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평생의 꿈
한차례의 혼란이 지나간 후, 세 사람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어째서인지 타원형 테이블의 긴 부분 끝, 상석 자리에 우현이 앉게 되었는데 그 광경이 몹시 자연스러웠다.
언제나 ‘상석은 사장님 자리야!’라고 주장하던 낙성이었지만, 그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듯했다.
낙성은 홀로서기의 큰 고객님이었던 우현의 등장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저희가 일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낙성이 우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러시라고 온 건데요.”
“그런데…… 저희 회사 내부에서 일어난 일들이 외부로 새어나가는 일은…… 아, 물론 고객, 아니, 6번…… 아니, 강우현 씨께서 발설하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그러셔도 되지만…….”
비굴하게 나오는 낙성을 보니 속에서 한숨이 나왔지만, 낙성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낙성에게 있어서 우현은 개차반이라 알고 있던 ‘6번 출구’였다.
우현이 정중한 모습을 보이긴 했어도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것이리라.
하루 역시 그랬으니까.
“최낙성 씨.”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주절거리는 낙성을, 우현이 부드럽게 불렀다.
그 어조가 어찌나 상냥한지, 같은 남자인 낙성조차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저는 그저 이하루 씨를 따라서 온 불청객일 뿐입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외부에 발설할 일은 절대 없으니, 안심하고 대화 나누셔도 됩니다. 없는 사람 취급하셔도 되고요.”
우현의 정중한 말에 낙성이 눈을 크게 뜨고 하루를 쳐다봤다.
낙성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진짜야? 진짜 6번 출구 맞아?’
‘그러니까요!’
하루는 다용도실에서 수없이 반복한 말을 속으로 되풀이하며 입을 열었다.
“선배, 곧 있으면 저녁이에요. 얼른 의논할 게 뭔지 얘기나 해보세요.”
“아, 그래. 그래야지. 잠깐 있어 봐.”
낙성이 노트북을 조작한 후 하루에게로 넘겼다.
“의뢰 메일이야. 읽어 봐봐.”
하루는 메일을 읽었다.
[이별을 하고 싶습니다.]
도입부는 여느 의뢰 메일과 비슷했다.
[참 좋은 사람이에요.
저에게 참 잘해주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병에 걸렸어요.
저는 그걸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직접 헤어지자는 말을 할 용기도 나지 않아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힘이 들어요.
그래서 이별을 의뢰합니다.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이별해주세요.]
마지막에는 상대의 연락처와 외모, 이름이 쓰여 있었다.
메일을 다 읽은 하루의 미간이 좁아졌다.
상처받지 않도록 이별해달라니.
이런 의뢰는 자주 있었다.
하지만 하루는 늘 의문이었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이별이 있을까?
심지어 본인이 직접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업체를 통해 이별을 듣고 상처받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아, 한 명 있었지.’
하루의 시선이 우현에게로 향했다.
처음으로 우현에게 이별을 고했던 날이 굉장히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지만,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별을 말하는 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과 담담한 말투, 차분한 행동.
-그렇군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 정중했던 인사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낙성이 “이열.” 하며 말했다.
“아주 뜨겁네, 뜨거워. 이 와중에도 6번, 아니, 그…… 강우현 씨 얼굴 보면 미소가 절로 나오나 보지?”
낙성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에 힘을 주고 낙성을 노려봤다.
저 선배가 진짜! 내가 왜 이 남자랑 사귀는지 알면서!
“좋군요. 내 얼굴을 보면 절로 미소가 나온다니.”
우현은 낙성의 헛소리를 넘겨듣지 않았다.
낙성이 하루의 시선을 피해 우현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당연히 미소가 나올 겁니다. 우리 고객, 아니, 6번, 아니, 강우현 씨. 얼굴이 끝내주잖습니까. 그냥 보기만 해도 미소가 나오겠지요.”
“그럼 이하루 씨 미소를 계속 볼 수 있게, 외모를 갈고 닦아야겠네요.”
“아뇨, 거기서 더 갈고 닦으면 눈부셔서 제대로 보기나 하겠습니까?”
“과찬이십니다.”
저 두 남자, 죽이 아주 척척 잘 맞는다.
낙성이야 원래 아무하고나 친해지는 놀라운 친화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우현이 저렇게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는 몰랐다.
“하여간 말이에요.”
하루는 두 남자가 더 절친한 사이가 되기 전에 주의를 환기시키기로 했다.
“남자 쪽이 병에 걸려서 헤어진다는 거죠, 이거.”
“응. 병이래.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난처하네요. 병에 걸려서 헤어지는 건데 우리 쪽에 이별 의뢰를 하다니. 이런 경우에는 직접 만나서 이별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이별을 해달라는 의뢰는 처음이네.”
“이번에야 이 사람이 사유를 써서 보내서 그렇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런 이유로 의뢰를 했던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우리한테는 감추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여간 상대가 병에 걸려서 헤어지는 거니까 최대한 상처 받지 않는 방향으로 이별을 해야 해. 안 그러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게요.”
“이쪽 업체를 통해 이별을 받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조용히 앉아 둘의 대화를 듣던 우현이 물었다.
“예전에 한 번 있었습니다. 여자분이셨는데…… 제가 나가서 누구누구 대신해서 이별하러 나왔다는 말을 하자마자 차도로 뛰어들었어요.”
낙성이 말했다.
하루는 그런 일을 겪은 적 없지만, 낙성은 1년 전에 그 일을 겪은 후, 홀로서기의 존폐 여부에 대해 깊이 고민했었다.
“다행히 버스가 먼저 멈춰서 아무 일도 없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오랫동안 머리 좀 아팠죠.”
“그런 사람은 상대가 직접 나와서 이별을 했어도 똑같은 짓을 했을 겁니다.”
“그럴까요?”
“그런 면에서 강우현 씨는 정말 훌륭한 고객이셨어요.”
하루의 말에 우현이 하루를 돌아봤다.
“강우현 씨처럼 정중하고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처음이었거든요. 그런 이유로 다음에 저랑 이별하실 때도, 홀로서기를 꼭 이용해주세요. 고객님.”
우현의 눈가에 언뜻 상처 입은 표정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하루는 보지 못했지만 낙성은 목격했다.
낙성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겠지. 하루는 계약연애라고 했잖아.’
하지만 막 떠오른 생각을 단호히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낙성을 보자마자 우현이 한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계약연애라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우현은 낙성에게 깊이 허리를 굽히며 하루를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지금껏 참 많은 사람들을 도와줬지만, 그 사람들의 지인에게 그런 식으로 인사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낙성의 머릿속을 채운 혼란은, 하루가 이번 이별 의뢰의 멘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자는 말에 뒤로 밀려났다.
“고객이 멘트를 지정해주지 않으면 우리 쪽에서 괜찮은 대사를 생각해내야 하거든요.”
하루가 우현에게 설명했다.
“나한테 이별할 때는 고객이 지정해준 대사였나?”
우현의 질문에 하루는 난처해졌다.
우현과 이별하는 고객들이 ‘쓰레기’, ‘개차반’, ‘죽어버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걸 솔직하게 말해줄 정도로, 하루의 마음은 모질지 못했다.
“네, 뭐. 아무튼요. 어떻게 해야 오늘의 고객님께서 상처를 덜 받을까요?”
하루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냥 솔직하게 병을 감당할 수 없으니 헤어지자, 라고 하면 안 되나?”
“강우현 씨, 생각해보세요. 강우현 씨가 병에 걸렸는데 사랑하는 애인이 이별을 하재요. 심지어 본인이 직접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별전문업체를 이용해서, 모르는 여자가 나와서 이별을 고해요. 그럼 상처 안 받겠어요?”
“내가 병에 걸리면 사랑하는 여자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크겠지. 오히려 내 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강우현 씨가 그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죽어도 헤어지고 싶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너무 사랑해서 죽어도 헤어지고 싶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여자가 내 병 때문에 마음고생 하는 걸 지켜보느니 이별을 택하는 게 낫지.”
“과연 마음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움직여줄까요? 강우현 씨는 제대로 사랑이라는 걸 해본 적이나 있어요?”
왜일까?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순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현은 자세도, 표정도 바꾸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하루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무척이나 신중하고 진지하게 바뀐 것 같았다.
마치 이 세상에 하루만이 존재한다는 듯 이쪽을 향한 그의 눈빛이 너무 깊어서, 하루는 이 자리에 낙성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숨을 멈췄다.
“있어.”
우현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나직한 목소리가 더 낮게 울렸다.
“언제나.”
낮은 음성이 하루의 귓가를 파고들어왔다.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
그 말의 의미를, 하루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건 자신의 심장이었다.
저 말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닌데, 저 사랑이 내 것이 아닌데, 어째서 이 심장은 마치 고백을 들은 것처럼 두근, 두근, 두근, 아프도록 뛰는 걸까?
사랑 고백을 들어본 게 처음도 아닌데, 고백을 들을 때마다 설렜던 것도 아닌데, 왜 이 심장은 처음 고백을 들어본 것처럼 쿵, 쿵, 쿵, 시끄럽게 울리는 걸까?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난 지금 왜 이렇게 긴장한 거지?
난 지금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 거지?
저건 거짓말일 텐데, 연기일 텐데, 어쩌면 사랑하는 여자가 달리 있다는 뜻일 텐데.
사랑하는 여자가 달리 있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렸다.
사랑하는 여자가 달리 있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서, 저렇게 여자들을 갈아치우며 가벼운 연애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지금의 계약연애 역시, 그 여자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군요.”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한 하루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알겠어요.”
주제를 돌려야 하는데 방금 전까지 어떤 대화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낙성을 돌아봤는데, 낙성은 왜인지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우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선배, 아까부터 우현이 잘생겼네, 멋지네 하더니 진짜로 우현에게 위험한 감정을 품게 된 거 아냐?’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뜨거운 시선이었다.
“선배.”
하루의 부름에 낙성이 화들짝 놀라, 하루를 돌아봤다.
“어? 어. 어? 왜?”
“뭘 그렇게 놀라요? 우리 하던 얘기 계속해야죠.”
“아, 음. 그래야지.”
낙성은 괜히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그런 낙성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웬일이야, 웬일이야! 6번 출구가 진짜로 이하루를 사랑하는 거 아냐?’
낙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르는 하루는, 낙성이 뭐든 얘기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낙성은 노트북만 노려보고 있었다.
다행히 기다리는 동안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떠올랐기에, 하루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별할 때 병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낫겠죠?”
“아, 응. 그게 낫겠지.”
낙성이 꿈에서 깬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자기는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도 좋다고 했으면서, 우현은 아주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다행히 낙성은 우현의 방해를 귀찮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고객분이 상처를 많이 받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두루뭉술하게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해봐야 미련만 남을 뿐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주면 상처는 크게 받더라도 미련은 남지 않을 겁니다. 병 때문에 나를 떠난 여자라는 생각을 하면, 오히려 반드시 건강해지겠다, 라고 승부욕을 자극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이런 경우에 승부욕이 생길까요? 오히려 더 죽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이놈의 병! 이렇게 병에 걸려 사는 인생, 의미 없어. 이런 식으로요.”
하루의 반박에 우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병에 걸릴 수 있어. 병에 걸린 사람과 사귀는 게 힘들어서 헤어질 수도 있지. 하지만 병에 걸린 사람과 이별을 하는데 업체를 이용해서 이별을 하는 건 최악이야. 그런 최악의 여자와 헤어지게 되었으면 남자 쪽에서는 오히려 두 손 들고 환영할 일 아닌가? 복수심이 생길 수도 있고.”
하루는 ‘홀로서기’의 일을 부정당하는 것만 같아서 뜨끔했다.
“그 부분은 저희도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과연 이별을 대신 해주는 게 옳은 걸까, 라는 생각은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가끔은 이걸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있어요. 헤어지겠다고 할 때마다 자살하겠다고 뛰어드는 사람이나,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 못 들은 척하는 사람…… 자기가 직접 이별하려고 해도 못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도움이 된대요.”
하루가 열심히 항변하자 우현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일을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이하루 씨 말대로 도저히 이별을 할 수 없어서 업체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겠지. 이 직업뿐 아니라 다른 직업들도 비슷한 딜레마는 가지고 있어. 이 업체를 이용할지 이용하지 않을지는 개인의 선택이고, 나는 그저 본인이 직접 할 수 있는데도 타인의 힘을 빌려서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주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어째서일까.
지금껏 하루의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았던 이별전문업체에 대한 응어리가 우현의 이야기 덕분에 깨끗하게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낙성과 하루, 우현 셋이서 여러 가지로 논의를 한 끝에, 적당한 대사를 생각해냈을 때는, 슬슬 약속 장소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우현은 자신이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지난번처럼 노려보시면 안 돼요. 이번에는 아픈 사람이니까요. 아셨죠?”
차를 타고 이동하며, 하루가 말했다.
“그래, 알겠어.”
우현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렇게 건성으로 말씀하지 마시고요.”
“알겠어, 이하루 씨. 눈에 띄지 않도록 잘 숨어 있을게.”
“진짜죠?”
“진짜야.”
“알겠어요, 그럼.”
하루는 안심하고 조수석에 등을 기댔다.
저녁때라 그런지 길이 좀 막혔다.
운전을 하며, 우현은 슬쩍 하루를 돌아봤다.
하루는 천천히 이동하는 차창 밖 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에 저랑 이별하실 때도, 홀로서기를 꼭 이용해주세요. 고객님.
하루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하루에게 우현은 그저 ‘홀로서기를 이용하다가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 책임을 지기 위해 계약연애를 하게 된 상대’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당분간은 하루가 둘의 사이에 선을 그어도 상처받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래도 하루가 1년이라는 기한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심장 부근에 작은 상채기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하루가 입을 열었다.
“강우현 씨, 저 진짜로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이번에는 연기하지 말고요. 제대로. 그러니까…… 오늘은 우리가 연인이어야 하는 토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대답해주세요.”
“응.”
“강우현 씨는 전에 텀도 없이 연애를 하다가 차이기를 반복하셨잖아요. 그러다가 이번에는 저랑 계약연애까지 하시고. 이렇게 계약까지 하면서 연애를 해서 얻는 게 뭔가 있는 거예요?”
“전에는 돈과 권력.”
의외로 ‘이하루 씨가 내 과거 연애에 대한 얘기를 안 했으면 좋겠는데.’따위의 대답이 아닌, 진짜 대답이 나왔다.
그런데 도통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는 대답이었다.
“전에는…… 돈과 권력이라고요? 그럼 지금은요?”
마침 신호등에 걸린 차가 멈췄다.
우현이 하루를 돌아봤다.
하루도 우현을 돌아봤다.
우현은 흔들림 없는 시선을 하루에게 고정시킨 채, 짧게 대답했다.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