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제정신인가?
하루에 대해 알아내는 건, 희정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희정은 항상 그렇게 쉽게 세상을 살아왔다.
하지만 하루를 기다리다가 저 멀리서 오는 하루를 발견했을 때, 희정은 처음으로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심히 길을 걸어오다가 느닷없이 “아하하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린 하루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정신이 나간 사람을 상대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에게 밀릴 생각은 없기에, 희정은 표정을 가다듬고 하루에게 다가갔다.
“이하루 씨?”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희정은 하루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멀리서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예쁘게도 생겼다.
‘짜증나! 예쁘긴 뭐가 예뻐? 내가 훨씬 낫지!’
희정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황급히 지우고, 그 여느 때보다도 도도하게 말했다.
“난 조희정이라고 해요. 강우현 씨 문제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
희정은 우현의 이름을 꺼냈을 때 하루가 어떻게 반응할지,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하고 온 터였다.
당황하거나, 기분 나빠하거나, 의아해하거나, 궁금해하거나…….
아무튼 여러 가지 반응을 떠올리며, 그에 대한 대책도 마련했다.
하지만 하루는 희정이 예상한 그 어떤 반응에도 들어맞지 않는 행동을 보였다.
무표정하게 희정을 쳐다보다가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 빌라를 향해 걸음을 옮긴 것이다.
낯선, 그리고 예쁘기까지 한 여자에게서 자기와 사귀는 남자의 이름이 나오면 당황하고 기분 나빠 해야 당연한 일이다.
적어도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궁금해하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하루는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고 빌라로 들어가 버렸다.
생각지 못한 하루의 행동에 희정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른 하루를 따라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는 엘리베이터가 있는데도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희정은 서둘러 하루를 따라잡았다.
“이런 구질구질한 곳에서도 사람이 살긴 하나 보네요.”
하루의 속을 긁으려고 한 말인데,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흘긋 그녀의 표정을 살펴봤지만, 여전히 무표정했다.
‘뭐가 어떻게 된 애야, 얘는? 귀가 안 들리나?’
“저기요, 이하루 씨? 나, 지금 강우현 문제로 이하루 씨랑 얘기하러 왔다니까요.”
“…….”
“야! 이하루! 너, 내 말 안 들려?”
희정은 버럭 성질을 냈다가 곧 후회했다.
이러면 안 되지. 고고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해야 해.
너 따위 여자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위치에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희정이 짜증을 내리누르는 동안 둘은 3층에 도착했다.
하루는 어느새 집 문 앞에 서서 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희정은 초조해졌다.
이 몸이 오늘 직접 행차해서 2시간을 기다렸는데, 이러다가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돌아가게 될 것 같다.
그래서 희정은 하루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할 얘기를 끝내기로 했다.
“지금 우현이 오빠랑 사귀고 있죠? 그것 때문에 충고 하나 해주려고요. 우현이 오빠, 그쪽 안 사랑해요. 우현이 오빠가 사랑하는 여자는 나뿐이에요.”
그제야 하루가 반응을 보였다.
하루는 문을 열다가 멈추고 커진 눈으로 희정을 돌아봤다.
희정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지만, 표정은 여전히 도도하게 유지한 채로 말했다.
“내가 우현이 오빠를 찼어요. 우현이 오빠, 아마 외로워서 아무 여자라도 곁에 놔두고 싶었을 거예요. 내가 있던 공백을 채우고 싶었을 테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하루 씨가 나와 우현이 오빠 사이의 기 싸움 때문에 상처받을까 봐…….”
거기까지 말하고, 희정은 말을 멈췄다.
왜인지 하루가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를 내거나 기분 나빠야 당연한 상황에서 웃고 있는 하루를 보니, 오싹 소름이 끼쳤다.
‘뭐, 뭐야, 이 여자?’
희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루가 그런 희정을 향해 한 걸음 다가오는 바람에, 희정은 하마터면 휙 돌아서서 줄행랑을 칠 뻔했다.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희정의 앞으로 온 하루가, 두 손으로 희정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어서. 어서 더 말씀해보세요. 자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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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의 입에서 ‘강우현 씨의 일로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하루는 희정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무슨 얘기를 하러 온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타인의 집에 연락도 없이 방문하는 무례한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인간들을 상대해봐야, 얻는 건 피곤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희정이 ‘우현이 오빠가 사랑하는 여자는 나뿐이에요.’라는 말과 함께 ‘내가 우현이 오빠를 찼어요.’라는 말을 했을 때, 조희정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깨달았다.
홀로서기를 이용해서 우현을 찬, 첫 번째 여자.
그걸 떠올리는 순간 하루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전에 우현은 늘 사랑을 하고 있다고 했고, 어쩌면 그 상대가 희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정의 말대로 그녀에게 차인 후, 홧김에, 혹은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아무 여자나 사귀는 바람에 그렇게 여러 번 차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루와의 계약연애 또한 희정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방편이리라.
모든 것이 착착 들어맞았다.
그렇다면 희정을 통해 계약기간보다 빨리 이 연애를 끝낼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우현이 필요 이상으로 하루에게 잘 대해주었던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쩌면 조희정 씨한테 차이고 나서 성격을 바꿔보려고 연습을 하는 걸지도 몰라. 조희정 씨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들을 나한테 해주는 걸 거야. 재회하게 되면, 그때는 실패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생각하니, 그저 계약연애일 뿐인데도 마치 실제 연애처럼 우현이 잘해주는 이유가 납득이 됐다.
이 여자다.
그때 우현이 말한 ‘늘 사랑하고 있어.’의 주인공은.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당당하게 찾아와서,
“우현이 오빠가 사랑하는 여자는 나뿐이에요.”
따위의 말을 할 리 없다.
‘이렇게 되면 내 친구들을 소개시켜줄 것도 없겠네. 강우현 씨 입장에서도 괜히 1년씩 계약연애를 끌어가면서 나한테 돈 주느니, 사랑하는 여자랑 재회하는 편이 훨씬 좋을 거고. 그래, 나는 이제부터 이별 전문가가 아니라 사랑의 큐피트가 되는 거야.’
하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하루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희정은, 지금의 미소와 아까 하루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던 일이 겹쳐져서 오싹했다.
자기 애인이 딴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응당 보여야 하는 반응을, 하루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찾아왔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날 겁주려고?’
희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루를 노려봤지만 하루의 미소 띤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아,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편하게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어서 들어오세요.”
하루가 현관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저렇게 위기의식이 없어도 되나 싶은 한편, 안에 하루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생겼다.
하루가 혼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왔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희정은 현관문 안쪽을 슬쩍 들여다봤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내부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하지만 저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몸을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다른 때였다면 이런 공포 따위 느끼지 않았을 희정이지만, 지금 하루가 보여주는 엉뚱한 행동이 희정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냥 여기서 얘기하죠. 좁고 냄새나는 집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까.”
자존심을 긁기 위해 한 말인데, 하루는 별로 상처받은 것 같지 않았다.
“아, 그러세요? 다리 아프실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건데…… 딱 보니까 고객, 아니, 조희정 씨. 굉장히 곱게 자라신 분인 것 같거든요. 온실 속의 화초처럼.”
희정이 29년을 살아오면서 알게 된 게 있다면, 흙수저가 금수저를 향해 말하는 ‘온실 속의 화초’는 칭찬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하루의 말에는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얜 대체 어떻게 된 애야?’
희정은 잠시 그냥 돌아갈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하루가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인물이라고 해서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맞아요. 이하루 씨 말대로 나, 굉장히 곱게 자랐어요. 흔히들 말하는 금수저라고 하죠. 이하루 씨 같은 흙수저는 감히 말도 걸 수 없는 위치에 있어요, 나.”
“아, 그러시구나. 그럴 것 같았어요. 역시.”
하루가 깊은 공감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아닌데……. 얘는 자존심도 없나?’
“우리 집 화장실도 이렇게 구질구질하지 않아요. 그래서 난 지금 충격을 받는 중이에요. 어떻게 강우현 같은 사람이, 아무리 나한테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이런 집구석에 사는 여자와 연애하는 척을 하는지.”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놀랍다니까요.”
“이하루 씨, 우리 우현이 오빠랑 아주 안 어울려요. 외모부터 집안까지, 전부 다.”
“네, 맞아요. 아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희정은 입을 다물었다.
하루가 반박을 할 경우만 생각을 해왔지, 이렇게 깊은 공감을 해줄 경우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하루가 ‘그래도 우현 씨는 날 사랑해요!’라고 외치면, 돈다발을 던지며 ‘이거 먹고 떨어져요.’라고 해줄 생각이었다.
‘아, 진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럴 땐?’
희정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하루의 예쁜 얼굴을 노려봤다.
‘얘,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아닌 척하면서 날 놀리고 있는 거 아냐?’
하지만 하루의 눈동자는 아주 진실되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희정이 무슨 말을 할지 아주 기대된다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보자, 어쩐지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들었으면 헤어져요. 당신, 우리 우현 오빠랑 조금도 안 어울려.”
“맞아요. 저도 그렇게는 생각하는데…… 헤어질 수는 없어요.”
하루가 힘없이 덧붙인 말에, 희정이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드디어 나왔다.
헤어질 수는 없어요, 발언.
‘그럼 이제 준비해온 돈을…….’
꺼내려는데, 하루가 덧붙였다.
“조희정 씨는 아주 예쁘시고 세련되고 집안도 좋으시니까, 확실히 강우현 씨 곁에 있으면 그림이 될 거예요.”
하루의 칭찬에, 희정은 백으로 향하던 손을 멈췄다.
“저도 그 부분은 아주 잘 알고 있고, 조희정 씨와 강우현 씨가 운명적인 사랑을 평생 함께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정말로요.”
“……이하루 씨, 지금 우리 우현이 오빠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요. 하지만…….”
하루는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무튼 저는 조희정 씨 편이에요.”
“그럼 헤어지라니까요.”
“그게 안 돼요.”
“왜요?”
“그럴 일이 좀…….”
“설마…… 우현이 오빠한테서 돈 뜯어내려고 그래요? 한몫 잡으려고?”
“아…… 그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꼭 그런 건 아닌데, 약간은 비스무리하기도 하고…… 하지만 이건 아셔야 해요. 제 의지가 아니에요.”
희정은 하루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얘, 진짜로 정신에 문제 있는 거 아냐?’
희정은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
일일이 반박을 해봐야 도돌이표처럼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았다.
희정은 얼른 대화를 끝내고 이 구질구질한 건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약간 맛이 간 것 같은 하루를 상대하는 것도 지겨웠다.
“그래서 이하루 씨가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응원할게요.”
“뭐라고요? 고작 응원?”
“물론 제 도움을 요청하시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선에서 힘껏 도와드릴게요.”
“나 참, 그게 무슨…….”
거기까지 말하고 희정은 입을 다물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도움이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어. 이 여자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 힘을 다해 희정을 도와주겠다는 듯,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얘는 그냥 우현이 오빠한테서 돈 좀 뜯어내려고 옆에 있는 건가? 그런 거라면…… 뭐, 당분간 그냥 두고 도움을 받아도 상관없겠지?’
희정은 살짝 턱을 들어 올리고 하루를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말했다.
“좋아요. 이하루 씨의 말을 믿어보죠. 조만간 연락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