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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18화 (18/119)

#(18) 헤어질 생각 없어.

어쩌지?

그건 하루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당연히 절대 안 될 일이고, 곧장 “안 돼요!”라고 외치며 그의 가슴을 떠밀 일인데, 하마터면 ‘어쩌긴요. 딱 그런 순간인 것 같으면 하셔야지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목소리에 마성이 있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의 음성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섹시했다.

그 순간만큼은 이곳에 공원이라는 사실도, 강아지 리드줄을 꽉 잡고 있다는 사실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의 음성만으로 가득한 공간에 갇힌 기분이었다.

휘둥그레 뜬 하루의 맑은 눈동자에, 오롯이 우현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천천히 허리를 편 우현이 하루의 얼굴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하루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맑았다.

까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농담이야.”

“예?”

“농담이라고.”

그가 허리를 폈다.

“계약상 이하루 씨와 하는 성적 접촉은 이마에 뽀뽀 정도로만 되어 있지. 그걸 어길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아…….”

지금 가슴에 번지는 이 감정은 아쉬움일까, 아니면 놀림을 당했다는 민망함일까?

아쉬움은 전혀 없다고, 하루는 생각하고 싶었다.

“못됐다, 진짜.”

하루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이런 걸로 놀리지 좀 말아주실래요? 하마터면 성희롱으로 고소할 뻔했잖아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강하게 말했지만, 우현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우현은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물론 이조차도 연기겠지만) 하루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거 무서워 죽겠군.”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희정은 눈을 깜빡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부릅뜨고 있었다.

자신이 보는 광경이 환상일 거라고, 희정은 확신했다.

왜냐하면 저런 광경은 절대 현실에 있을 리 없으니까.

절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니까.

‘그래, 내가 요새 우현이 오빠가 딴 여자 만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긴 했어. 그래서 이런 환각을 보는 거야.’

하지만 그저 환각으로 치부하기에, 저 멀리 보이는 광경은 너무도 생생했다.

희정은 엄지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어째서……?”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째서 저런 여자한테 웃어주는 건데?”

우현이 웃고 있었다.

희정이 그리도 간절히 원했던 다정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담뿍 묻어 있었다.

그는 미소를 감추기 힘들다는 듯, 한 여자를 향해 연신 웃고 있었다.

강우현이 누구던가.

아버지인 강백선 전무가 무어라 꾸지람을 한 뒤, 휙 돌아서서 걷다가 삐끗해서 넘어질 뻔한, 긴장했기에 더 웃음이 나오는 그 순간에도 작은 미소조차 짓지 않았던 인물이 아닌가.

당시 희정도, 재현도, 심지어 김 여사까지도 웃음을 참기 위해 입가에 힘을 꽉 쥐고 있었는데, 우현의 눈빛은 냉랭하기 그지없었고 우현의 입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랬던 우현이 웃고 있다.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는 듯, 미소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야.”

희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꿈이야. 꿈이지. 꿈이고말고.”

희정은 휙 돌아섰다.

우현의 앞에 서 있는 여자는 형편없었다.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 검은색 점퍼를 걸친 차림새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다.

끝내주는 몸매에 죽여주는 가슴을 가진 희정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미소를, 저런 평범한 여자에게 지어줄 리 없었다.

그러니까 꿈이다.

너무 허무맹랑해서 다들 웃어넘길 꿈.

현실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그런 꿈.

희정은 피식, 피식 웃음을 흘리며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어갔다.

‘내가 진짜 별 꿈을 다 꾸네.’

라고 생각하며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희정은, 두 주먹으로 핸들을 쾅 내리쳤다.

“꿈일 리가 없잖아! 이렇게 생생한데!”

희정의 예쁘장한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뭐야, 대체? 그 여자, 뭐야? 뭔데 우현이 오빠랑 그러고 있는 거야? 아니, 우현이 오빠는 대체 왜 그런 여자랑 그러고 있는 건데?”

차라리 희정보다 훨씬 나은 여자를 데리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모멸감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역시 강우현은 보는 눈이 높아, 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느긋하게 그 여자를 떼어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내게도 보여주지 않은 미소를, 나보다 못한 여자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보니, 무시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

“재현이는 알려나? 그래, 들은 게 있어서 내 연락 씹는 거겠지?”

희정은 휴대폰을 꺼내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재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희정은 기가 막혀 휴대폰을 노려봤다.

“진짜 이 집 남자들은 귀찮으면 연락 피하는 재주 하나만큼은 알아줘야 해.”

왜 모를까?

전화를 받지 않으면 찾아가면 된다는 걸.

+++

공원에 있는 매점 앞의 파라솔에 앉아, 하루와 우현은 컵라면을 먹는 중이었다.

‘누렁이’는 얌전하게 우현의 발등에 턱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연두 어때요?”

하루가 말했다.

“연두?”

“누렁이 이름이요.”

“왜 연두지?”

“포근하잖아요. 털도 포근하고 표정도 포근하고. 봄처럼 따뜻해서 ‘봄이’라는 이름을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연두가 더 예쁠 것 같아서요.”

“그거 좋군. 어때, 연두라는 이름?”

우현이 ‘누렁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렁이’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하품을 했다.

“마음에 들어? 앞으로 연두라고 불러도 돼?”

‘누렁이’와 대화를 시도하는 우현을, 하루는 가만히 지켜봤다.

역시 신기한 사람이다.

회사에서는 그렇게 개차반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누렁이’를 대하는 모습은 꾸밈없이 귀여웠다.

솔직히 말해서, 우현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어쩌면 회사에서 보이는 모습들이 연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찮대.”

우현이 하루를 보며 말했다.

“하…… 아니, 누렁…… 아니, 연두도 이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군.”

이상한 점이 있다면 ‘누렁이’ 이름을 부르기 전에 꼭 ‘하.’ 하고 한숨 쉬는 듯한 추임새를 넣는다는 점이었다.

‘뭐, 습관이겠지.’

라고 생각하며 하루가 말했다.

“정말 연두라고 이름을 바꾸게요?”

“이하루 씨가 누렁이란 이름이 별로라고 해서 바꾸려고 고민 중이었어.”

“아…… 하지만…….”

“하지만?”

“내가 진짜 애인이라면 그래요, 내 뜻에 따라서 이름을 바꿀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는 계약연애 중이고, 만약 1년이 지나서 계약연애 상대가 바뀌면 그때 가서 또 누렁이 이름을 바꾸고…….”

하루는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뻗어온 손이 하루의 손 위에 겹쳐진 것이다.

그의 큰 손은 하루의 손을 완전히 덮었다.

그 상태로 우현은 하루를 지그시 응시했다.

손등에서 시작된 온기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따스한 연유는 무엇일까?

하루는 손을 빼고 싶으면서도 빼고 싶지 않은, 모순된 감정을 느끼며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나는 이하루 씨랑 1년 후에 헤어질 생각이 없는데.”

“예? 하지만 계약상…….”

“우리가 지금 계약연애 중인가?”

그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에, 하루는 혼란에 빠졌다.

계약연애 중이냐니? 당연하잖아!

그게 아니면 우현과 사귈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루는 연애 따위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 이것도 연기인가?’

문득 깨달았다.

‘그래, 데이트 중에는 진짜처럼 행동하자고 했지.’

하마터면 말려들 뻔했다.

하루는 짐짓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게요. 제가 깜빡, 착각했네요.”

“그래. 서운할 뻔했어.”

그가 검지로 하루의 손등을 긁듯이 쓸어내렸다.

야릇한 전율이 손등에서부터 팔 끝까지 퍼져갔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손잡는 걸 ‘성적접촉’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저 손과 손이 맞닿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야릇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기분은 다른 남자들과도 그럴까, 아니면 강우현 한정일까?

아마 강우현 한정일 것이다.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옭아매는 우현이기에, 손만 살짝 닿아도 야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하루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얹어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낙성대입구]

낙성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 좀 받을게요. 일 때문에.”

우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

[하루이틀사흘나흘. 일이 들어왔다.]

“언젠데요?”

[오늘 저녁. 잠깐 사무실로 와야겠어. 의논할 게 있거든.]

“언제요?”

[지금.]

우현과의 데이트를 끝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지난주의 하루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그러마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째서인지 이렇게 데이트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눈앞에서 미소 띤 얼굴로 누렁, 아니, 연두의 목덜미를 긁어주는 우현 때문일 것이다.

‘저 남자가 하는 건 다 연기야. 속아 넘어가면 안 돼.’

하루에게 보고 싶었다고 하는 것, 하루와의 시간을 아주 많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저 미소 띤 얼굴, 전부 다 연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날 정말 좋아하는 남자를 버리고 가는 것처럼 죄책감이 드는 걸까?

“저기. 저기요, 선배. 혹시 누구 좀 같이 가도 돼요?”

[어, 뭐. 상관없어. 올 때 메로나.]

“선배, 제발 이상한 개그 좀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개그라니! 난 진짜로 메로나를……]

좋아한다고, 라는 절규가 들려올 게 뻔했기에, 하루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저, 강우현 씨. 있잖아요.”

거기까지 말하고 하루는 아차 싶었다.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아니, 그런 강아지를 예뻐해 주는 우현이 귀여워서, 아니, 오늘의 데이트가 편안하고 즐거워서, 깜빡 잊고 있었다.

우현이 ‘홀로서기’에 좋은 감정이 없으리라는 걸.

지금이야 계약연애지만, 이전의 연애는 진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홀로서기까지 이용해서 우현과 이별을 했겠지.

우현이 무표정하고 뻔뻔하게 이별을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그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런 우현을 홀로서기에 데리고 가려고 하다니.

‘내가 미쳤지! 생각이 짧아도 정도가 있지!’

“뭐 할 말 있는 거 아닌가?”

자책하는 하루를 지켜보던 우현이 물었다.

“아, 아니에요. 저, 강우현 씨. 미안하지만 오늘은 데이트를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음, 급한 일이 들어와서요.”

“이별 작업?”

“네, 그거요.”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나?”

“예?”

하루가 눈을 크게 뜨고 우현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봤다.

‘뭔 생각이지? 깽판 놓을 생각인가?’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을 홀로서기에, 스스로 가겠다는 이유는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오늘 이하루 씨와 밤 11시까지 데이트를 할 예정이었는데.”

“굉장히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셨군요.”

“원래 계획적으로 인생을 사는 편이라서. 이하루 씨가 이대로 가버리면 곤란한데. 난 남은 시간에 뭘 해야 하지?”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라는 말은 물론 할 수 없었다.

오늘은 그와 데이트를 하기로 결정한 날이니, 우현이 저렇게 나오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홀로서기에 데리고 갔다가 저 남자가 낙성 선배 멱살이라도 잡으면 어쩌지? 난 여자라서 봐줬을지도 모르지만…….’

하루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루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깨달은 듯, 우현이 덧붙였다.

“걱정 마. 경찰서에 갈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경찰서 가기 직전의 짓만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조심스레 묻는 하루를 보며 우현이 피식 웃었다.

“이하루 씨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연히 하루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현은 그저 하루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고 싶을 뿐이었다.

우현이 그녀의 삶에서 사라진 후,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미처 응답하기도 전에 또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울리는 소리에, 어째서인지 희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깜빡했다.

희정이 이 집 주소를 알고 있다는 걸.

재현은 한숨을 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현관문 앞에는, 잔뜩 화난 표정의 희정이 서 있었다.

희정은 재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들고 있던 백을 던졌다.

재현은 얼굴로 날아오는 백을 한 손으로 막았다.

백이 재현의 손바닥에 세게 닿았다가 툭 떨어졌다.

‘세게도 던지네. 아주 자비가 없어, 저 여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재현에게, 희정이 외쳤다.

“야! 그 여자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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