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16화 (16/119)

#(16) 귀여운 사람

재현은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에 눈이 시렸다.

아까 켜놓은 한글 프로그램에 홀로서기, 이별, 이하루라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홀로서기와 이별전문가에 대한 글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이하루라는 이름을 쓰려던 건 아닌데.

오늘 딱 하루,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봤을 뿐인데 마치 몇 년을 알아온 것처럼 그녀의 생각을 하는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상형이고, ‘첫눈에 반했다.’라고 말할 만한 상황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그녀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정상인 걸까?

‘비정상이지. 암, 비정상이고말고. 이하루 씨가 이 모니터를 보면 소름이 끼칠 거야. 나도 지금 내 자신에게 소름이 끼치는 중이니까.’

하루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할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그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 자신의 상태를 보니 그러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그냥 생각하고 싶은 만큼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 막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된 어린애도 아니고, 진짜 진상이네.’

자신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내리며 미간을 문지르는 동안에도, 휴대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제야 휴대폰을 확인했더니 [조희정]이라는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름을 보는 순간 한숨이 나왔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희정 성격에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어댈 것이 뻔하기에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어.”

[만나봤어?]

희정은 인사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누구를? 우리 엄마? 엄마라면 어제 만났어. 네 걱정하시더라.”

[아, 어머님이 내 걱정하셨어? 걱정을 끼쳐드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희정의 목소리가 가늘게 변했다.

어른들 앞에서 착한 척을 할 때 사용하는 말투였다.

아, 말하지 말걸.

재현은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아니, 만나봤냐니까.]

희정은 곧바로 재현에게 사용하는 말투로 돌아갔다.

까랑까랑하고 후려치는 말투.

“그러니까 누구를?”

알면서도 되물었다.

[우현이 오빠!]

“안 만났어. 형, 바빠. 나도 바쁘고.”

[허구한 날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바쁘긴 뭐가 바빠? 우현이 오빠도 그래. 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는 해도, 허구한 날 칼퇴하더라. 이 형제는 하나도 안 바쁘면서 바쁜 척은 되게 한다니까, 진짜.]

확 쥐어박아주고 싶다.

“야, 조희정. 너는 나한테 부탁하려고 전화를 걸었으면서 말투가 왜 그러냐? 설설 기면서 부탁을 해도 들어줄까 말까 한데.”

[비싼 척하지 마, 강재현. 너 할 일 없는 거 빤히 알고, 어차피 형제니까 만나기는 만날 거 아냐. 만나는 김에 상황 좀 살펴보는 게 그렇게 어렵니? 이런 게 어렵게 느껴질 정도로 지능이 딸려?]

이 여자를 진짜!

재현은 희정과 대화를 할 때마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곤 했다.

성격 좋은 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희정 앞에서는 도저히 성격이 좋아질 수가 없다.

희정 앞에서도 좋은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성자였다.

[나, 우현이 오빠 딴 여자한테 줄 마음 없어. 그동안은 연애 실컷 하고 놀 만큼 놀아본 다음에 결혼은 나랑 하라는 입장이었는데, 안 되겠어. 나도 이제 나이가 찼고, 우리 집안에서도 슬슬 결혼 생각하라고 난리야.]

“그럼 우리 형 같은 남자 말고 좋은 남자를 만나는 건 어때? 집안 좋고 성격 좋은 남자 많잖아.”

[걔들은 못생겼잖아!]

“……잘 찾아보면 괜찮게 생긴 애도 있을 거야.”

[지랄. 야, 너도 알잖아. 강우현 같은 얼굴이 어디 흔하니? 그 잘났다는 강재현도 강우현 옆에 서면 똥덩어리가 되는 판에, 어디서 그런 얼굴을 찾아?]

“똥덩어리는 좀 심했다, 야.”

[아무튼 얼른 우현이 오빠 만나 봐. 안 그러면 나, 회장님 만나러 갈 거야.]

“회장님? 너네 아버지?”

[내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빠를 만나서 뭐해? 머리 진짜 안 돌아가시네. 너네 할아버지 만날 거라고, 내가!]

‘그걸 모르겠냐. 피하고 싶은 일이니까 이러는 거지.’

재현은 한숨을 삼켰다.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서 뭐 하게?”

[우현이 오빠랑 결혼시켜달라고 하게.]

“자존심도 없냐, 넌?”

[강재현. 원래 진짜 갖고 싶은 걸 갖기 위해서는 자존심 같은 건 버릴 줄도 알아야 프로인 거야.]

“대체 뭐의 프로가 되고 싶은 건데? 거기다 지난번에는 자존심 때문에 먼저 연락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어?”

[아, 됐고. 아무튼 그렇게 알아둬. 이번 주까지 연락 안 주면 바로 회장님 찾아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띠링-

희정은 자기 할 말만 끝내고는 전화를 끊었다.

재현은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며 어깨가 움직일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성가신 여자다.

어쩌다가 이런 여자와 친구가 되어서는.

‘아니, 친구도 아니지.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알고 지내는 거니까.’

희정은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다.

재현이 이번 주 안으로 우현을 만나고 결과를 보고하지 않으면, 희정은 강 회장을 찾아가서 온갖 알랑방귀는 다 뀌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것이다.

‘거기다 할아버지는 우현이 형을 결혼시키고 싶어 하니까…….’

집안도 좋고, 성격도 좋은(물론 집안 어른들 한정이지만) 희정이라면, 강 회장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강 회장이 나서서 우현과 희정을 결혼시키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게 뻔하다.

‘우현이 형 성격에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고…… 분명 우리 할아버지 심장 부여잡을 일이 생길 거야.’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뭐, 어머니도 걱정하고 계시니까 겸사겸사 근황 좀 살펴보고 오는 것도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재현의 눈에 모니터에 뜬 이하루의 이름이 보였다.

‘그래, 나도 잠깐은 이하루 씨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고.’

+++

하루는 데이트를 하는 날만큼은 우현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해보자, 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현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잘도 행동하는데, 아무리 연기라고는 해도 우현에게 호호 웃으며 달콤한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적어도 우현이 하는 말에 호응이라도 해주려 했지만, 그조차 쉽지 않아서 뚱한 반응이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그런 하루를 앞에 두고도 연인처럼 행동할 수 있는 우현에게 존경의 마음이 생기고 있었다.

이 남자의 성격이 개차반이든, 쓰레기든, 프로 정신만큼은 본받을 만하다.

“이하루 씨는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먹나?”

“네, 우리 회사 밥, 맛있잖아요.”

“그렇군.”

“강우현 씨는요?”

“난 보통 밖에서 먹어.”

“혼자?”

“혼자. 같이 먹을까?”

“에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실까.”

우현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하루 종일 이하루 씨를 보고 싶은데, 이하루 씨는 그렇지 않은가 봐.”

바로 지금이다.

지금 ‘저도요.’라고 대답을 해야 해!

“하하하하.”

하지만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저도 하루 종일 강우현 씨를 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으아, 오글오글.

“이하루 씨는 취미가 뭐지?”

“저는 독서도 좋아하고, 그냥 멍하니 누워 있는 것도 좋아하고 그래요. 강우현 씨는요?”

“나는 산책.”

“의외네요. 골프 치러 다니실 줄 알았는데.”

“강아지를 키우다 보니.”

“아, 누렁이요?”

“응? 아, 응. 누렁이.”

“그래도 잘 돌봐주는 주인인가 보네요. 아, 우리 슬슬 일어나요. 누렁이가 기다리겠어요.”

“우리 누렁이는 주인의 연애를 응원하는, 속 깊은 녀석이지.”

“그건 강우현 씨 생각 아닐까요?”

“아냐. 걔는 속이 깊어. 이하루 씨도 만나보면 알 거야.”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우현은 귀여웠다.

강아지를 의인화해서 표현하는 우현을 보면, 이 남자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척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귀엽네요.”

“응?”

“강우현 씨요. 귀여워요.”

진짜 연애하는 척하기 위해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한 말인데, 그 결과가 정말 놀라웠다.

우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시선이 옆으로 돌아가더니, 얼굴이 붉어진 것이다!

귀엽다는 칭찬 하나에 우현이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우현이라면 ‘내가 한 귀여움 하지.’라든가, ‘귀여운 게 아니라 멋있는 거지.’ 따위의 대꾸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그의 모습에, ‘내가 지금 꿈을 꾸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거 신선한 반응인걸?

놀라운 기분에 하루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귀엽다는 말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아, 그래요? 엄청 귀여운데.”

“하하.”

언제나 하루가 흘리던 어색한 웃음을, 이번에는 우현이 흘렸다.

옳다구나, 싶었다.

지금까지 하루가 난감하고 당혹스런 기분을, 우현도 느끼게 해줄 기회였다.

“이렇게 귀여운 사람한테 귀엽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니. 앞으로 제가 많이 해드릴게요. 강우현 씨, 정말 귀엽거든요.”

우현은 하루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이거 되게 재밌네.’

이래서 우현이 자꾸 하루가 간질거릴 말만 골라 했나 보다.

“왜 그런 눈빛인 거지?”

이윽고 우현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물었다.

‘표정 변화 빠르기는.’

그래도 우현이 간지러운 말을 들었을 때 당황한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이제부터는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우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러나 우현의 집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재현을 발견하자마자 미소가 사라졌다.

하루와 함께 보낸 꿈같은 시간은 정말 꿈이 되어버리고, 도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현관문을 응시하고 있던 재현이 인기척을 느낀 듯 이쪽을 돌아봤다.

우현을 발견한 재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형!”

재현이 우현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우현의 무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우현에게 팔짱을 끼었다.

재현이 불편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이었다.

재현은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했고, 우현이 아무리 뭐라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쇠심줄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형이 집에 있는데도 무시하는 줄 알고 상처받을 뻔했어. 형은 원래 칼퇴하지 않아? 이 시간에 당연히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야근이라도 한 거야?”

재현의 형, 형 타령도 불편했다.

우현은 대꾸하지 않고 집 앞까지 걸어가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려 했다.

재현이 빤히 보고 있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사생활 보호 좀 해주지?”

“아, 미안.”

재현이 경쾌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완전히 옆으로 돌린 후에야, 우현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띠띠띠띠띠-

재현에게 비밀번호가 몇 자리인지 알려지는 것조차 싫었다.

재현이라면 어떻게든 그 자릿수의 번호를 조합해 비밀번호를 알아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재현은 당연한 듯 우현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우와, ‘하루’야. 오랜만이야.”

재현이 문 앞에서 반겨주는 골든래트리버를 꼭 끌어안고 인사를 건넸다.

하루라는 이름이 재현의 입에서 나오니 기분이 묘했다.

당분간 ‘하루’는 ‘누렁이’일 거라고 말해줄까 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재현과 하루가 마주칠 일도 없으니, ‘하루’의 이름을 하루에게 들키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루’, ‘하루’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떠올리다 보니, 이런 와중에도 그녀가 그리웠다.

재현은 ‘하루’를 끌어안은 채로 우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형,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지?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

아, 그래서 찾아온 거군.

우현의 가슴에 불쾌함이 번졌다.

우현은 김 여사의 가식적인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아들을 걱정하는, 좋은 엄마인 척하는 태도.

“신경 끄시라고 전해드려.”

우현의 쌀쌀맞은 대꾸에 재현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재현은 다시 웃는 낯으로 일어났다.

“요새 어떻게 지내? 잘 지내고 있어? 연애는 하고 있고?”

이번에는 우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까지 연애 타령이냐?”

강 회장은 우현만 보면 ‘연애’와 ‘결혼’ 타령을 해댔다.

“에이, 형. 나는 할아버지랑은 다르지. 난 순수하게 형을 걱정하는 거야. 우리 형이 집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내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잠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눈물 흘릴 일도 없고, 연애도 잘하고 있으니 걱정할 거 없어.”

“어?”

재현의 눈이 커졌다.

“왜?”

“벌써 또 연애 중이야?”

“그래. 문제 있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재현은 말을 얼버무렸다.

우현 성격에 희정의 부탁으로 근황을 살펴보러 온 걸 알면 어마어마하게 화를 낼 것이다.

‘이거, 희정이한테는 어떻게 말하지? 그냥 말하지 말까?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가라.”

재현의 고민을 꿈에도 모르는 우현이 나직하게 명령했다.

우현의 손가락이 현관문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형님이시다.

“형, 간만에 봤는데 형제끼리 맥주도 한잔하고…….”

“알 텐데. 난 널 형제로 생각한 적 없다는 거.”

“이제 슬슬 생각해줘. 나, 귀엽잖아. 귀여운 동생.”

우현이 입을 꾹 다물고 재현을 가만히 노려봤다.

여기서 조금 더 하면 진짜로 화낼 것 같다.

재현은 웃으며 두 손을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

“네, 네. 헛소리 지껄여서 죄송합니다. 그만 가볼게. ‘하루’야, 안녕. 다음에 봐.”

도망치듯 우현의 집에서 나온 재현은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우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재현은 우현이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우현이 원망스럽다기보다는 안타까웠다.

‘그나저나…… 벌써 연애를 하고 있다니.’

아무리 할아버지의 명령이라지만, 우현도 참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이 사실을 알면 희정이는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러니까 난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 괜히 불똥 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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