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30화 (30/119)

#(30) 사랑을 받는다는 것.

재현은 순간,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주인공을 공감하지 못하는 제가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하루의 그 질문이 무엇을 겨냥한 건지, 재현은 알 수 있었다.

소설이 드라마가 된 후, 어느 신문기자의 인터뷰에서 재현은 이런 말을 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국 가족을 이해하고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결국은 묵은 감정을 정리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법이지요.

자신만만한 인터뷰였다.

자신의 말에 반박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란 그런 거니까.

부모 자식이란 그런 거니까.

실제로 많은 독자들이 재현의 말에 공감했고, 재현의 소설에 열광했다.

인터뷰를 한 기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요. 가족이라는 게 그렇죠.”라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하루의 표정과 눈빛을 보는 순간, 재현은 그렇지도 않다는 걸 깨달았다.

용서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재현의 귀에까지 닿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재현은 어리다면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에 작가로 데뷔를 한 후, 항상 칭송만 받아왔다.

물론 소설에 대한 악평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들 “질투하는 거야.”, “무시해.”라고 말했고, 재현 역시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하루가 하는 말은 질투도 아니었고, 무시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독자의 소리였다.

내 글이 모든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재현은,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을 품고 살아왔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당신의 글을 공감할 수 없다면, 나는 정상이 아닌가요?’라고 묻는 하루에게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물론 하루는 정상이었다.

이 자리에서 비정상인 것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내 글을 읽고 공감해야만 해.’라고 생각해왔던, 재현 자신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재현은 이제 자신이 입을 열 차례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안다고 한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내 소설을 보고 오히려 상처를 받은 하루에게, 무어라 말해줘야 하는 걸까?

“죄송합니다.”

재현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자신의 감정을 포장하지 않고 진실하게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끄럽네요.”

“예? 아니에요. 작가님 사과를 받으려던 게 아니라…….”

“네, 압니다. 하루 씨는 그저 하루 씨의 솔직한 감상을 말씀해주신 거죠. 그래서 저도 그 감상을 들은 기분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오만했습니다.”

재현은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하루와 눈을 맞췄다.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생각일 수는 없는데, 같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글이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릴 거라고, 제멋대로 판단했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하루 씨가 말한 부모에 대한 그 부분. 어린아이들에게 부모는 세상이자, 신이다, 라는 그 부분이요. 그것도 제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

“그래서 전 지금 몹시 부끄럽습니다. 창피하고요.”

“아니에요, 재현 씨. 그러지 마세요. 저는 그 소설에 공감할 수 없었을 뿐,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는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는걸요. 재현 씨의 소설이 저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어줬다고요. 집 나와서 혼자 살 때, 재현 씨 소설이 없었으면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어졌을 거예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열심히 말하는 하루의 모습이, 이런 와중에도 참으로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아아, 난 역시 이 여자가 좋아.’

라고, 재현은 생각했다.

글을 쓴 작가를 앞에 두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하루의 당당함이, 조곤조곤한 말투가 좋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재현의 모습에 당황해서 열심히 위로하려고 하는 하루의 배려도 좋았다.

처음 봤을 때는 이상형에 딱 부합하는 그녀의 외모에 반했다면, 이번에는 그녀의 성격에 반했다.

한 여자에게 두 번이나 반하는 경우도 있는 걸,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말을 하면 제가 정말 이상하게 보일 테지만, 그래도 말해야겠습니다.”

재현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하루를 똑바로 응시하며, 재현은 말했다.

“하루 씨. 저, 오늘 하루 씨에게 두 번째로 반했습니다.”

하루의 눈이 커졌다.

재현에게 그 말을 듣고서야, 지난번 만났을 때 재현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고 싶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하루는 애인이 있다는 말로,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재현의 요청을 거절했었다.

“하루 씨에게 애인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그 애인과 헤어지고 저랑 만나달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저…… 제 마음을 감추고 싶지가 않아서요. 처음으로 이상형을 만났는데, 그 이상형의 성격까지 딱 제가 원하는 타입일 경우가 많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하루 씨에게 제 마음을 알리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요. 게다가 조금은 내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고요.”

재현의 고백은 자신만만했다.

심심치 않게 고백을 들어온 하루였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쉽게 고백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쉽게 한 고백은 아닙니다, 하루 씨. 지금 제가 느끼는 이 감정,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감정인 것 같아서요. 정말로 하루 씨가 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전에 부딪쳐보고 싶습니다. 저 때문에 하루 씨가 애인과 불편한 관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저는 이 정도 거리에서 표현만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재현은 씩 웃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해사한지, 하루는 밀어붙이는 듯한 고백을 받았음에도 불편하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자신의 글에 대한 안 좋은 평가를 받은 후에도, 저토록 밝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재현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작가들은 자신의 글을 자식처럼 생각한다는데, 자식에 대한 모진 평가를 듣고서도 웃을 수 있는 재현은 프로 중의 프로였다.

그래서 하루는 재현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고, 그런 상대의 고백을 거짓말로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하루에게는 강우현이라는 애인이 있긴 했지만, ‘가짜 애인’이고 조만간 끝날 관계였다.

‘조만간 끝날 관계’라는 생각이 들자 또다시 우울해졌지만, 하루는 얼른 그 생각을 떨쳐냈다.

지금은 재현이 앞에 있으니까 재현에게 집중하자.

이곳에 없는 강우현 생각은 이제 그만 좀 하고.

“재현 씨, 저는요.”

하루는 재현과 눈을 맞췄다.

재현의 환한 미소를 보자 약해질 뻔한 마음을 단단히 붙들고 말했다.

“사랑을 하지 않아요. 아니, 하지 못해요.”

+++

재현과 먹을 햄버거를 사들고 돌아온 낙성은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멈췄다.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루가 왔나?’

낙성은 일이 없을 때 하루가 홀로서기 사무실을 찾아오는 이유는 우울하거나 고민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루는 내색하지 않지만, 오랫동안 알아온 만큼 하루의 밝은 표정에서도 그녀의 감춰진 기분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루 햄버거는 없는데 어쩌지? 난 세트 하나를 다 먹을 예정이었는데.’

하루의 몫을 걱정하며 다시 가게를 다녀와야 하나 고민하는데, 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 씨, 저 오늘 하루 씨에게 두 번째로 반했습니다.”

낙성은 지금 햄버거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나 느닷없는 고백 타임이라니.

‘두 번째라고? 하루랑 만난 적이 있나?’

재현이 하루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하루에게 호감을 갖는 남자들이 많이 있었다.

예쁜 외모도 외모지만, 씩씩하고 밝고 농담을 해도 잘 받아주는 성격이라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하루를 좋아했다.

문제는 그렇게 푹 빠진 남자들에 대한 하루의 대응이었다.

“재현 씨, 저는요. 사랑을 하지 않아요. 아니, 하지 못해요.”

재현의 길고 당당한 고백이 끝난 후, 하루는 낙성이 예상했던 대답을 했다.

낙성과 하루는 전공도 같았지만 동아리도 같았다.

그래서 동아리방에서 하루가 고백받는 순간을 목격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하루는 늘

“좋아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지금 아무도 사귀고 싶지 않아.”

라고 대답했지만, 하루와 유독 친하게 지냈던 남자가 고백했을 때는 이와 같은 반응이었다.

나는 사랑을 하지 못해.

사랑을 하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은 다르다.

사랑을 하지 못한다며 고백을 거절하던 하루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고백했다가 차인 것처럼 쓸쓸하고 슬퍼 보여서, 낙성은 무척이나 하루가 신경 쓰였었다.

“사랑을…… 하지 못한다고요?”

재현도 ‘못한다.’는 부분이 의아한 듯 물었다.

“네, 못해요. 저는…… 사랑을 모르겠어요, 재현 씨. 알고 싶지도 않고요. 무섭기도 하고요. 그냥 싫어요. 그걸 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하루의 음성은, 약 8년 전 동아리방에서 들었을 때처럼 절박하고 고통스러웠다.

역시 하루는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시간은 하루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애인이 있잖아요.”

재현의 지적에 하루는 말문이 막힌 듯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건 사정이 있어서요.”

“그 사정은 저에게 말해주기 힘들겠죠.”

“네.”

“그리고 하루 씨는, 애인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저 사랑을 하는 게 무섭고 싫은 거고요.”

“네, 그래요.”

“좋습니다. 아무 문제 없군요, 그럼.”

“예?”

재현의 담백한 결론에, 낙성도 하루와 마찬가지로 “예?” 하고 되물을 뻔 했다.

아무 문제가 없다니. 문제가 넘치고 넘치는구만.

“하루 씨. 저는 지금 하루 씨에게 절 사랑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딱 이 거리에서 하루 씨에게 제 마음을 표현만 할 겁니다. 그에 대해 하루 씨가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아도 돼요. 제가 제멋대로 하루 씨를 좋아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재현 씨가 절 좋아해서 하는 행동들에 제대로 대응해드리지 못하면 미안하잖아요.”

“아니요, 미안할 거 없습니다. 전 지금 최고의 기분이에요.”

“예?”

낙성도 하루처럼 되묻고 싶었다.

예? 재현 씨 지금 대차게 까였는데요?

“평생을 살면서 이상형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런데 전 이상형을 만났고, 이름도 알고,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진솔하게 대화도 나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제 이상형인 여자가 제 소설을 좋아해주기까지 하고요. 최고예요, 지금.”

그렇게 말하는 재현의 음성은 유쾌하기까지 했다.

“사람마다 무서운 것이 하나둘쯤 있는 게 당연하죠. 전 비행기를 무서워합니다. 어릴 때 비행기 사고를 다룬 소설을 하나 읽었는데, 그걸 보고 덜컥 겁에 질렸는지 비행기를 못 타겠더라고요. 그래서 해외를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무서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인데.

낙성은 의외라고 생각할 때, 사무실 안에서 하루도 낙성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비행기를 타게 될 날을.”

“꼭 타게 될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네, 그럴 날이 올 거예요. 물론 해외를 나가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는 있겠지만, 인생에서 해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을 놓치게 되는 건 아쉽잖아요.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인데.”

“하지만 재현 씨. 저는 못 해요. 못 하겠어요, 그런 거. 재현 씨는 언젠가 해외에 나가고 싶다는 열망이 있지만, 저는 없어요. 단 한 번도 사랑하는 걸 원한 적 없어요.”

“받는 거는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하루는 말문이 막혔다.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하루를 보며, 재현이 싱긋 웃었다.

“원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해보려고 애쓸 것도 없어요. 하루 씨는 그냥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쭉 살아가면 돼요.”

“그럼 재현 씨는…….”

“전 그냥 이 자리에서 하루 씨를 좋아할 거예요. 하루 씨가 무서운 건 사랑하는 거지, 사랑받는 게 아니잖아요.”

“…….”

“그러다가 언젠가 시간이 흘러, 제가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그 날이 오면. 그때 한 번 더 생각해봐요. 사랑을 받는 것이, 그리고 사랑을 하는 것이 하루 씨에게 여전히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인지에 대해서.”

+++

하루는 낙성이 사 온 햄버거를 먹는 동안, 재현에게 고백받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재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를 나눴다.

“야, 하루이틀사흘나흘. 넌 진짜 나한테 감사해야 해. 피 같은 감자튀김을 노나주는 거니까.”

“아예. 햄버거도 아니고 감자튀김을 노나주신 걸 가지고 최선을 다해 생색을 내는 선배의 태도를 보니, 낙성대가 왜 서울대에 밀리는지 알겠네요.”

“몇 번을 말해야 해! 낙성대는 대학이 아니라고!”

티격태격하는 하루와 낙성의 모습을 보며, 재현은 생각에 잠겼다.

‘사랑을 못 한다고?’

그 말을 하는 하루는 무척이나 절박하고 괴로워 보였다.

고백을 거절하기 위해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내 소설에서 주인공을 공감할 수 없다고도 했지.’

그 말을 할 때와 사랑을 못 한다고 말할 때의 하루의 표정은 비슷했다.

‘어떤 삶을 살아온 거지?’

낙성과 말다툼을 하는 하루의 모습에선 어둠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가족과 용서와 사랑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던 여인과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하루 씨. 당신은 대체 그 미소 뒤에 뭘 감추고 있는 거지?’

재현은 하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다.

하루의 과거에 어둠이 있다면, 그 어둠을 자신이 걷어 내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가족과 용서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하루가 더는 고통스러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감자튀김 다섯 개를 한꺼번에 입에 밀어 넣다가, 뺏으려는 낙성을 피해 요리조리 움직이는 하루를 보며, 재현은 생각했다.

‘내가 한 말들의 의도가, 하루 씨에게 잘 전해졌을까? 나는 제대로 잘 이야기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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