나 따스하고 애달파서, 우현은 이대로 쭉 시간이 멈춰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웃을 수 있어, 오빠도. 오빠가 진짜 왕자처럼 웃는 걸 보고 싶어.”

우현은 진짜 왕자처럼 웃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멋진 미소를 보여준 소녀를 위해 웃는 것쯤은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소녀의 미소를 따라 하려고 애쓰며 입가의 근육을 끌어당겼다.

그 표정이 웃겼는지, 소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한 골목에 까르르, 울려 퍼지는 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그래서 소년은 그날 이후 소녀를 만날 때마다 열심히 웃었다.

이 지옥 같은 삶에서 유일한 음악인, 소녀의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왕자 같은’ 오빠에서 ‘왕자’ 오빠로 격상하기 위해.

.

.

하루는 우현을 ‘왕자 오빠’라고 불렀다.

그때는 ‘왕자’라는 표현이 뿌듯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 간질거리는 표현이다.

만약 하루가 이대로 우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떤 식으로 자신을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 그때 그 왕자 오빠야.’라는 말은, 이 나이가 되어서는 죽어도 못 하겠다.

한 10년 정도만 어리면 젊은 치기에 도전은 해보겠지만.

‘그땐, 그 멍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지.’

처음 만난 날 이후, 우현은 종종 하루를 만나기 위해 그 동네를 찾아갔었다.

알고 보니, 버스를 타고 3정거장이나 떨어진 동네였다.

그곳에 간다고 하루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작정 찾아갈 때마다 항상 하루를 볼 수 있었다.

하루는 늘 동네를 돌아다니거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곤 했다.

마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우현도 마찬가지였기에, 종종 하루를 찾아가 함께 그네에 앉아 있거나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하루는 늘 긴 소매 옷과 바지를 입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야 쌀쌀한 날씨니까 그럴 수 있다 쳐도, 더운 여름이 되었는데도 긴 옷을 입은 하루가 이상해 보였다.

-안 더워?

우현이 물어보면 하루는 그저 웃기만 했다.

하루가 긴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언뜻 보이는 소매 안쪽 팔뚝에 거뭇한 멍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우현은 거의 1년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우현은 어렸기에, 부모가 자식에게 상처를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거대한 남자가 우악스럽게 하루를 잡아끌고, 주위에 우현밖에 없다는 걸 확인한 후 하루의 뒤통수를 세게 때렸을 때에야.

어린 소녀가 맞은 곳을 부여잡고, “아빠,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라고,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용서를 구할 때에야.

“하지 마세요!”

소녀를 지키려는 소년을, 그 거대한 남자가 노려보며, “남의 가족 일에 끼어드는 거 아냐.”라고 말했을 때에야.

우현은 가족이 가족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려서, 힘이 없어서, 작은 소녀를 지킬 수 없었다.

우현 또한 작았기에, 그 거대한 남자를 이길 수 없었다.

그제야 우현은 자신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지 깨달았다.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것도, 그 어린 소녀를 지키지 못한 것도, 전부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두야, 그거 알아?”

이제 성인이 되어 그 거대한 남자보다 더 커진 우현은, 연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루는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항상 웃었어. 그래서 나는 그 애가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 내가 제일 힘들고, 내가 제일 고통스러운 줄로만 알았거든.”

하루의 아버지를 보게 되기 전까지는, 밝게 웃을 수 있는 하루가 부럽다고 생각했었다.

분명 좋은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아무 문제 없는 소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부끄럽더라. 이렇게 어린데도, 나보다 작은데도,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웃는 하루를 보니까 참 부끄럽고…… 참 사랑스럽더라.”

그래서 지켜주고 싶었다.

언젠가 그 거대한 남자보다 더 커져서, 더 강한 권력을 갖게 되어서, 그 남자가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해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게 만들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난 약해빠진 놈이라서. 형편없는 놈이라서. 결국 내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어. 하루를 놔두고. 그때는 하루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

후에 정신을 차린 후 하루가 떠올라 다시 그 동네로 찾아갔을 때, 하루는 더 이상 그 동네에 보이지 않았다.

“이사를 한 건지, 집 밖에 나오지 못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날 수가 없었어. 내가 일일이 문을 두드리면서 알아봤다면 찾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어렸어. 그럴 용기도, 힘도 없었지.”

아니, 이건 핑계다.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우현은 자기 문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래서 하루를 놓고 말았다.

찾는 것을 멈추고 말았다.

언젠가 힘이 생기면 다시 찾겠다는, 부질없는 다짐을 했다.

“기적이야. 우리 회사에 하루가 입사를 한 건.”

정말이지, 기적이었다.

회사 복도에서 하루를 보는 순간, 그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어린 소녀일 때보다 훨씬 더 성숙해졌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늘 그녀가 어떻게 성장할지 상상해왔으니까.

어느 날엔가 그녀를 마주치게 되면 알아볼 수 있도록, 항상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으니까.

“나는 늘 그녀를 찾지 않을 핑계를 댔어.”

우현은 성인이 되었고, 어릴 때 보았던 하루의 아버지보다 덩치도 커졌고, 아마 하루의 아버지보다도 더 많은 돈을 갖게 되었지만, 하루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많은 돈이, 더 많은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서웠거든. 하루가 내 생각과 다르게 변했을까 봐. 하루의 곁에 소중한 사람이 있을까 봐. 그리고……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봐.”

우현은 쓰게 웃었다.

“하루는 날 기억하지 못하지만…… 괜찮더라. 그저 그 애를 다시 보게 된 게 좋아서, 그게 참 기뻐서, 다른 건 전부 아무래도 좋더라.”

후회되는 게 있다면, 더 빨리 찾아볼걸. 무섭다고 도망치지 말걸. 어떻게 변했어도 하루는 하루라는 걸 빨리 깨달을걸. 아니, 오래전 그때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손을 놓지 말걸.

그런 후회뿐.

몇 시간 전에 헤어졌는데도 하루가 보고 싶었다.

하루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우현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 하루의 이름을 불러온 후, 그 이름을 가만히 응시했다.

전화를 걸어도 될까?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네가 걱정이 되어서 전화를 걸었다고 말해도 될까?

그래도 하루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마음을 꽉 닫아버리지는 않을까?

우현은 휴대폰 위에 손가락을 얹은 채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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