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12화 (12/119)

#(12) 프로가 되어봅시다.

하루는 반쯤 비운 그릇을 내려다봤다.

식탐을 부리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부릴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 중이었다.

하루에게는 접시까지 먹어치울 만큼 크고 단단한 위장이 없었다.

‘여기서 접시까지 먹어주면 아무리 이 남자라도 학을 뗐을 텐데. 이제 그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나?’

사용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이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는 말이 있죠.

제 여자친구가 딱 그런 타입이에요.

종업원들 대할 때 태도를 보면, 무슨 노예를 부리나 싶어요. 창피해서 같이 다닐 수가 없어요.]

어느 이별 의뢰 글에서 본 내용이었는데, 하루도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대학 때 어떤 선배가 종업원들 앞에서만 센 척을 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형편없어 보여서 다들 뒤에서 그 선배를 욕하곤 했다.

‘막 대해야 한다니.’

열심히 일하는 종업원의 모습을 보니 영 할 맛이 안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사정이 급해서요.’

하루는 마음을 다잡고, 옆으로 지나가는 종업원을 날카로운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이봐, 아저씨!”

아직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종업원이 놀란 눈으로 하루를 돌아봤다.

“지금 이거 안 보여……요? 식탁 더럽잖아……요. 안 닦고 뭐해요?”

반말로 할 생각이었지만 말하다 보니 반말은 너무 심할 것 같아서 존댓말을 사용했다.

“예?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어요. 죄송할 건 저예요.’

하루는 속으로 사과하며 슬쩍 우현을 돌아봤다.

우현은 무심히 하루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봐서인지 정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벌떡 일어나서 가버리지 않을까?

“죄송하면 단가요? 이런 거 하시라고 돈 드리는 건데, 제대로 못 하시면 어떡해……요?”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거렸다.

종업원은 황급히 하루의 앞에 어질러진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루에게 모욕당했다는 분노로, 식탁을 치우는 종업원의 손이 떨리는 듯 보였다.

그런 하루를 지켜보는 우현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종업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서 우현의 정을 떨어뜨릴 생각이었을 텐데, 저렇게 존댓말을 꼬박꼬박 써서야 이쪽 정이 떨어질까 싶었다.

‘나라면 좀 더 제대로 무례하게 행동할 수 있었을 텐데.’

상대방을 짓밟는 게 어떤 건지 한 수 가르쳐주고 싶을 정도로, 하루는 어설펐다.

식탁을 다 치운 종업원이 자리를 떠난 후, 하루가 말했다.

“하여간 저렇게 일 못 하는 것들, 딱 질색이에요.”

‘자, 어서 나 같은 여자한테 질렸다고 하고 일어나!’

라고 생각했지만, 우현은 빙그레 웃었다.

“동감이야. 우리는 마음이 통하네.”

망했다.

하루는 ‘진심이에요? 나, 지금 되게 심했잖아요! 못된 년이었다고요!’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이 진상을 동감이라는 한마디로 쉽게 넘어가버리다니.

‘난 죄 없는 종업원한테 상처를 잔뜩 줬는데!’

하루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디 가?”

우현이 같이 일어서며 물었다.

“화장실요! 따라오지 마세요!”

우현이 도로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후, 하루는 아까 종업원이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종업원은 주방 옆쪽 공간에서 짜증난 표정으로 행주를 빨고 있었다.

“저기, 종업원님.”

하루의 부름에 고개를 든 종업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루는 종업원의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정말 죄송해요. 아까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제가…… 꼭 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상처받으셨죠? 진짜 죄송해요.”

종업원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으실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종업원님이 잘 챙겨주신 덕에 식사도 맛있게 하고 좋은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는 건데. 진짜 죄송해요. 너무 죄송합니다.”

“아니요, 진짜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일어나세요.”

하루가 종업원에게 과할 정도로 사과를 하고 있을 때, 우현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루는 모르나 보다.

종업원에게 사과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는걸.

‘바보 같긴.’

하루는 어릴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순진하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다.

‘변한 건 나뿐인가?’

우현은 곧 쓰게 웃었다.

‘아니, 나도 그때와 똑같지. 나야말로 변한 게 없어.’

그런데 하루는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걸까?

이제는 슬슬 알아봐줘도 좋을 텐데.

+++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건 꽤 늦은 시간이었다.

아침을 먹은 후, 우현은 놀이공원을 가려고 했다.

놀이공원 근처로 왔을 때부터 설마설마 했는데, 우현은 진짜로 데이트 코스의 정석을 밟고 있었다.

-싫어요. 지금 이 꼴로는 못 가요.

놀이공원 입구에서, 하루가 버텼다.

오늘 하루는 미친 것처럼 보내자고 결심했지만, 한껏 꾸미고 나들이 나온 사람들을 보니 거기에 섞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우현의 정을 떨어뜨리기 위한 모든 계획을 실패했다는 걸 깨달았기에, 더는 그렇게 입고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꼴이 어때서?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

우현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고, 표를 사려고 기다리던 커플들의 황당하다는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말했잖아. 난 이하루 씨랑 같이 있으면 우쭐해진다고.

우현은 확인사살까지 했다.

우현의 발언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한 심정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집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간신히 우현을 설득해서 놀이공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드라이브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햄버거를 사와서 차 안에서 먹었고, 저녁은 집 근처 국밥집에서 먹었다.

아침, 점심, 저녁까지 함께 먹었는데도 우현은 헤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고, 덕분에 카페에 가서 빨간 바지에 노란 티셔츠 차림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만약 이 모든 것이 하루를 엿 먹이기 위한 우현의 계획이었다면 성공이다.

자신이 세운 계획에 자신이 큰 타격을 입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주 제대로 알게 됐으니까.

“아, 진짜!”

하루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발차기를 했다.

“아악! 카페에 동네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봐? 으아!”

우현은 하루로 하여금 이불킥을 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에이, 뭐. 상관없지. 이사 올 때 떡을 돌리는 사이도 아니고.”

하루는 빠르게 회복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맞은편으로 보이는 거울에 하루의 모습이 비쳤다.

빨간 추리닝 바지에 노란 티셔츠, 거기다 침대에서 뒹구는 바람에 부스스해진 헤어스타일까지.

아주 진상이 따로 없다.

입술을 비쭉 내밀고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6번 출구]

우현에게 온 전화였다.

왜 또 전화를 한 거람?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강우현 씨.”

[난 잘 들어왔어.]

“아, 그러시구나.”

[잘 자라는 인사하려고.]

다정한 음성에 소름이 돋았다.

얼굴을 마주 보고 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 남자는 지금 어떤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계약연애의 달인답게 하루가 못 보는 상황에서도 다정하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을까?

오늘 내내 하루에게 보여준 다정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아주 잠깐 심장이 두근거렸다.

우현은 정말 얼굴만큼은 심각하게 잘생겨서, 그게 전부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멈추기는 힘들었다.

연애에도, 남자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하루조차 이 지경이니, 평범한 여자들은 오죽할까.

외모만 보고 푹 빠지는 사람들을 욕할 게 못 된다고, 하루는 생각했다.

“네, 강우현 씨도 잘 주무십시오.”

기분 탓일까?

우현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지금 웃으세요?”

[아니. 왜?]

“웃으신 것 같아서요.”

[안 웃었어.]

“그래요, 그럼 그렇다 치고…… 강우현 씨,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그를 떼어내기 위해 준비한 방법들이 하나도 먹히지 않았으니, 이제 그의 이상형을 찾아내주는 수밖에 없어서 던진 질문이었다.

[이하루 씨야.]

“……그런 뻔한 대답 말고요.”

[정말로 이하루 씨야. 그러니까 사귀지.]

“아, 예. 그러시겠죠.”

아무래도 이 남자에게서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더 괜찮은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웡!]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지금 누렁이예요?”

[응.]

“우와, 누렁이. 아, 진짜 누렁이란 이름은 별로네요. 그 아이를 위해 개명해줄 생각은 전혀 없는 거예요?”

[없어. 누렁이를 누렁이라 하지, 그럼 뭐라고 해?]

“그럼 강우현 씨는 얼굴이 하얗고 머리랑 눈이 까마니까 점박이라고 불러도 되겠네요.”

[원하는 대로 불러. 이하루 씨가 불러주는 이름이라면, 뭐든 좋으니까.]

“네, 이름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계신다는 거, 아주 잘 알았습니다. 얼른 주무세요.”

[그래. 이하루 씨도 잘 자.]

우현의 음성은 끝까지 부드러워서, 심장 부근이 조금 간질거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막 11시가 지났다.

토요일은 ‘연인’이어야 하기에 잘 자라는 인사까지 하려고 전화를 한 모양이다.

계약에 있어서만큼은 아주 꼼꼼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지켜보는 사람도 없고, 어긴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충실히 계약을 이행하다니.

그것도 갑의 입장이면서.

그런 생각을 하며 씻기 위해 일어서는데 또 휴대폰이 진동했다.

우현이 다시 전화를 건 건가 싶어서 확인했는데, 이번에는 [근육바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도경이다.

안 그래도 도경과 할 얘기가 많았기에, 하루는 반가운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리가또.]

“모시모시, 라고 하려던 건 아니겠지?”

[아, 맞다. 그거.]

“그냥 평범하게 한국말을 쓰는 건 어떨까? 너 한국어도 전부 파악하지 못했잖아.”

[아하하하하. 예리하긴. 뭐해?]

“방금 들어왔어. 너, 지금 어디야?”

[너네 집 근처 편의점. 라맥하자, 라맥.]

“평범하게 라면에 맥주라고 하면 안 돼? 그게 얼마나 길다고 말을 줄여?”

[얼른 나와, 라맥하게.]

하루는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나와 편의점 앞에 있는 도경을 발견했을 때에야 빨간 바지에 노란 셔츠 차림 그대로라는 걸 깨달았다.

‘도경인데 어때.’

하지만 상대는 도경이었다.

하루가 침 질질 흘리면서 자는 모습까지도 본 사이니까 상관없다.

편의점 알바생을 마주하는 건 좀 창피하지만, 야간 알바를 볼 일은 많지 않으니까 상관없겠지.

그래도 모자라도 쓰고 나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루를 본 도경이 싱글싱글 웃으며 팔을 들어 크게 흔들었다.

역시 도경은 하루의 이런 몰골을 보고도 아무 타격이 없는 것 같았다.

도경과 함께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과 맥주를 하나씩 사서, 편의점 안에 있는 바 앞에 섰다.

컵라면이 익는 동안, 하루가 말했다.

“도경아. 나,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응, 뭔데?”

“나, 지금 예뻐?”

“하하하하하.”

도경이 크게 웃었다.

“하루야. 나 아까 널 봤을 때부터 도망치고 싶은 걸 꾹 참는 중이거든. 난 의리의 싸나이잖아! 그래서 힘껏 견디는 중이니까 헛소리 좀 하지 말아줘. 부탁해.”

부탁까지 받을 줄이야.

“그렇게 별로야?”

“하루야.”

“응.”

“미안해. 지금 널 예쁘다고 해야 하는 게 진정한 우정인 거라면…… 나한텐 우정 따윈 없나 봐.”

“됐다.”

하루는 한숨을 쉬며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갈랐다.

“왜 그러는데? 왜 이렇게 입고 나온 거야? 집에 불나서 옷이 다 타버리기라도 했어?”

“아니, 그럴 일이 좀 있었는데…… 도경아. 농담이나 연기로라도 날 보면서 예쁘다고 말해봐봐.”

“하루야.”

“응?”

“난 비위가 약한 편이야.”

“……비위까지 나올 몰골이야?”

“미안. 난 여기까지인가 봐. 난 의리의 싸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도경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이런 일로 도경이 자책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있잖아. 도경아. 물론 연기이기는 한데, 어떤 남자가 내 이런 몰골을 보고도 너무 예쁘다고, 나랑 다니면 우쭐해진다고 하더라.”

“하하하하하하. 그 남자, 미쳤나 봐.”

“응, 그런 것 같아.”

“아무리 연기라도…… 에이, 불가능이지. 어떻게 지금 네 꼴을 보고 거짓말로라도 예쁘다는 말이 나오겠어? 도망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미영이나 은서였어 봐라. 지금쯤 집에 갔을걸. 네 번호 차단했을지도 몰라.”

“도경아. 나 지금 슬슬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데?”

“기분은 내가 나빠야지! 지금 그 꼴을 한 너랑 같이 서 있는 내 입장은 생각 안 해?”

“윤도경.”

“왜!”

“네 그 근육만 아니었으면 넌 지금 얼굴에 라면 뒤집어썼어.”

“그 꼴을 하고 폭력성까지 분분하다니.”

“다분한 거겠지. 아무튼 그 남자, 진짜로 내가 이러고 다니는 데도 계속 같이 있고 싶어 하더라니까. 물론 오늘 그래야 하는 날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굳이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거든.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긴다고 패널티를 먹는 것도 아니고.”

“그 남자가 누군데 그래?”

“6번 출구.”

“6번…… 아, 너네 회사?”

“응. 사실은 말이야.”

하루는 그동안 우현과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도경은 열심히 라면을 먹으면서 하루의 이야기를 들었다.

후루룩. 후루룩.

“야, 사람이 심각하게 얘기하는데 잠깐 먹는 것 좀 멈추면 안 되냐?”

“하루야. 라면은 불면 맛이 없어. 난 살짝 덜 익은 면을 좋아하거든.”

“네 라면 취향 따위는 아무래도 좋거든! 지금 나는 일생일대의 위기에 빠져 있단 말이야.”

“그게 왜 위기야? 잘된 거 아냐?”

“잘됐다고? 대체 어디가?”

“일주일에 두 번 일하고 삼백만 원씩 더 버는 거잖아. 1년이면 얼마야? 얼마지?”

“삼천육백! 우와, 되게 많네.”

1년 치 금액을 입에 담고 나니, 그 돈을 얼마나 많은 돈인지 새삼 실감했다.

“그것 봐. 되게 많지? 네 회사 연봉이랑 비슷하지 않아?”

“적긴 하지만…… 그래도 시간 대비로 따지면…….”

“어마어마하지.”

“그러네.”

“그럼 이건 잘 된 일일까, 못 된 일일까?”

“하지만 제대로 된 일이 아니잖아. 몸을 파는 기분이란 말이야.”

“아, 그런 기분이 들 수는 있겠네.”

“응.”

거기까지 말하고 도경은 남은 라면을 후루룩,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저걸 다 먹으면 적절한 조언을 해주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도경은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서 빈 그릇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잘 먹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자. 데려다줄게.”

“……야, 윤도경.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미안. 예쁘다는 말은 도저히 못하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지금 고민이라니까. 몸 파는 기분이라서.”

“하지만 실제로 몸을 파는 것도 아니고. 기분이 드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잖아.”

“실제로 몸을 파는 거지, 이게.”

하루의 말에 도경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하루의 가까이로 허리를 굽히고 작게 물었다.

“설마…… 그런 짓도 해? 야한 짓?”

불현듯 우현과 계약하던 날,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분명 무척이나 야하게 느껴졌지만, 실제로 접촉은 없었다.

“안 해.”

“그럼 뭐, 된 거 아냐? 만약 그 남자가 어디 좀 들어가서 쉬었다 가자고 하거나, 라면 먹고 가라고 하면 거시기를 걷어차 줄 일이지만. 그게 아니라 데이트를 하는 정도라면…… 그냥 회사에서 일하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 데이트가 업무인 거지.”

“그래도 좀 기분이…….”

“나도 일할 때 몸 파는 기분이야.”

도경이 하루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네가? 경호하는 건데?”

“보호하는 사람을 막 몸으로 감싸고 그래야 하거든. 내 몸을 바쳐 고객님을 지켜야 하는 거지. 이거야 말로 몸 파는 거지, 뭐겠어?”

“하아.”

하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얘한테 상담을 한 내가 바보다.

그런 생각을 하는 하루의 어깨를, 도경이 살짝 잡아 눌렀다.

도경으로서는 아주 살짝 힘을 준 거겠지만, 하루는 그의 힘에 눌려 비틀거렸다.

“하루야.”

“응.”

“마인드를 바꿔봐. 그 남자가 계약연애의 프로라면 너도 프로가 되어주면 돼.”

“응. 그래서 난 이별의 프로로서…….”

“아니, 아니. 너랑 그 남자가 하는 건 계약연애지, 이별이 아니잖아. 그 남자는 계약연애로 상대를 하는데, 넌 이별로 상대를 하려니까 어긋나는 거야. 지금 그 남자는 계약연애의 프로로서 널 상대하고 있어. 그렇다면 너도 그 수준에 맞게 계약연애의 프로로서 행동해주면 되는 거야.”

“나는 연애해본 적이 없어.”

“그 남자가 하는 걸 그대로 돌려줘.”

“그대로? 나는 부가티 못 사! 다이아를 사주지도 못하고.”

“실제로 그걸 받은 것도 아니잖아. 그 남자도 말만 그런 거지. 그러니까 너도 말과 행동으로 그 남자를 이겨버려. 너, 나불대는 거 잘하잖아.”

“아, 내가 쫌 하지.”

하루가 우쭐해하는 모습을 보며, 도경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그 남자가 널 칭찬하면 두 배로 그 남자를 칭찬해주고, 그 남자가 널 배려하면 두 배로 더 그 남자를 배려해주는 거야. 그러면 그 남자는 너한테 푹 빠지게 되겠지. 나보다 더 계약연애의 프로가 있었다니. 이런 여자는 처음이야! 이러면서.”

“……그래?”

“당연하지. 그러면 너는 너한테 푹 빠진 그 남자한테 말하는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 도경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를 좀 더 무르익게 하려는 듯 시간을 끌었고, 하루는 도경의 수법에 말려들었다.

하루는 도경에게서 뭔가 대단한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도경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런 하루를 보며 도경이 말했다.

“월 삼백으론 안 되겠어요. 오백으로 올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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