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당신의 위로
꿈.
계약연애를 해서 얻는 게 꿈이라니.
약속장소에 나가서 고객을 기다리는 동안, 하루의 머릿속에는 아까 차 안에서의 영상이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었다.
꿈이라는 대답을 듣고 어리둥절해하는 하루를 보며, 우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어찌나 달콤한지, 하마터면 심장이 녹아내릴 뻔했다.
그 미소를 맛본 것도 아닌데, 입안이 달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돈과 권력. 지금은 꿈. 아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연애를 하기에 연애를 한다고 돈과 권력을 얻고, 꿈을 얻고 그러는 거야?’
우현은 알면 알수록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도대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내가 모르는 인터넷 유행 용어라든가, 그런 건가? 아니면 철학적인 대답이거나, 그런 거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연애를 한다고 ‘돈과 권력’을 얻고 ‘꿈’을 얻는 상황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고객’은 30분 정도 늦게 나왔다.
은테 안경을 쓰고 검은색 니트에 두꺼운 진회색 점퍼를 걸친 남자였다.
하루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남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최진명 씨인가요?”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걸자, 진명이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그런데요.”
“안녕하세요, 최진명 씨. 주나은 씨를 대신해서 이별을 하러 나왔습니다.”
순간 진명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하루는 그것을 슬픔이나 당혹감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진명 씨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서 제일 멋진 일이었어. 진명 씨는 항상 내게…….”
“잠깐, 잠깐만요. 지금 이게 뭐 하자는 플레입니까?”
하루가 준비해온 멘트를 읊는데, 진명이 말을 끊었다.
이런 식으로 중간에 말을 끊고 뭐하는 거냐고 묻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그럴 경우, 하루는 담담히 준비해온 대사를 끝까지 읊었다.
그러면 상대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스스로 깨닫고, 듣지도 않고 가버리거나, 끝까지 듣고 괴로워하거나, 믿을 수 없다는 듯 애인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러나 진명은 아픈 사람이었다.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애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병에 걸린 사람의 질문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저는 이별전문업체에서 나왔습니다. 고객 대신 이별을 해드리는 일을 하고 있고요. 그래서 지금 주나은 씨께서 의뢰하신 이별을 대신 해드리기 위해 이렇게 나왔습니다.”
“하? 나은이가 나랑 이별을 하겠다고 했다고?”
진명의 말투가 거칠어진 것은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 또한 자주 있었으니까.
하루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계속하겠습니다. 진명 씨는 내게 참 많은 감정을 알게 해준 고마운 사람이야. 그래서 진명 씨와 평생 함께하고 싶었지만, 미안해. 내가 부족해서 진명 씨의 병을 감당하기가 힘들어. 그래서…….”
“병?”
진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하루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별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전부 내가…….”
이번에는 대사를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진명이 갑자기 손을 들고 하루에게 달려든 것이다.
커다란 두 손이 하루의 가느다란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하루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손이 하루의 목을 졸라왔다.
“컥…….”
이러지 마시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숨 막히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미친년. 병이라고? 내가 병?”
진명의 눈동자가 분노로 거멓게 번들거렸다.
일그러진 얼굴로 하루를 노려보며 진명이 외쳤다.
“난 병이 아냐!”
“큭…….”
“난 병이 아냐! 아냐! 아니라고오오오!”
진명이 하루의 목을 흔들어댔다.
하루는 이러다가 목이 똑 부러질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다들 “어머, 어머. 어떡해.”, “웬일이야?”, “뭐야? 왜 저래?”, “조현병인가?”,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따위의 말만 하며 구경할 뿐이었다.
데구르 굴러간 하루의 시야에, 이쪽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게 신기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목이 자유로워지며, 공기가 폐로 확 밀려들어왔다.
“커…… 콜록! 콜록!”
하루는 새된 기침을 하며 주저앉았다.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자, 진명의 양쪽 손목을 세게 잡고 있는 우현이 보였다.
진명은 ‘이 남자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라는 표정으로 우현을 보고 있었다.
“이하루 씨, 괜찮아?”
우현은 진명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하루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대답해야 하는데 목이 아파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더니, 우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괜찮을 리가 없지.”
우현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 아, 아! 이것 좀 놔줘요.”
우현이 진명의 손목을 비틀어 올리자 진명이 우는소리를 했다.
하루의 목을 조를 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비굴해진 진명의 표정을 보자, 하루는 기가 막혔다.
하루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고, 하루는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생각이 없었다.
“강우현 씨. 전 괜찮아요. 일단 놔주고 얘기해요.”
“아니, 난 안 괜찮은데.”
“아아아악!”
우현이 더 세게 잡았는지 진명이 비명을 질렀다.
같은 남자인데도 저렇게 힘 차이가 난다는 게 신기했다.
‘강우현 씨, 힘세구나. 앞으로 조심해서 대해야겠다.’
이런 속편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우현 덕분일 거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우현이 지켜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왜 이런 믿음이 생긴 걸까?
하루는 멍하니 우현의 무표정한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지만, 그의 눈동자에 담긴 은은한 노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냥 놔뒀다가는 우현이 정말로 진명을 잡아먹을 것 같아서, 하루는 우현의 팔뚝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우현이 움찔하며 하루를 내려다봤다.
“강우현 씨.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아, 그렇지.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일을 진행해야겠지.”
대체 무슨 일을 하시려고!
진명도 하루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두려움에 찬 눈으로 하루를 돌아봤다.
도움을 청하는 진명의 눈을 보자 기가 막혔다.
방금 전까지 하루를 죽일 듯 목을 조른 사람이, 이제 와서 도움을 구하다니.
하지만 이대로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현이 진명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하루의 목을 조른 두 손목을 똑 부러뜨리는 정도는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강우현 씨.”
“다 설명할게요.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하루의 말을 끊으며, 진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제가 전부 해명할게요. 제발 좀 놔주세요.”
“싫은데.”
“제발요. 제발 좀요. 이유가…… 이유가 다 있어요. 이유가 있어서 그랬어요. 제발…….”
“그래요, 강우현 씨. 우리, 이유라도 들어봐요. 네?”
하루가 우현의 팔뚝을 잡은 채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현은 그런 하루를 빤히 응시하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는데, 하루와 진명의 눈에는 그것이 사신의 미소처럼 보였다.
하루와 진명이 동시에 꿀꺽 침을 삼켰다.
다행히 우현은 진명을 놔주었다.
두 손이 풀려나자마자 진명은 휙 돌아서서 도망치려 했지만, 우현이 더 빨랐다.
우현은 이럴 거라고 예상한 듯 진명의 점퍼 모자를 잡았고, 진명은 비틀거리다가 뒤로 넘어졌다.
겁에 질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진명을 응시하며, 우현이 말했다.
“봐봐, 이하루 씨. 이놈은 반성이 없어. 그리고 나는 반성이 없는 놈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아주 좋은 방법을 알고 있지.”
“고문……하시려고요?”
하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우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해? 민중의 지팡이, 경찰을 부르면 되지. 이놈이 한 거, 살인미수잖아.”
‘살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진명은 자신이 한 짓을 깨달은 듯 얼른 하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요. 정말로 이유가 있어서 그랬어요. 정말이요.”
“그 이유를 들으려고 했는데 도망치려고 하셨잖아요.”
“아, 그게…… 제가…… 죄송해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무서워서.”
너무 무섭다는 진명의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도 지금 우현이 무서워 죽겠으니까.
“알겠어요. 그럼 일단 자리 좀 옮기죠. 보는 사람이 너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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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역 근처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진명이 말했다.
“병이라니……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럼…… 주나은 씨가 왜 최진명 씨와 헤어지려고 하는 거죠?”
“모르겠어요. 전부터 가끔 저한테 병이라면서 그런 소리를 하기는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루의 머릿속에 좋지 않은 것이 떠올라,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혹시 애인에게 폭력을 사용했나?”
우현도 하루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우현의 날카로운 질문에 찔렸는지 진명이 어깨를 움츠렸다.
“폭력이라뇨. 그건 그저 싸우다가…….”
“때렸나?”
“아니, 그렇게 막 때린 건 아니고…….”
“때렸나?”
“아씨! 생각해봐요!”
진명이 벌떡 일어나 우현을 노려봤다.
진명의 눈에는 아까와 같은 광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씨발, 사람이 말을 하는데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요, 그 나쁜 년은! 그만 좀 하라고 해도 옆에서 계속 지랄발광을 하는데, 내가 안 때리게 생겼어요?”
“그래서 때렸군.”
“때렸어요! 그래, 때렸어! 그거 좀 때리는 게 그렇게 큰일이야? 죽자고 팬 것도 아니고 조용해지도록 그냥 좀 토닥거린 건데, 그게 그렇게 큰일이냐고!”
자신이 잘했다는 듯 외치는 진명의 모습에, 하루는 숨이 턱 막혀 왔다.
때렸다니.
그 말을 듣자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간신히 묻어둔 기억은 마치 해일처럼 하루를 덮쳐왔다.
그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가 마치 현재에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하게 하루의 눈앞에 펼쳐졌다.
온몸을 웅크린 하루와 그 앞에 서 있는 거대한 그림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려다가 발이 꼬였다.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단단한 것이 하루의 뒤에서 버티고 있었다.
우현이었다.
“괜찮아, 이하루 씨?”
우현이 하루의 양쪽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어깨에 느껴지는 다정한 체온에, 하루는 울컥 눈물을 흘릴 뻔했다.
“네, 괜찮…… 괜찮아요.”
하루가 힘겹게 말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괜찮았다.
그가 내 뒤에 버티고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어깨에 놓인 그의 손은 폭력적이지 않고 따스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괜찮았다.
생생하게 하루의 눈앞을 막아섰던 과거의 영상은 사라지고, 씩씩거리며 이쪽을 노려보는 진명의 얼굴이 보였다.
하루는 눈을 깜빡거렸다.
무섭지 않아. 저 남자는 그 남자가 아냐. 그러니까 괜찮아.
“가세요.”
하루는 눈을 똑바로 뜨고 진명을 노려봤다.
“주나은 씨는 당신과 헤어졌어요. 두 번 다시는 주나은 씨에게 연락하지 마세요.”
진명은 하루에게 뭐라 쏘아붙이고 싶은 듯했지만, 하루의 뒤에 있는 우현과 눈이 마주치자 휙 돌아서서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갔다.
진명이 아주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우현의 두 손은 하루의 어깨 위에 올려져있었다.
그 두 손의 무게가 놀라울 정도로 위안이 되었다.
그 때, 우현이 하루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지금 이하루 씨를 꼭 끌어안고 위로해주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나?”
안 돼요. 싫어요.
당연히 그렇게 대답해야만 했다.
나는 연애를 할 생각도, 이 남자와 스킨십을 할 생각도 없으니까.
우리는 그저 계약연애를 하고 있을 뿐이고, 그가 보여주는 다정함은 연기일 뿐이니까.
그런데 왜일까?
“네, 괜찮아요.”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는 하루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두 팔로 하루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둘은 계약할 때 가벼운 ‘성적접촉’을 허용한다 했지만, 지금 하루는 이것이 ‘성적접촉’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등에 닿는 단단한 그의 가슴,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허리를 감싼 팔뚝, 그리고 정수리에 느껴지는 그의 따스한 숨결.
이 모든 것은 성적접촉이 아니었다.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