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키스를 해도 괜찮은 순간
재현이 나간 후, 우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우현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눈치챈 듯 ‘하루’가 소파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와 우현의 허벅지에 턱을 댔다.
‘하루’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루야.”
‘하루’가 귀를 쫑긋거렸다.
사실은 이렇게 그녀를 부르고 싶었다.
하루야.
그리고 그녀도 나를 다르게 불러주었으면 했다.
오빠.
어릴 때 그랬듯이, 그렇게.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우현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하루를 다시 만나기 전에는, 그때를 떠올려도 미소 같은 건 짓지 못했었다.
재현의 얼굴을 본 후에도 이렇게 마음 편히 미소 지을 수 있는 건 전부 하루 덕분이었다.
그녀는 알까?
그녀가 내게 아주 큰 기쁨을 안겨준다는 걸.
그녀가 난처해하는 모습, 당황하는 모습, 뾰로통한 모습, 때때로 웃는 모습, 그 모든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 저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안고 싶어진다는 걸.
그녀의 잘 자란 모습에, 더는 슬프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무척이나 안도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미안하다, 하루야.”
우현은 ‘하루’의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로 네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아.”
‘하루’의 이름을 지어줬을 때만 해도 하루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꾸게 돼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 됐어. 조만간 멋진 이름을 지어줄게.”
+++
희정은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일을 하고 있거나 희정의 전화를 피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희정은 후자일 거라고 짐작했다.
“하여간 이 형제들은 사람 무시하는 게 취미야, 취미!”
희정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침대에 던졌다.
“오늘 확 강 회장님을 찾아봬?”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주말이니 강 회장은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자택에 있을 터였다.
강 회장은 희정을 손녀처럼 잘 대해주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가족들에게는 참으로 다정한 할아버지이기에 강 회장을 만나는 건 무섭지 않았다.
무서운 건 우현이었다.
그를 사랑하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우현이 표정을 굳히고 싸늘한 말을 내뱉으면, 우현의 아버지도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였다.
오래전, 우현과 김 여사 사이에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난 당신을 내 어머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정중하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입가에는 경멸이 묻어 있었고,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뿐인데도 희정의 심장이 다 오그라들 정도였다.
‘어머님도 대단하셔.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우현 오빠한테 잘해주려고 하는 걸 보면.’
그때 김 여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미안하구나.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
그게 진심이라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웃을 수 있다니.
희정이 우현에게 반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동안 희정에게 있어서 우현은 그저 무뚝뚝하고 잘생긴 오빠, 옆에 두면 이득이 있을 오빠에 불과했지만, 그 모습을 본 순간 생각했다.
‘나한테는 다정하게 미소 짓게 만들고 싶어.’
승부욕을 동반한 애정이었다.
이길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사귀는 동안, 우현은 단 한 번도 희정에게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전화나 제대로 받아주면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남자에게 그런 취급을 받아본 적 없는 희정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고, ‘내가 있으니까 소중함을 모르는 거야. 나한테 차이면 날 달리 볼지도 몰라.’라는 생각에 우현을 매몰차게 차버렸다.
하지만 우현이 희정을 달리 보는 일은 아직까지 벌어지지 않았다.
이쯤 되니 희정은 조급해졌다.
우현은 끊임없이 연애를 한다.
어쩌면 그중에 진짜로 우현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리는 없어. 나도 못 한 걸, 다른 여자들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도 불안했다.
만의 하나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 강 회장님을 찾아가면, 우현이 오빠가 엄청 화내겠지?”
희정은 엄지손톱을 깨물다가 침대에 던져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우현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차단을 한 듯 곧바로 메시지로 넘어갔다.
희정은 다시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아, 진짜! 연락이라도 돼야 뭐라도 해볼 거 아냐!”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진짜 그 방법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주말에 우현이 하는 일이야 뻔했다.
집에 있거나, ‘하루’와 공원 산책을 하거나.
먼저 헤어지자고 한 주제에 다시 만나러 가면 우스워 보이리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희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현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
토요일 오전 10시.
하루는 빌라 앞에서 기다리는 우현을 보자마자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뭐가?”
“직원식당이요!”
어째서인지 목요일부터 우현이 점심을 먹으러 직원식당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현이 식당에 들어오는 순간, 마치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식당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왁자지껄하던 식당 안이 조용해졌고, 하루는 그제야 우현을 발견했다.
하루가 있는 자리로 올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우현은 하루와 멀리 떨어진 중앙에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직원식당은 항상 사람이 많아서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인데, 놀랍게도 우현의 주위는 한산했다.
돈가스덮밥을 가져온 우현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우아하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미쳤나 봐. 왜 여기에 온 거야?”
“점심이라도 편하게 먹고 싶었는데.”
식품생산본부 직원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아, 하루는 죄책감을 느끼며 불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해야만 했다.
우현은 데이트가 없는 날이라 그런 건지, 하루와의 약속 때문인지, 밥을 다 먹고 나갈 때에도 하루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한 번뿐이겠지.’ 하고 안심했는데, 우현은 금요일에도 직원식당에 내려와 많은 사람들에게 어둠을 안겨주었다.
금요일에 몇몇 사람들이
“난 이제 회사 밖에서 사 먹으려고. 돈이 문제야? 체하게 생겼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직원식당이 왜?”
모든 악의 근원인 우현은 뻔뻔했다.
“원래 외식파 아니었어요?”
하루의 회사는 구내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외식파’라고 불렀다.
“꼭 그렇지는 않은데.”
“하지만 지금까지 직원식당에서 식사한 적 없다고 들었는데요.”
이 말 중 어느 부분이 우현을 기쁘게 한 건지, 우현이 빙그레 웃었다.
“왜, 왜 웃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현의 미소는 심장이 콩콩 뛸 정도로 예뻐서, 하루는 당황했다.
“이하루 씨가 평소에도 나에 대해 듣고 다닌다는 게 좋아서.”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오늘은 데이트를 하는 날.
그의 연인이 되는 날이니까 일일이 반박해서는 안 된다.
“그럼요. 내 애.인.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평가되는지 궁금하니까요.”
“그거 좋군.”
“그런데 정말로요. 왜 갑자기 직원식당에서 점심을 드시는 거예요?”
“이하루 씨가 보고 싶어서.”
또! 또 저런다!
“회사에서 아는 척을 할 수 없으니 멀리서라도 봐야지.”
이 부분에 대해 지적할 말이 아주 많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괜히 지적했다가 그의 심기를 건드려, 그가 회사에서 하루를 아는 척하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 며칠 우현이 개발부로 찾아오지 않았기에, 직원들은 하루와 우현 사이의 문제가 잘 해결됐다고 믿고 있었다.
“알겠어요. 실컷 보세요.”
“응, 그러려고.”
“오늘은 어디 가요?”
“놀이공원 갈까?”
“……놀이공원 되게 좋아하시네요.”
“이하루 씨는 싫어해?”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별로 가고 싶진 않아요.”
놀이공원에는 좋은 추억이 없었다.
“좋은 추억이 없다고? 왜?”
우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어릴 때…… 아니, 아니.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놀이공원을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하마터면 어릴 때의 이야기를 꺼낼 뻔했다.
성인이 되어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절대 어릴 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그 이야기가 튀어나오려고 한 걸까?
하루는 고개를 들어 우현을 응시하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하루가 말을 하면, 우현은 언제나 하루를 지그시 응시하며 진지하게 경청한다.
아무리 쓸데없는 말이라도, 우현은 늘 진지하게 하루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의 이야기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듯이.
이 남자의 연기력이 너무 뛰어나서 마음이 풀어질 뻔했다.
하루는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놀이공원 말고 다른 데 가요.”
“그럼 우리 하…… 누렁이 볼래?”
“오, 좋아…… 아니요. 아직 서로의 집을 방문하기에는 좀 이르지 않은가요?”
하루의 말에 우현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아직 이르다는 건, 언젠가는 허락하겠다는 거군.”
“아뇨,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걱정 마. 집 안에 끌고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까.”
끌고 들어가다니. 표현을 해도 꼭 저렇게 하지.
“집 앞에 공원이 있어. 잠깐 기다리면 데리고 나갈게.”
+++
‘누렁이’를 보는 순간, 하루는 “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우와, 너무 예쁘다. 우와!”
하루가 환하게 웃으며 ‘누렁이’에게 두 팔을 벌리자, ‘누렁이’가 어떻게 하냐는 듯 우현을 돌아봤다.
우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누렁이’가 꼬리를 치며 하루에게 달려갔다.
하루는 쭈그리고 앉아 ‘누렁이’를 끌어안고, ‘누렁이’의 보드라운 털을 마음껏 쓰다듬었다.
환하게 웃는 하루의 모습에, 우현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어째 날 만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군.”
“에이, 아니에요. 애인님 만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죠.”
우현은 하루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연기로라도 하루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게 꿈처럼 기뻤으니까.
그런 우현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 하루는, ‘누렁이’를 한껏 예뻐해 주다가 우현에게서 리드줄을 넘겨받았다.
‘누렁이’가 앞서고, 우현과 하루는 나란히 서서 공원 산책로를 걸었다.
추운 날씨라 그런지,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산한 공원을 걸으며 하루가 물었다.
“누렁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강우현 씨가 지어준 거예요?”
“응.”
“작명 센스가 너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죠?”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그럼 앞으로 생각을 해보는 게 좋겠어요. 강우현 씨는 작명 센스가 꽝이에요, 꽝!”
“그럼 이하루 씨라면 어떤 이름을 붙여줬을 건데.”
갑자기 물어보니 생각나는 이름이 없었다.
하루는 열심히 고민했다.
고민하는 하루를, 우현을 슬쩍 돌아봤다.
살짝 미간을 모으고 입술을 꼭 다문 모습을 보니,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고민을 하거나 깊은 생각에 빠질 때면, 하루는 항상 이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현은 하루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야 ‘아이고, 귀여워라.’ 정도의 생각만 했다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생각 이상의 욕정이 찾아드는 게 문제였다.
이 여자는 알까?
자신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깨물어주고 싶어진다는걸.
우현은 하루를 향해 뻗어가는 손을 간신히 붙들었다.
“음. 글쎄요. 음. 얘, 남자예요?”
“여자야.”
“그럼, 음. 귀엽고 착하고 사랑스러우니까 착순이 어때요?”
“……이하루 씨는 본인의 작명 센스가 남을 지적할 수준은 아니라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없는데요.”
“그럼 앞으로 생각하도록 해.”
“네, 그럴게요.”
둘은 말없이 걸었다.
대화가 없는데,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쌀쌀한 바람이 귀를 시리게 했지만 고즈넉한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게 기분 좋았다.
하루는 슬쩍 우현을 돌아봤다.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한 우현의 옆모습은 조각 같았다.
‘계약연애를 한 지 벌써 2주일이 지났는데, 이 남자는 한결같네.’
슬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우현이 연애를 하는 모습이라면, 우현은 결코 나쁜 남자 축에 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다정하고 상냥한, 연애 생각이 없는 하루조차도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을 정도로 완벽한 남자였다.
‘그럼 왜 그렇게 자주 차인 거지? 왜 그 여자들은 이 남자한테 그렇게까지 화가 났던 거야?’
우현이 차이는 기간은 2주에서 3주 사이였다.
그렇다면 2주에서 3주 사이에 본성이 드러난다는 건데, 하루는 그와 2주를 사귀었음에도 그의 본성을 보지 못했다.
‘오늘쯤 본성을 보이려나?’
그때, 우현이 걸음을 멈추기에 하루도 멈췄다.
우현이 하루를 돌아봤다.
“이하루 씨.”
“예?”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우현이 하루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처음부터 둘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기에, 그가 한발 다가온 것만으로도 그의 향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우현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의 입술이 하루의 귓가에서 멈췄다.
“내가 이하루 씨 시선을 잡아끌 만큼 멋진가, 하고 우쭐해져서.”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떨어져 있을 때보다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 울림이 귓바퀴에서부터 시작되어 목덜미까지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이하루 씨에게 키스를 해도 괜찮은 순간인가, 하고 고민을 하게 되는데.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