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어디든, 언제든.
목이 간질거리는 이유는, 그의 시선 때문이었다.
둘은 방금 전 진명이 앉아 있던 그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현은 진명에게 졸렸던 하루의 목이 걱정되는 듯, 계속 하루의 목을 살펴보고 있었다.
늦저녁의 어둠 속에서 벤치 옆 가로등의 불빛만으로 제대로 살펴보기 힘든지, 우현의 얼굴이 점점 하루의 목과 가까워졌다.
목덜미에 우현의 숨결이 느껴져서 간지러웠다.
“저기요, 강우현 씨. 저 진짜로 괜찮다니까요.”
“안 괜찮아. 목이 빨간데.”
“내일이면 낫겠죠.”
“아니, 이건 멍들 거야. 그 자식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렇다고 똑같이 목을 졸라줄 순 없잖아요.”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겁 좀 준 다음에 합의금을 든든하게 뜯어냈어야지.”
“돈도 많으신 분이 돈에 참 집착하시네요.”
“부자들이 부자인 건 돈에 집착하기 때문이야.”
“네, 네. 대단하십니다.”
“이거.”
우현이 엄지로 하루의 목덜미를 쓸었다.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하루가 움찔했다.
간지러움을 동반한 야릇한 기분이 전신에 퍼졌다.
“내일이면 정말 많이 멍들겠는데. 아프진 않고?”
“예? 아, 예. 예, 안 아파요.”
방금 느낀 야릇함을 그에게 들킬까 봐 당황했다.
대체 뭐야, 이 기분.
하루는 상체를 뒤로 빼며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지만, 그의 엄지가 잠깐 스친 그 느낌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일은 원래 이렇게 위험한가?”
그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뇨,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앞으로는 이런 경우를 생각해봐야겠는데.”
“그러게요.”
이별을 대신 해주면서 죽을 뻔한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이었다.
인터넷 뉴스만 봐도 이별을 고한 상대의 집에 찾아가 칼로 찌르는 일들이 한 달에 한두 번씩 벌어지곤 했다.
꼭 죽지는 않더라도 그 비슷한 위험을 언제 맞닥뜨리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일을 관두는 게 좋지 않나?”
“물론…… 그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닌데.”
하루는 무서웠다.
또 이런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죄여왔다.
하루는 폭력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 거대한 공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까 겪은 일이 떠올라 손이 덜덜 떨렸다.
떨리는 손 위에 우현의 손이 겹쳐졌다.
이번에도 역시 그의 체온을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아 떨림이 잦아들었다.
‘신기해.’
하루는 고개를 돌려 우현의 얼굴을 살펴봤다.
‘나는 왜 이 남자와 접촉을 하면 떨리지 않는 걸까? 내가 이 남자를 이렇게까지 믿는 이유가 뭐지? 아직 이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분명한 건, 우현이 하루를 두렵게 할 일은 없으리란 점이었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이하루 씨.”
“네?”
“괜찮아. 무서워할 거 없어.”
그렇게 말하며, 우현이 미소를 지었다.
보일락 말락 한, 아주 옅은 미소였다.
그저 그뿐인데도 하루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 네. 감사해요.”
“감사하긴. 내가 더 빨리 끼어들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정말 감사해요. 강우현 씨 없었으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정말 감사해요.”
“우리 사이에 감사 인사는 필요 없잖아.”
이런 와중에도 연기를 멈추지 않는 우현에게 감탄했다.
“연인 사이에도 감사 인사는 제대로 해야죠. 고마워, 미안해. 그 말을 아끼지 말라는 말 모르세요?”
“몰라, 그런 건. 내가 아는 건.”
우현의 눈동자가 짓궂게 빛났다.
그가 하루의 얼굴 가까이로 불쑥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하루에게 말했다.
“연인 간에 감사 인사는 키스로 대신 하라는 거.”
하루는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눈을 감는 순간, 그가 키스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쉬울 정도로 쉽게 뒤로 물러나, 하루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뭘 그렇게 긴장해? 우리 사이의 접촉은 이마에 뽀뽀까지. 그걸 어길 생각 없어.”
하루는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가, 뒤늦게 깨닫고 “하아!” 하고 호흡했다.
‘우와, 깜짝이야.’
그의 장난이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그런 장난에 일일이 놀라면서도 밀어내지 않는 자신의 태도가 더 놀라웠다.
나는 왜 두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팍 밀치며, ‘이런 짓 하지 말아요!’라거나, ‘너무 가깝잖아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왜 그의 이런 행동이 장난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안도감이 아닌 아쉬움을 느끼는 걸까?
자신의 마음이 돌아가는 꼴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선배를 하루에 두 번이나 봐야 하다니. 정말 통탄할 일이네요.”
사무실로 들어서며, 하루가 말했다.
“하루이틀사흘나흘. 통탄할 쪽은 네가 아니라 나거든. 왜 사무실로 온 거야? 바로 퇴근하면 되는…… 어이쿠, 강우현 씨. 이렇게 또 뵈니까 참 좋네요. 하하하.”
투덜거리던 낙성은 하루의 뒤로 들어오는 우현을 발견하고는 태도를 싹 바꿨다.
하루는 어이없었지만 ‘저 선배는 원래 저렇지.’라고 생각하며 회의용 테이블에 앉았다.
이번에도 우현이 상석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낙성은 직원인 하루가 아닌 우현을 보며 물었다.
“저기요, 선배. 홀로서기 직원은 저거든요.”
“아, 그랬지. 강우현 씨 포스가 워낙 회장님 같아서.”
낙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하루를 돌아봤다.
“이별하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하루가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항상 낙성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던 장난기가 사라졌다.
낙성은 어두운 눈으로 하루를 응시했다.
“너, 괜찮은 거냐?”
“네, 괜찮아요.”
“애써 괜찮은 척하지 말고. 죽을 뻔했다면서? 남자 손에 목 졸리는 게 보통 일도 아니고……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저도 그러자고 했는데, 이하루 씨 고집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우현이 얼른 낙성의 편을 들었다.
“병원을 갔어야지. 진단서도 끊고. 그다음에 고소를 하고 합의금을 왕창 뜯어냈어야지.”
“선배는 강우현 씨랑 똑같은 소리를 하시네요. 부자도 아니면서.”
“응? 부자? 갑자기 웬 부자?”
아까 하루와 우현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르는 낙성은, 웬 엉뚱한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선배. 저는 이 일, 길게 끌고 가고 싶지 않아요.”
이런 경우 낙성이나 우현의 반응이 보통이었다.
폭행을 당했으면 고소하고 합의금을 받거나, 상대가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게 아주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게는 아니었다.
하루는 폭행을 당한 기억을 오랫동안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경찰에 고소를 하고, 경찰서에서 증언을 하고, 합의를 하기 위해 상대를 만나고…….
그런 과정 속에서 매번 ‘그날’로 돌아가는 공포를, 하루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제 다 괜찮아. 이제 나는 성인이고, 더는 그곳에 있지 않아.
‘그날’이 되풀이되는 일은 없어.
나는 어린 이하루가 아냐.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폭행을 당하면 맞설 수 있는 어른 이하루야.
최면을 걸듯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하루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괜찮은 듯하다가도,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마치 ‘그날’로 돌아간 듯 꼼짝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때문에 하루는 오늘 당한 일을 고소해서, 그 고통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 상태에 대해 낙성에게도, 우현에게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낙성과 우현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하루가 ‘그때’ 어떤 일을 당했는지.
하루 역시 그 일을 두 사람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하루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낙성과 우현은 아마도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을 텐데, 그런 눈빛은 이제 그만 보고 싶었다.
“싫다는데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죠.”
낙성이 계속 고소 얘기를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우현이 하루의 편을 들어주었다.
하루는 우현을 돌아봤다.
우현이 ‘나 잘했지?’라는 표정으로 하루를 보고 있어서, 그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
‘자기도 오는 내내 고소하자고, 고소하자고 졸라댔으면서. 이제 와서 내 뜻 따라주는 척하기는.’
그래도 우현이 밉지 않았다.
밉기는커녕 귀여워서, ‘나 잘했지?’라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모습이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아서.
당황했다.
‘뭐야. 내가 왜 저 남자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 거야?’
하루는 황급히 ‘강우현은 귀여워. 강아지 같아.’라는 생각을 털어냈다.
이거 큰일이다.
우현이 하는 모든 행동은 계약연애의 프로로서 하는 연기일 뿐인데, 그걸 자꾸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위험한 감정이 생길지도 모른다.
‘정신 단단히 차리고 있어야겠어.’
하루는 남몰래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선배. 오늘 일을 통해서 홀로서기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됐어요.”
“어? 안 돼. 그만두지 마!”
뭔가 오해한 듯 낙성이 외쳤다.
“아뇨, 그만두겠다는 게 아니라…….”
“긴 휴가도 안 돼! 우리는 휴가 없어. 직원이라고는 너랑 나뿐이라고.”
“아뇨, 휴가를 받겠다는 게 아니라…….”
“하루이틀사흘나흘. 물론 네가 겪은 일은 정말 위험한 일이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나도 지금 정말 걱정되고…….”
“아, 낙성대입구 선배! 내 얘기 좀 끝까지 들어봐요.”
하루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낙성을 향해, 하루가 바락 외쳤다.
낙성이 하루를 보며 눈을 꿈뻑거렸다.
“저요. 휴가도 안 받을 거고, 관두지도 않을 거예요. 다만 우리 홀로서기의 방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방향성?”
“네, 방향성이요. 오늘 보니까 진짜로 헤어지고 싶어도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오늘 나온 사람, 최진명. 주나은 씨가 우리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별 의뢰를 한 건, 아마도 헤어지자고 했다가 최진명한테 맞아서일 거예요.”
“쓰레기 같은 놈.”
낙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진명 보니까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눈빛이 확 변하는데, 정말……. 무서웠어요.”
하루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아주 없으리라는 법도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이별을 의뢰받을 때, 제대로 사연을 받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사연을?”
“네. 지금까지는 그냥 상대의 이름, 어떤 말을 전할지, 그 정도로만 메일을 받았잖아요. 이젠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일을 골라 받자는 말이지?”
“네.”
“우리 일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닌데…… 골라 받으면 일이 더 줄어들 거야. 세세하게 사연을 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을걸.”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요. 1년을 사귀든, 한 달을 사귀든, 그들은 연애를 했어요. 그런데도 직접 이별을 고하는 게 아니라 업체를 통해서 헤어지려고 하죠. 아주 쉬운 길을 택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움직일 만한 사연 정도는 써서 보내는 게,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요?”
“흐음.”
낙성은 하루의 이야기가 그다지 와닿지 않는 듯 엄지로 턱을 쓸었다.
“그리고 오늘 같은 일을 미리 예방할 수도 있고요. 오늘도 무슨 병이냐, 어떤 이유냐, 뭐라고 전해주기를 바라느냐, 세세하게 물어봤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흐음.”
“저도 이하루 씨 말에 동감입니다.”
이번에도 우현이 하루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낙성은 우현에게, 하루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 그러세요? 역시 하루가 생각하는 게 옳을까요?”
‘저 선배를 진짜!’
하루는 낙성을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그렇죠. 요새처럼 귀찮은 거 싫어하는 세상에, 의뢰가 조금은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이하루 씨가 말한 방법을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홀로서기는 서울, 경기권 지역 한정으로 의뢰를 받는데, 어지간하면 고객이 방문을 하거나 직접 만나서 상담을 통해 의뢰를 받을지, 말지 정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신 가격을 지금까지보다 조금 올려서 받고요.”
“지금도 싼 편은 아닌데…….”
“정말로 이별을 하고 싶은데 본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은 이용할 겁니다. 정말로 홀로서기가 필요한 고객들. 그런 고객들을 받아야, 홀로서기가 오래 가지 않을까요?”
우현은 마치 쭉 생각해온 것처럼 막힘없이 말했다.
‘정말로 홀로서기가 필요한 고객들.’이라는 말이, 낙성의 심금을 울린 것 같았다.
낙성은 감동받은 듯 눈을 반짝이며 우현을 쳐다봤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신을 영접하는 신관 같아서 하루는 기가 막혔다.
“강우현 씨 말씀이 옳습니다.”
우현은 겸손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 말이 옳을 겁니다.”
“그럼 강우현 씨도 하루와 헤어질 때 긴 상담을 통해 우리 홀로서기를 이용해주시겠지요?”
하루는 낙성이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낙성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자, 대답해봐, 강우현 씨. 한 번만 더 나한테 증거를 보여줘 봐.’
그런 낙성의 생각을 꿈에도 모르는 우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곧 미소를 지으며 하루를 돌아봤다.
‘저 인간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긴장하는 하루를 지그시 응시하며, 우현이 말했다.
“전 이하루 씨와 헤어지는 일 없습니다. 평생 이하루 씨 손을 잡고 걸어갈 겁니다. 어디든, 언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