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15화 (15/119)

#(15) 꿈을 꾸는 기분이야.

수요일이 ‘그날’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해뒀다.

하지만 점심시간인 12시가 딱 되자마자 사무실 문이 열리고 우현이 등장할 줄은 몰랐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부터, 파티션 너머를 보지 않아도 우현이 찾아왔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도 아니기를 빌며 슬며시 고개를 들자, 그 위용도 당당하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우현의 모습이 보였다.

‘저 인간이 진짜!’

회사에서는 모르게 하고 싶다, 사무실로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말해뒀는데, 귓등으로 안 들었나 보다.

다정한 척, 상냥한 척은 다 하지만, 결국 자기 멋대로 하는 남자다.

저러니까 차이지.

하루는 또 어떻게 직원들에게 둘러대야 하나 고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였다.

“이봐, 강우현 팀장!”

본부장이 우현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며, 아주 단호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우현이 하루를 스카우트하려고 한다는 걸 아주 못마땅해했는데, 한소리하려는 모양이다.

다들 숨을 죽이고 본부장을 향해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하루 역시 속으로 응원을 하며 본부장과 우현을 지켜봤다.

본부장이 단호하게 부르며 바로 앞에 멈췄는데도, 우현은 무표정하게 본부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키 차이가 많이 나서 본부장이 올려다보고, 우현은 내려다보는 형상이었다.

“강우현 팀장, 자네 말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본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우현은 무표정했지만 그 검고 깊은 눈동자가 본부장을 찌를 듯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부장은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봤다.

사무실 내의 모두가 기대에 찬 눈으로 본부장을 보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그래봐야 팀장에 나이도 어린 녀석일 뿐.

그런 녀석이 우리 부서의 인재인 하 대리를 데려가려고 하다니,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이건 부서 간의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아주 중대한 사안이다.

“본부장님.”

본부장이 마음을 다잡는데, 우현이 낮은 목소리로 본부장을 불렀다.

“저한테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아주 정중한 존댓말이지만, 어째서인지 위협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강우현 팀장. 자네 말이야.”

그때, 우현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본부장의 눈에는 그 빛이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어째 날이 갈수록 멋있어져? 대체 몰래 뭘 챙겨 먹는 거야? 나도 같이 좀 챙겨먹자.”

그 순간, 부서 직원들의 실망에 찬 한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부장은 생각했다.

‘니들도 얘 앞에 서봐!’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붑니까?”

“어? 어, 점심 맛있게 먹으라고. 그 말 하려고 했지. 좋은 거 먹을 땐 나도 좀 부르고.”

“그럼 지금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니,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본부장은 두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보아하니 우리 하 대리 데리고 가려고 온 모양인데,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야지. 젊은 사람들끼리 좋은 시간 보내.”

배신당한 하루가 보내는 원망 섞인 시선이 느껴졌지만, 본부장은 무시했다.

‘미안해, 하 대리. 나도 살아야지.’

본부장에게 내쳐진 하루가 입술을 비쭉거리며 우현의 뒤를 따라 나간 후, 나희가 벌떡 일어나 본부장에게 다가왔다.

“아니, 본부장님! 하 대리를 팔아넘기는 게 어디 있어요?”

“팔아넘기다니! 강 팀장, 돈 많은 사람이야. 끌고 다니는 차 봤지? 아마 아주 비싸고 맛있는 음식 사줄 거야.”

“비싸고 맛있는 음식이 문제예요, 지금? 직급도 한참 높으신 분이 왜 그렇게 쩔쩔매요? 우리 하 대리 건드리지 마라, 우리 팀이다. 데리고 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야죠.”

“그럼 장 대리가 하지 그랬어?”

“전 대리잖아요! 고작 대리가 어떻게 팀장한테 큰소리를 쳐요?”

“그래? 그럼 정한서 과장! 지금 날 엄청 노려보는데, 정 과장이 말하지 그랬어? 정 과장도 팀장이잖아!”

“예? 저요?”

본부장을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놈 보듯 노려보던 한서가 얼른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에이, 본부장님. 전 가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홀몸이 아니라고요.”

“나는 뭐 홀몸인 줄 알아? 나는 애도 있어! 그런데도 나서기는 했잖아, 나서기는! 자기들은 꼼짝도 안 하고 있었던 주제에.”

“하 대리를 팔아넘길 바에야 꼼짝도 안 하는 게 낫죠. 본부장님은 아예 강 팀장 등을 떠민 거잖아요. 이제 거리낄 것도 없어졌으니 허구한 날 우리 부서 들락거리게 생겼네.”

부서 사람들이 서로의 패기 없음에 대해 논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하루는, 우현의 등을 노려보며 걷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하루를 데리고 나온 주제에, 우현은 당당하게 정면만 보면서 걷고 있었다.

저 넓은 등짝을 손바닥으로 세게 후려칠 수만 있다면 원이 없겠다.

‘하지만 저 인간은 내가 후려치는 순간 경찰에 고소할 인간이야. 건드리지 말아야지.’

엘리베이터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점심을 먹기 위해 안에 타 있던 사람들이 우현을 보고는 흠칫 놀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이 남자는 회사에서 어떻게 살아왔기에, 본부장까지 저렇게 벌벌 떨게 만드는 걸까?

밥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하루는 입을 꾹 다물고 화가 났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했다.

이윽고 우현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지?”

“제가 우리 사무실에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난 알겠다고 한 적 없는데.”

옳으신 말씀이었다.

하루는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수요일은 연인이 되는 날이고, 연인이라면 응당 같이 점심을 먹고 싶지 않나?”

“네, 네. 항상 옳으신 말씀만 하시니 제가 할 말이 없네요.”

“그건 안 좋군. 나는 이하루 씨 목소리를 많이 듣고 싶은데.”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많이 들을 일 없을걸요.”

“이런 식이라는 게 어떤 건데?”

“말했잖아요. 회사에서 사무실 찾아오지 말라고. 스카우트 제의받았다는 것도 다들 안 믿는 눈치라고요. 더 이상 변명할 말도 없어요.”

“그럼 그냥 사귄다고 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실까.”

우현과 사귄다는 말을 하라니. 그건 절대로 안 된다.

계약연애라든가, 사내연애라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번 직원 식당에서 우현을 죽이기 위해 머리를 모으는 여자들에게, 그리고 그 여자들과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을 사람들에게, 우현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하루를 동정하고, 이상하게 여기고, 하루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것이다.

하루는 정상인으로 보이고 싶었다.

“나랑 연인인 게 뭐가 문제지? 아, 혹시 나 같은 남자와 이하루 씨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러나?”

“네, 어울리지 않죠.”

난 정상인이니까!

난 계약연애의 프로도 아니고, 개차반도 아니고, 한 달에 두세 번씩 차이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거 없어. 이하루 씨는 충분히 예쁘고 나와 사귀기에 부족함이 없어.”

“네, 네.”

우현이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루는 구태여 그 부분을 고쳐주지 않았다.

둘은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매운갈비찜을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협소하고 허름하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맛있어서, 손님이 많은 가게였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온 거라 다행히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우현은 그 공간과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정장을 입고 잿빛 코트까지 걸친 우현은 전망대가 있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 우현이 들어가자 시선이 모였다.

아니, 꼭 차림새 때문이 아니라 저 얼굴 때문이겠지.

쓸 데 없이 잘난 저 얼굴.

2인용 식탁에 앉아 매운갈비찜 두 개를 시켰다.

“계속 그렇게 화내고 있을 거야?”

테이블만 내려다보는 하루에게, 우현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순간 하루는 우현이 ‘진짜’ 애인이라는 생각이 들 뻔 했다.

“강우현 씨. 저 진짜로 허투루 하는 말 아니에요. 회사 사람들한테 강우현 씨와 제 관계를 알리고 싶지 않아요.”

“왜? 내가 부끄러운가?”

네! 부끄러워요!

라는 말은 물론 하지 못했다.

“부끄럽다기보단…… 전 회사에서 연애를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1년이 지나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로 돌아갈 때도 곤란해질 것 같고요.”

“흐음.”

“전 그냥 솔로로 사는 걸 좋아하는, 우아하고 고독한 백조 같은 프로그래머로 회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요.”

“우아하고 고독한 백조라.”

“부탁이에요, 강우현 씨. 제가 우아하고 고독한 백조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줘요.”

“그래, 알겠어. 그게 이하루 씨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줘야지.”

의외로 우현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진짜죠? 그 말, 무르기 없어요? 다음 주 수요일에 찾아오고, 그러기 없는 거예요.”

“대신에.”

“아, 조건이 붙는구나. 그래요, 뭔데요?”

“수요일 퇴근 시간, 그리고 토요일. 우리가 연애를 하기로 한 날에는 제대로 내 연인으로 행동해줘.”

“그거야 뭐…….”

하루는 입안에 공기를 넣고 볼을 부풀렸다.

우현이 저렇게 나오니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우현은 하루의 약점을 잡았으면서도 공짜로 계약연애를 들이밀지 않았다.

월 300만 원이라는 큰돈까지 주면서 하루를 고용한 데다가, 데이트를 하는 동안 하루를 하녀처럼 부려먹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시종이 된 듯 하루를 배려해주었다.

그런데도 하루는 어떻게든 우현을 떼어낼 생각만 했지, 충실하게 계약 이행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었다.

“알겠어요. 제대로 할게요.”

물론 그가 첫눈에 반할 만한 여자를 찾아내는 일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요, 강우현 씨.”

“응.”

“이상형이…….”

거기까지 말하고 하루는 말을 멈췄다.

지난번에도 이상형을 물었더니 ‘이하루 씨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렇다면 ‘연인’이라는 설정 하에 질문을 해야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겠지.

하루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강우현 씨는 제 어디가 좋아요? 아, 전부 다, 라는 대답은 빼고요.”

자, 어때? 이제 세세하게 대답해주는 수밖에 없지?

하루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우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현은 하루를 지그시 응시했다.

괜히 찔려서 덧붙였다.

“저에 대해 특별히 좋은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더욱 갈고닦아 강우현 씨가 더욱더 저를 좋아하도록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하하하.”

아, 마지막 웃음은 덧붙이지 말걸 그랬다.

너무 어색하다.

하지만 의외로 이 변명이 먹혀들었는지 우현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발견한 빛이야.”

“예?”

“내가 손에 넣어도 될지, 너무 큰 욕심은 아닐지 걱정되지만…… 난생처음으로 본 빛이라서, 그 빛이 너무 예뻐서. 놓을 수가 없어.”

당황했다.

가볍게 던진 질문이니, 가벼운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저 계약연애일 뿐이니, 프로답게 얼굴이 마음에 들고 웃는 모습이 괜찮고, 그 정도의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이렇게 진지하고 깊은 대답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루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현을 응시했다.

‘빛이라니.’

그저 예쁘게 표현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이건 정말로 나를 향해서 하는 말? 아니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은 다른 대상이 있는 건가?’

우현의 진지한 반응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다음 순간, 우현의 만면에 번진 미소가 하루의 심장을 콱 낚아챘다.

입가에서 시작되어 조용히 번지는 다정하고 달콤한 미소가 어찌나 예쁜지, 하루는 그만 숨을 멈추고 말았다.

‘우와, 깜짝이야.’

하루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저 미소를 계속 보면 정말로 착각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저 남자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이하루 씨.”

고개를 숙인 하루를, 우현이 부드럽게 불렀다.

“네.”

“얼굴 좀 보여줘. 토요일 밤부터 오늘까지, 이하루 씨가 정말 보고 싶었거든.”

“……네, 그러죠.”

하루는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우현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 전 직원 식당에서 들은 강우현과 도통 겹쳐지지 않았다.

“저기, 강우현 씨. 혹시 쌍둥이 형제 있으세요?”

“형제는 있지만 쌍둥이는 아닌데.”

“그럼 그 형제랑 엄청 닮았다거나.”

“우린 전혀 닮지 않았는데.”

“아, 그러시구나. 그럼 혹시 도플갱어의 존재를 믿으세요?”

“이하루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네,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밥이나 먹죠. 우와, 맛있겠다.”

하루가 기계적으로 말하며, 방금 나온 뚝배기에서 갈비 하나를 건졌다.

그걸 자기 앞접시에 놔두고 먹으려는데, 우현이 자신의 뚝배기에서 갈비 하나를 꺼내 하루의 앞접시 위에 올려놨다.

“많이 먹어, 이하루 씨.”

“아…….”

연인이라면 서로의 것을 먼저 챙겨줘야 하는 거겠지.

하루는 자기 앞에 내려놨던 갈비를 집어 우현의 앞접시에 놔주었다.

“강우현 씨도 많이 드세요.”

“응.”

문득 도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도 그 남자가 널 칭찬하면 두 배로 그 남자를 칭찬해주고, 그 남자가 널 배려하면 두 배로 더 그 남자를 배려해주는 거야.

물론 우현에게 월 500으로 올려달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그동안 프로답게 행동하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잘해보기로 했다.

하루는 갈비 하나를 더 건져 우현의 앞접시로 옮겼다.

“이것도 드세요.”

“아냐. 이하루 씨 먹을 것도 없잖아.”

“아니에요. 아직 갈비 두 개나 더 들어 있고. 강우현 씨가 많이 먹는 게 좋아요, 전.”

하루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을 했다.

당신이 많이 먹는 게 좋아요, 라니.

말을 해놓고도 온몸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우현은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우현의 눈이 커졌다가 곧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가늘어진 눈으로 하루를 보며 우현이 말했다.

“이하루 씨가 날 이렇게 챙겨주다니. 정말 꿈을 꾸는 기분이야.”

그의 달콤한 말을 들으며, 하루는 생각했다.

‘도경아. 나는 도저히 저런 말은 못하겠어. 아무래도 난 계약연애의 프로는 될 수 없을 것 같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