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크리스마스는 당신과 함께
우현은 개발지원본부 사무실에 찾아오지 않았지만, 매일 점심 직원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우현이 직원식당에 들어올 때마다 눈에 띌 정도로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루의 얼굴이 보이는 자리에 앉은 우현의 존재가, 하루는 어느새 익숙해졌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은 그렇지도 않은지, 긴장한 표정으로 우현을 흘끗흘끗 돌아보곤 했다.
밥을 먹다가 시선을 들면 가끔씩 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이 말한 대로 ‘저 남자, 진짜로 날 좋아하나?’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황급히 지워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현이 하루를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강 팀장님, 널 노려보고 있는데?”
같이 식사를 하던 나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이 눈에는 노려보는 것으로 보이나 보다.
듣고 보니 정말로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네가 자기 제안을 안 받아들여서 화난 거 아냐?”
우현이 개발지원본부 사무실에 찾아오지 않은 덕분에, 개발지원본부 직원들은 우현이 하루를 스카우트하려고 했고, 하루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게요.”
하루는 미지근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내리고 국물을 한 숟가락 떠올렸다.
“몸조심해, 하 대리. 저 인간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하하하하.”
그 말에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회사에서 어떻게 행동을 하기에, 이렇게까지 평가가 형편없을 수 있는 걸까?
“이제 곧 크리스마스네.”
밥을 다 먹고 식당을 나가며 나희가 말했다.
“그러게요. 시간 진짜 빨라요.”
“그러니까. 나이가 들수록 시간 가는 게 더 빨라지는 것 같아. 하루는 진짜 안 가는데, 일주일은 금방 가고, 일 년은 더 금방 가고.”
“맞아요.”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설레고 그랬는데, 요샌 그런 것도 없네. 하 대리는 크리스마스 때 누구 만나?”
나희의 질문을 듣자, 얼마 전 우현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우리가 데이트하는 날은 아니지만, 그래도 데이트를 했으면 좋겠군. 연인의 날이니까.
-그럼 추가수당 주시나요?
장난삼아 던진 질문이었는데, 우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었어요, 강우현 씨. 크리스마스이브 정도는 제가 서비스로 만나드릴게요.
대수롭지 않게 던진 그 말에, 우현이 그렇게 활짝 미소를 지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의 환한 미소 때문에 이 심장이 두근거릴지도 몰랐고.
연인의 날이라고 해서 계약한 날짜도 아닌데 굳이 우현을 만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순순히 그러자고 한 이유는.
‘즐거워.’
우현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처음에는 그저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날이 갈수록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편안하고 좋았다.
그는 언제나 하루를 배려하고, 하루가 장난을 치면 잘 받아주고, 때때로 본인이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이제는 ‘연두’가 된 골든래트리버를 데리고 함께 산책하는 것도, 그의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는 것도, 더는 어색하고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대단한 연기력을 발휘하여 간질거리는 대사를 칠 때는 긴장하게 되지만, 그것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견딜 만했다.
‘이래도 되나? 계약기간 끝나면 종료될 관계인데,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와 만나면 만날수록 익숙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에이, 뭐. 그때 가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 대리?”
나희의 부름에, 하루는 자신이 나희와 대화하는 중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요새 이상하게도 우현을 생각하다 보면, 뭘 하고 있었는지 깜빡깜빡 잊게 된다.
“아, 전 크리스마스 때 친구들이랑 같이 보낼 것 같아요.”
하루는 거짓말을 했다.
“그래? 애인은? 아직도 애인 없는 거야?”
“네, 뭐. 절 좋다는 사람이 없네요.”
“없긴. 우리 부서에만 해도 하 대리한테 관심 보인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 대리가 철벽 친 거잖아.”
“아하하.”
“진짜 눈 높은가 봐.”
“에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마음이 맞는 사람이 없어서요.”
회사 사람들에게는 ‘연애는 절대로 안 할 거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 회사에서도 하루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이 몇 명 있었고, 그럴 때마다 하루는
“전 연애에 관심 없습니다. 연애할 일 없을 거예요.”
라고 거절하곤 했다.
그랬더니 다들 하루에게 연애의 즐거움과 연애가 가져다주는 기쁨 등을 설명하고 받아들이게 하려고 애썼다.
그들이 하루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원치 않는 친절은 부담이 될 뿐이었다.
그래서 이번 회사에서는 ‘만나고 싶긴 한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요.’라는 입장을 고수하기로 했다.
“장 대리님은 크리스마스 때 뭐 하세요?”
“나는 남친 만날 것 같아.”
“아, 대리님은 애인 있으셨지.”
“그렇긴 한데 요새 좀 그냥 그래. 너무 오래 사귀었나.”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했죠?”
“5년 됐지, 아마? 거의 가족이야, 가족.”
“가족 같으면 더 좋은 거 아니에요?”
“그거야 결혼한 다음의 이야기고, 연애할 때부터 너무 가족 같으면 좀…… 뭐라고 해야 하나. 내 젊음을 낭비하는 느낌?”
하루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나희가 느끼는 기분이 어떤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만약에 헤어지게 되면 하 대리 네 홀로서기를 이용할게.”
“에이, 그러지 마세요. 그래도 이별은 제대로 얼굴 맞대고 하는 게 제일 좋죠.”
“하 대리, 영업 못 하네. 이럴 땐 반드시 이용해주십시오, 고객님. 그렇게 말해야지.”
나희의 장난스러운 말에 하루는 웃었다.
나희가 말은 이렇게 해도 그녀의 성격에 홀로서기를 이용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우현은 즐거운 기분으로 사무실에 돌아왔다.
우현에게 자제력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있든, 말든 흥얼거렸을 것이다.
점심시간에 하루를 보는 건, 우현의 하루 중 가장 특별한 시간이었다.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는 그녀의 모습은 토끼 같아서 귀여웠다.
뭔들 안 귀여울까.
잠깐이기는 해도 매일 하루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기분 좋게 오후 근무를 시작하려던 우현은 휴대폰에 메시지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강 회장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끝나고 본가에 좀 들러주겠니?]
어디에서나 명령조를 사용하는 강 회장이지만, 우현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다른 손자 손녀들이 질투할 정도로, 강 회장은 우현에게만 상냥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강 회장이 우현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우현은 강 회장이 왜 유독 우현에게 약한지 알고 있었다.
강 회장은 언제나 우현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걸 알지만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 강 회장이 딱 하나만큼은 우현의 뜻대로 해주지 않았다.
세정 그룹의 재산 중 일부라도 받기 위해서는 연애를 해라. 결혼까지 하면 더 좋고.
다른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에게는 그런 조건을 걸지 않았으면서, 유독 우현에게만 그 조건을 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재산과 연애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재산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현에게는 권력과 돈이 필요했다.
적어도 한 남자를 완전히 무릎 꿇게 만들 정도의 권력.
그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강 회장이 원하는 대로 해준 다음 재산의 일부를 물려받는 것이었다.
이 세상은 돈이 곧 권력이니까.
물론 지금도 강 회장의 이름을 등에 업으면 그 남자를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우현은 그 남자만큼은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굴복시키고 싶었다.
그 남자가 무릎 꿇고 후회하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하루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루가 보고 싶어 하는 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권력을 얻은 후 하루에게 직접 물어보면 된다.
[알겠습니다. 일 끝나는 대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우현은 강 회장을 만나고 싶지 않음에도, 순순히 답장을 보냈다.
+++
“여긴가?”
재현은 당산역 근처의 허름한 빌딩 6층에 있는 문을 응시했다.
평범한 가정집으로 보이는 현관문으로, 문패도 없었다.
“아닌가?”
재현은 ‘홀로서기’의 사무실을 찾아온 터였다.
홀로서기의 주소는 진작 알았지만, 찾아가도 될지 한참을 망설였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것보다는 좀 더 우연히, 혹은 멋지게 하루와 재회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궁리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하루와의 접점이 하나도 없었다.
홀로서기뿐이었다.
‘어차피 홀로서기를 인터뷰하고 싶기도 했고…… 인터뷰하는 김에 여기서 일을 같이 해볼 수도 있으면 더 좋고…….’
재현은 그렇게 변명했다.
원래 재현은 글을 쓰기 전에 준비 작업을 철저히 하는 편이라서, 잘 모르는 직업이 있을 경우에는 직접 그 일에 뛰어들어 경험해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난 이하루 씨를 스토킹하는 게 아냐. 내 글을 위해, 경험을 하려고 온 거지.’
실제로 재현은 하루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홀로서기 사무실을 방문해서 몇 주 정도 일을 해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루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게 되는 바람에,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재현은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처음에는 응답이 없었다.
‘아무도 없나?’
한 번 더 두드렸더니, 이번에는 응답이 있었다.
“네, 누구십니까?”
한 남자가 대답과 동시에 현관문을 열었다.
성격이 좋아 보이는 남자였기에, 재현은 내심 안심했다.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재현을 올려다봤다.
재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현에게 호감을 품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재현이라고 합니다. 이런 필명으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고요.”
+++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동네방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했었다.
가로수는 빛이 나는 옷을 입어 반짝거리고, 가게의 열린 문에서는 캐롤이 흘러나왔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 산타에게 어떤 선물을 받을지에 대해 떠들어댔고, 산타가 부모님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주는 척하곤 했다.
하지만 하루는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에 설렌 적이 없었다.
오히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설레는 표정으로 선물에 대해 얘기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들으면 부러워지고, 부러워지면 눈물이 나니까.
퇴근 후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며, 하루는 아무 장식도 없는 가로수를 올려다봤다.
불경기라 그런지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전혀 풍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하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크리스마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 데이트를 하면…… 뭘 해야 하는 거지? 일단 선물을 주고받기는 해야 할 텐데. 우리는 가짜 연인인데도 선물을 주고받아야 하나? 아니, 데이트하는 날에는 진짜 연인이 되는 거니까, 강우현 씨는 선물을 준비하겠지? 그럼 나도 준비해야겠네.’
누군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 위해 고민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뭘 줘야 하지? 도경이 빼고는 남자한테 선물을 해본 적이 없는데.’
도경의 선물을 사는 건 쉬웠다.
도경은 운동화를 좋아해서, 생일선물은 항상 운동화로 통일이었다.
하지만 우현에게 운동화를 사줄 수는 없었다.
늘 정장이나 세미정장만 입는 우현이 운동화를 신는 모습이 상상되질 않았다.
‘그 남자, 설마 엄청 비싼 선물을 준비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가격을 비슷하게 맞춰야 할 텐데…… 내일 데이트하는 날이니까 얘기해볼까? 선물 금액 비슷하게 맞추자고.’
하지만 자고로 선물이란 의외성이 있어야 하는 건데, 미리 선물 가격을 맞추면 그 의미가 덜할 것 같았다.
‘아니면…… 이벤트 같은 걸 해줘야 하나? 크리스마스 이벤트라면…….’
문득 언젠가 인터넷에서 남자친구를 위해 섹시한 산타 옷을 입고 이벤트를 해줬다는 글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루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하하!”
‘내가 미쳤지. 그 남자한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이유가 없잖아. 이유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으아, 소름.’
그래도 궁금했다.
만약 하루가 그런 옷을 입고 등장하면, 우현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옷을 입고 등장해도, ‘성적접촉은 이마에 뽀뽀 정도로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 쓸데없는 생각 그만둬. 그 남자랑 나는 진짜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게 입어봐야 민폐야, 민폐. 그 남자도 엄청 어이없어할걸.’
하루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을 때,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는 어느새 집 근처에 도착했는데, 그 여자는 하루가 사는 빌라 앞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날 왜 저렇게 보는 거지?’
하루의 궁금증은 곧 풀렸다.
여자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우더니 오만하게 턱을 살짝 치켜들고 하루를 향해 걸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예쁘장한 여자였다.
작은 얼굴과 잘 어울리는 세련된 단발머리에, 값비싸 보이는 코트를 입은 여자는 하루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이하루 씨?”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여자의 얼굴을 살펴봤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이하루라는 사실을 고백하기엔 세상이 너무 흉흉했다.
하루가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난 조희정이라고 해요.”
조희정.
‘이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할 때, 희정이 말했다.
“강우현 씨 문제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