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러니까요.
“그 여자라니?”
재현은 희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여자 말이야! 우현이 오빠랑 같이 있던 그 여자!”
“응?”
재현이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물었다.
“너, 설마 형네 집까지 찾아간 거냐?”
“그래!”
“자존심은?”
“말했잖아! 자존심 같은 거 안 챙기는 게 프로라고!”
“하지만 너…….”
“됐으니까 그때 얘기는 좀 그만하라고! 넌 왜 그렇게 쓸데없는 데에 기억력이 좋아? 그 일일이 따지는 성격 좀 고쳐!”
“성격 고치는 문제가 시급한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갑자기 찾아와서 가방을 집어던지는 건, 어떤 성격이어야 가능한 거야?”
“아, 됐다고! 빨리 말하라니까! 그 여자 누구야?”
“내가 그 여자가 누군지를 어떻게 알아?”
“알잖아! 아니까 내 전화 쫙쫙 씹어 드신 거잖아!”
“일하느라 바빴거든.”
재현은 엄지로 자신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거실에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정말이야? 진짜로 일했어? 그 여자에 대해 아는 게 있어서 내 전화 씹은 게 아니고?”
희정의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그래, 정말이야. 진짜로 일했어. 알다시피 인기작가라서 쉴 틈이 없거든. 너한테 전화 온 줄도 몰랐다.”
물론 알고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단 말이지.”
희정은 엄지손톱을 깨물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난 우리 집에 들어와도 된다고 한 적 없는데. 넌 여자애가 다 큰 남자 있는 집에 그렇게 척척 들어와도 되냐?”
“지랄.”
“…….”
“야, 너 진짜로 그 여자에 대해 모르는 거 맞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우리 형이 수시로 여자 갈아치우는 게 이제 와서 비밀도 아니고. 너나 나나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이상했단 말이야.”
“이상해? 뭐가?”
“그 여자! 아니, 우현이 오빠!”
“형이 왜?”
“우현이 오빠가 글쎄…….”
거기까지 말하고 희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한동안 입술 안쪽의 살을 잘근잘근 씹던 희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 웃…….”
“웃?”
“웃었어.”
“웃어?”
“그 여자를 보면서 웃었다고.”
“응? 그 여자가 무슨 실수라도 해서 비웃은 거 아냐? 형은 비웃는 거 하나는 일품이거든.”
“아냐.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고. 진짜……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러니까…… 이런 미소.”
희정이 양쪽 입꼬리를 바짝 치켜올렸다.
양쪽으로 한껏 벌어진 입술과 달리,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너, 지금 조커 같아. 꿈에 나올까 무섭다, 야. 아, 우리 형이 그 여자 무섭게 하려고 그렇게 웃은 거 아냐?”
“아씨! 그런 게 아니라니까! 정말로…… 아, 기다려봐!”
희정이 휴대폰에서 뭔가를 검색하더니 우현의 앞에 내밀었다.
휴대폰 액정에는 어느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얼굴이 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렇게 웃었다고.”
“누가?”
“우현이 오빠가! 강우현이!”
“에이, 말도 안 돼.”
“진짜라니까!”
희정은 답답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얼굴까지 빨개져서 말하는 희정의 모습에, 하마터면 그녀의 말이 진짜라고 속아 넘어갈 뻔했다.
“너 헛소리하려고 우리 집에 온 거면 그만 가라. 나, 일해야 해.”
“야, 진짜 헛소리가 아니라…… 나도 헛소리였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진짜라니까! 우현이 오빠가 그 여자를 보면서 이렇게 웃었다고! 계속! 쭉!”
“꿈꾼 거 아냐?”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흐음.”
“진짜라니까! 아씨, 진짜! 대체 그 여자가 누구길래.”
분통 터져 하는 희정을 보니 진짜인 것 같기도 했다.
희정은 자신에게는 한 번도 미소 짓지 않았던 우현이 ‘어떤 여자’에게 미소 지어준 게 무척이나 분한 듯했다.
‘형이…… 여자를 보면서 웃었다고? 진짜 상상이 안 되는데.’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우현이 한 여자를 보며 미소 짓는 모습을 그릴 수가 없었다.
재현이 아는 우현의 미소라고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보는 사람이 모멸감을 느낄 만한, 그런 조소뿐이었다.
“그 여자가 누군데?”
“너, 머리 나쁘니? 지금 내가 그걸 몰라서 널 찾아온 거잖아!”
“아, 그랬지.”
“딱 보니까 별 거 없어 보이던데.”
“그래?”
“얼굴이 하얗고 작고 눈이 크더라. 입술은 빨갛고.”
“예쁜 거 아냐?”
“예쁘긴 내가 더 예쁘지!”
“아하?”
“너, 그렇게 어리둥절하다는 표정 짓지 마라. 내가 네 앞에서나 이러지, 밖에 나가면 남자들이 나한테 밟히고 싶어서 안달복달하거든.”
“아하?”
“아, 진짜 짜증나! 강재현!”
희정의 날카로운 외침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재현은 고막이 터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싫기에, 희정의 속을 긁는 건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그래도 별 거 없어 보였어. 옷차림도 별로고.”
“어떻게 입었는데.”
“청바지에 맨투맨! 점퍼! 아주 후줄근해 보이더라.”
“그 정도면 보통 아냐?”
“나 정도는 입어야지!”
“그러고 보니, 너 오늘 힘 뽝 줬다? 설마 그러고 형 찾아가면 형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을 미처 몰랐네.’ 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냐!”
희정의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니, 재현이 딱 맞췄나 보다.
단순하긴.
“아무튼 너도 모르면 됐어.”
희정이 바닥에 떨어진 백을 집어 들었다.
“야, 너 어쩌게?”
“너한테 알아봐달라고 한다고 알아봐주지 않을 거잖아.”
“물론.”
“그럼 내가 알아보고 손을 써야지.”
“야, 야. 잠깐만. 뭘 손을 써?”
재현이 황급히 희정의 손목을 잡았다.
희정은 재현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재현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 여자, 딱 봐도 별 거 없어 보이더라. 잘해봐야 중산층 집안에서 살아온 여자겠지. 그런 여자 떼어내는 거, 어렵지 않거든.”
물론 그런 여자 떼어내는 거, 희정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희정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재현은 아직도 믿기 힘들지만, 우현이 그 여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준 게 사실이라면 그 여자는 우현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가족보다도 소중한 존재겠지.
그런 여자를 건드린다는 건, 우현을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희정은 정말 모르는 걸까?
“너 말이야.”
희정이 큰일을 내기 전에 조언을 해주려 했지만, 희정은 듣지도 않고 휙 돌아섰다.
“됐어. 앞으로 너한테는 도와달라고 안 해. 진짜 쓸모가 없어, 쓸모가!”
“아니, 그게…….”
희정이 뭐라 하든, 재현은 충고를 해줄 생각이었다.
희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현 자신을 위해서였다.
우현이 분노해서 희정을 건드리게 된다면, 희정의 집안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재현의 집안 또한 성가신 일에 휘말리게 된다.
재현은 김 여사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고, 성가신 일에 휘둘리는 것도 딱 질색이었다.
그러나 희정은 돌아보지도 않고 현관문을 나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닫힌 문을 노려보던 재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우현이 형이 웃었다고?’
아직도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진짜 상상이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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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 선배는 저한테 되게 고마운 사람이에요.”
우현의 차를 타고 홀로서기로 향하며, 하루가 말했다.
우현은 하루가 곤란할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제가 돈이 그렇게 많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대학 다닐 때도 생활비며, 등록금이며, 전부 제가 벌어서 냈어야 했는데 그걸 항상 신경 써줬어요. 홀로서기를 제안한 것도 그래요. 회사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 알고는, 같이 사업 하나 해보자고 홀로서기를 제안해주신 거예요. 홀로서기 하면서 생활이 많이 편해졌어요.”
“그렇군.”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 때 그 선배가 이것저것 신경 써주시지 않았으면, 전 중간에 대학 관뒀을지도 몰라요. 힘들어서.”
“그 선배가 이하루 씨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그게 이성적인 관심을 말하는 거라면, 절대 아니에요. 그 선배는 그냥 오지랖도 넓고 남 챙겨주기를 좋아하거든요. 저 말고 제 친구 한 명도 동기였는데, 걔도 선배한테 도움 많이 받고 있어요.”
“그래. 좋은 사람이군.”
“네, 좋은 사람이에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하루 씨. 나는 이하루 씨가 곤란할 짓은 하지 않아.”
“그러신 분이 사무실 찾아오지 말라는 데도 찾아오고, 직원식당 이용하고 그러세요?”
“그런 걸로 이하루 씨가 곤란해할 줄은 몰랐지.”
“곤란해요.”
“기억해두지.”
안 찾아오겠다는 말은 절대 안 하는구나.
이런 와중에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는 우현에게,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홀로서기 사무실이 있는 건물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며, 은서와 미영이 인터넷쇼핑몰 사무실에 있을지 궁금해졌다.
두 사람은 주말에 출근할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 둘은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낙성에게 우현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낸 행동이었다.
차에 탄 후에는 ‘내가 왜 이 남자랑 데이트를 끝내고 가야 하는 걸 그렇게 마음에 걸려 한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홀로서기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낙성은 하루의 뒤로 들어오는 우현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루가 데리고 올 친구라 봐야 미영이나 은서, 혹은 도경일 것이라고 생각했지, 모델인가 싶을 정도로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와 함께 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낙성이 ‘이게 뭔 상황이야? 이건 누구야?’라는 시선을 하루에게 보내는데, 우현이 낙성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강우현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우현의 행동에, 낙성뿐 아니라 하루까지 눈이 커졌다.
우현이 저렇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다니.
얼마 전, 개발지원본부의 본부장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우현을 본 터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우리 이하루 씨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루는 주먹을 쥐었다.
우현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연기일 게 분명한데, 그런데 왜.’
울컥,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까?
하루를 잘 챙겨준 부분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듯 허리를 굽히는 저 모습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걸까?
하루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이고, 도움은요, 무슨. 아닙니다. 하루가 제 일을 아주 잘 도와주고 있는 거죠.”
낙성의 목소리에, 하루는 정신을 차렸다.
낙성이 하루 쪽을 향해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입 모양을 읽었다.
‘설마 이 친구, 6번 출구야?’
하루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낙성의 입술이 쩍 벌어졌다.
낙성도 6번 출구가 여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개차반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하는 우현과 개차반 6번 출구의 이미지가 겹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와 일주일에 두 번씩 데이트하는 하루도 아직 적응되지 않으니까.
“자, 자. 육번…… 아니, 고객…… 아니, 강우현 씨? 여기 앉으세요. 커피 한 잔 타다 드리겠습니다. 하루야, 커피 타는 것 좀 도와줘.”
우현을 타원형의 책상 앞에 앉힌 낙성이 하루를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할 얘기가 많다! 얼른 와!’라는 시선이었다.
“우리 홀로서기 대표님이 커피 한 잔 제대로 못 타시는 분이라서요. 제가 좀 도와드리고 올게요.”
커피 한 잔 타는 걸 도와달라고 하는 상황을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우현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야, 내가 무슨……! 이하루 씨. 내가 무슨 커피 한 잔 못 탄다고 그러나. 허허허허.”
목소리를 높이던 낙성이 우현의 존재를 깨닫고는, 뭘 흉내 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자하게 말하며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홀로서기 사무실은 아주 넓지는 않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하루가 다용도실로 들어가자 낙성이 휙 돌아섰다.
“진짜 6번 출구라고?”
“네, 진짜예요.”
“성격 개차반이라며?”
“그러니까요!”
“저게 개차반이야?”
“그러니까요!”
자신의 혼란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기뻤다.
“아니, 저런 사람이 왜? 왜 차이는 거야? 내가 여자라면 성격 좀 개차반이라도 저 얼굴 뜯어먹고 살겠구만. 저 얼굴만 봐도 화가 싹 풀리겠어! 저건 이 세상의 얼굴이 아니라고.”
“그러니까요!”
“아니, 뭔데 저렇게 잘생긴 거야? 뭔데 잘생긴 주제에 키도 커? 연예인 아냐? 아니, 본 적이 없긴 한데. 뭘 먹고 살았대? 비결이 뭐래?”
“그러니까요!”
“말도 안 돼. 6번 출구가 저렇게 괜찮은 남자라고? 난 진짜 무슨 마왕의 환생 같은 걸 줄 알았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리는 낙성을 보며, 하루는 깊은 공감을 담아 대답했다.
“그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