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당신을 만지고 싶어.
멍하니 우현의 얼굴을 응시하던 낙성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휙, 하루를 돌아봤다.
저런 끝내주는 외모의 남자가 저런 말을 하는데도 담담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없을 텐데, 하루의 표정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이구, 저 철벽녀 같으니.’
물론 하루와 우현이 ‘계약연애’를 하는 중이라는 건, 낙성도 알고 있었다.
하루가 남자를 사귀지 않고, 이상할 정도로 연애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 또한 알았다.
‘하지만 저 남자는…… 너무 심각하게 잘생겼잖아!’
우현은 그동안 하루의 주위를 맴돌며 추파를 던지던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른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평생 손을 잡고 어디든, 언제든 걸어가겠다.’고 말하는데, 아무리 계약연애라도 조금쯤은 얼굴을 붉힐 법도 하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같은 남자로서 우현을 지켜본 결과, 아무리 봐도 우현은 연기를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만약 저게 연기라면, 저 남자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배우다.
낙성까지 설레게 하는 우현의 말을 들은 하루는, 낙성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여간 저 남자는 연기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하마터면 또 속아서 두근거릴 뻔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얼굴까지 빨개졌으리라.
‘우리 계약연애가 1년짜리인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낙성 선배까지 다 아는데 평생이라니.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진짜 대단해.’
말 몇 마디로 낙성을 설레게 만든 우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주제로 돌아갔다.
“홀로서기를 쭉 운영할 거라면 초반에는 수익이 좀 떨어지더라도 방향성을 제대로 잡고 재정비한 후 다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말이 정답은 아니니, 대표님께서 고려해보고 더 나은 쪽으로 끌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늘 자칭 대표였던 낙성은 ‘대표님’이라는 호칭에 무척이나 감동받은 듯했다.
“그럼요. 대표인 제가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홀로서기를 위해 신경 많이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여자친구가 몸담고 있는 회사인데 당연하지요.”
여자친구.
우현이 하는 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있었지만, ‘여자친구’라는 단어는 조금 타격이 있었다.
헤어지는 일 없을 거다, 평생 손을 잡고 걸어갈 거다, 그런 말들보다 ‘여자친구’라는 단어가 더 설렜다.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 명칭이, 마치 ‘계약연애’를 하는 ‘계약애인’이 아닌 진짜 여자친구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루는 당황할 때면 늘 그랬듯 토끼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마무리된 후, 하루와 우현은 낙성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주차장은 지하 2층인데, 하루는 무심코 지하 1층의 버튼을 눌렀다.
홀로서기 사무실에 왔다가 은서와 미영이 운영하는 [하루살이]의 사무실에 들르곤 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취소하려 했지만, 오래된 엘리베이터라 취소가 불가능했다.
‘에이, 뭐. 마주치진 않겠지.’
하루는 지하 2층의 버튼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웅웅 소리를 내며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우현은 하루의 바로 옆에서 정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보며,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하루는 그와 함께 있을 때, 그의 연기력이 대단하다거나, 마성의 남자라거나, 그에 대해 파악하기 힘들다거나, 계약을 얼른 끝내기 위해 좋은 여자를 찾아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고, 이제야 그 부분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기 위해 입을 열려 할 때,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서 멈추고 문이 열렸다.
하루는 입을 벌리려던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엘리베이터 문밖에, 은서와 미영이 서 있었던 것이다.
밥 먹으러 가는 길인지 휴대폰만 달랑 들고 나온 두 친구는, 하루를 향해 인사를 하려다가 옆에 서 있는 우현을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친구의 벌어진 입술이,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려주었다.
두 친구는 얼어붙은 듯 크게 뜬 눈으로 우현을 쳐다봤고, 그러는 동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아는 사람들인가?”
우현이 물었다.
“네? 아, 네. 친구들이에요.”
하루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물론 친구들이 우현을 목격한 게 큰일은 아니었다.
은서와 미영은 하루가 계약연애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언젠가 한 번쯤은 우현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마주치는 바람에 당황했을 뿐이었다.
“친구들이 여기에 사나?”
“아뇨. 여기에 쟤들이 운영하는 쇼핑몰 사무실이 있거든요. 이 건물이 낙성 선배 건물이라서요.”
“아, 그렇군. 쇼핑몰은 인터넷 쇼핑몰?”
“네.”
“쇼핑몰 이름이 뭐지?”
“하루살이라고…….”
거기까지 말하고, 하루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 남자가 내 친구들에 대해 왜 이렇게 자세하게 물어보는 거지? 혹시…… 은서나 미영이 중에 자기 타입인 애가 있었던 건가?’
다음 질문은 하루의 생각에 쐐기를 박았다.
“언제 한 번 친구들 좀 소개시켜줬으면 좋겠군.”
‘웬일이야!’
하루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진짜 내 친구들한테 관심 있나 봐. 누가 이 남자 스타일인 거지? 은서? 미영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은서든, 미영이든 예쁘고 성격도 좋고, 우현이 못되게 군다고 해도 지지 않을 성격들이었다.
“네, 좋아요. 언제 시간 맞춰 봐요.”
우현의 생각이 바뀔까 봐 하루가 얼른 대답했다.
친구를 마왕의 제물로 바치는 것 같아 죄책감이 조금 들기는 했지만, 우현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계약연애 중인 나한테도 이렇게 잘해주는데, 진짜 마음에 들어서 사귀는 여자한테는 더 잘해줄 거야.’
하루가 친구들과의 만남이 언제가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우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1년이 지나면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헤어지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우현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1년 후, 하루가 싫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연애를 지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하루의 인생에서 쉽게 떠나보낼 수 있는 존재로 남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자면 하루와 친한 주변인들을 공략하는 게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마음에 품은 채, 둘은 하루의 집 앞에 도착했다.
하루가 내리자, 우현도 내렸다.
우현이 차를 빙 돌아와 하루의 앞에 섰다.
하루는 고개를 바짝 들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보는 그의 얼굴에는 밝을 때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좀 더 어둡고 위험할 것 같은, 색정적인 향기를 풍기는 매력.
그림자로 굴곡진 그의 피부가 무척이나 매끄러워 보여서, 하루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질 뻔했다.
손이 반쯤 올라왔을 때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멈췄는데, 우현이 그것을 본 듯 하루의 손목을 잡았다.
마치 하루가 쉽게 깨지는 유리 장식품이라도 된다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하루는 괜히 콧등이 시큰거렸다.
아무래도 밤이라서 감정적이 된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하루의 귀에, 우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멈추지 마.”
“네?”
“하려던 거 계속해도 되는데.”
“제, 제가 뭘 하려고 했는데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하는 하루를 보며, 우현이 싱긋 웃었다.
그는 하루의 손목을 그대로 올리더니, 하루의 손바닥에 자신의 볼을 갖다 댔다.
하루는 움찔했지만 일부러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의 볼은 예상대로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손바닥에 닿는 온기가 좋았다.
겨울밤의 바람이 차가워서, 그 온기가 유독 생생하게 전해졌다.
홀린 듯 그의 볼을 쓰다듬던 하루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내가 지금 뭔 짓을 하는 거야? 이 남자가 강아지도 아니고!’
귀엽다, 귀엽다 생각하다 보니, 정말로 강아지로 여기게 된 모양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이 남자의 무시무시한 매력에 홀리지 않도록.
하루가 움직임을 멈추자, 눈을 가늘게 뜨고 하루의 손길을 즐기던 우현이 왜 그러냐는 듯 눈짓을 보냈다.
“이제 다 했어요.”
“벌써? 아쉬운데.”
하루는 저 말이 진심인지, 연기인지 궁금했지만, 곧 연기일 거라고 결론지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어요. 제 손길은 굉장히 비싸거든요.”
“그렇군. 내 손길은 그다지 비싸지 않은데, 이하루 씨를 만져도 되나?”
“예?”
“나도 이하루 씨를 만지고 싶어.”
만지고 싶어.
만지고 싶어.
그 말이 귓가에 웅웅 울렸다.
우현은 같은 말을 해도 야하게 들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 말을 도경이나 낙성이 했어도 이렇게까지 야하게 들렸을까?
그렇지 않을 거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하루가 고민하느라 대답하지 못한 걸, 허락으로 생각한 듯 우현의 손이 하루의 볼로 다가왔다.
하루는 피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도 이 남자의 볼을 만졌으니, 이 남자에게도 내 볼을 만질 권리가 있다.
나는 되고, 너는 안 돼, 라는 내로남불의 태도를 보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하루의 긴장을 눈치챈 듯, 우현은 하루의 볼 바로 옆에서 손을 멈췄다.
머뭇거리던 손이 하루의 볼 대신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우현은 이마 옆으로 흘러내려 아까부터 하루의 볼을 간질이던 머리카락을, 살며시 하루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섬세한 움직임이 볼을 쓰다듬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엄지로 하루의 관자놀이 부근을 살짝 쓰다듬은 그가, 하루의 양쪽 어깨를 잡고 시선을 맞췄다.
“이하루 씨.”
“예?”
관자놀이에 아주 잠깐 닿은 그의 손길에 정신을 못 차리던 하루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우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하루 씨가 싫어할 짓은 절대로 안 해. 이하루 씨가 원치 않는 짓도 절대 안 하고. 그러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지금 이 계약연애 자체가 내가 싫어할 짓이거든요!’
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를, 하루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진지하고 상냥한 눈빛이 너무 다정해서, 이런 눈빛을 가졌던 한 사내가 떠올라서, 울컥 터져 나올 뻔한 울음을 삼킬 뿐이었다.
+++
씻고 나온 하루는 컴퓨터 앞에 앉아, 향후 홀로서기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컴퓨터가 채 켜지기도 전.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누군가 방문하기에는 굉장히 늦은 시간이기에, 하루는 인상을 찌푸리고 현관문을 노려봤다.
‘이런 시간에 누구지? 술 취해서 집 잘못 찾은 사람인가?’
혼자 자취를 하는 사람들이 위험한 일을 당하는 기사가 많이 뜨기에, 하루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문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하루. 있는 거 알고 왔다. 문 열어.”
미영의 목소리였다.
하루는 안도하며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일도 있고 해서, 은서와 미영이 함께 왔으리라는 건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의 뒤에 귀찮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도경의 존재는 의외였다.
“도경이는 어쩐 일이야?”
“몰라. 얘들이 갑자기 회사에 와서 난동을 부렸어. 무서워 죽겠다.”
“우리가 언제 난동을 부렸다고 그래? 정중하게 함께 움직이자고 부탁했지.”
은서의 반박에 도경이 자신의 팔뚝을 내밀었다.
도경의 팔뚝에는 빨갛게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그렇게 정중해서, 싫다고 했더니 이렇게 때렸냐?”
“몸도 좋은 놈이 살짝 맞은 것 가지고 엄살 좀 피우지 마.”
“살짝이라니. 네가 이 악물고 온 힘을 다해서 때리는 거, 내가 분명히 봤거든.”
“무슨 소리야. 살짝 쓰다듬은 거지. 얘 팔뚝, 참 굵다, 하면서.”
“어우, 진짜 무서워 죽겠어. 하루야, 난 얘들이 제일 무서워.”
도경이 우는 소리를 하며 은서와 미영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 어쩐 일이야?”
어쩐 일로 찾아온 건지는 알지만, 혹시나 싶어서 물었더니 미영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어쩐 일이냐니! 몰라서 물어?”
은서가 하루에게 바짝 다가서서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낱낱이 고해바쳐라. 그 남자, 누구야? 뭘 먹고 살기에,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잘생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