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정을 떼는 법
토요일 오전 8시.
하루는 눈을 떴다.
한 시간 후면 우현과 데이트가 시작된다.
하루는 잠들기 전 잊지 않고 ‘애인에게 정떨어질 때’를 검색했었다.
그리하여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정 떼는 법 그 첫 번째, 꾸미지 않고 나가기.
씻지 않고 눈곱까지 붙은 상태로 나가면 효과 만점이겠지만, 도저히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씻은 다음 대충 머리를 말리고, 목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 나온 추리닝 바지를 꺼내 입었다.
티셔츠의 색깔은 노란색, 추리닝 바지의 색깔은 빨간색으로, 만약 내 친구가 이렇게 입었다면 절대 같이 다니고 싶지 않은 색상이었다.
거울 앞에 서자 동네 백수 누나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여자가 거울에 비쳤다.
노란색 티셔츠에는 한때 유행했던 애니메이션 캐릭터까지 그려져 있었는데, 너무 오래돼서 군데군데 색이 벗겨지는 중이었다.
‘관둘까?’
그 모습이 너무 형편없어서, 하루는 밖에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냐, 할 수 있어. 잠깐만 참으면 돼. 진짜로 1년이나 이런 계약연애를 계속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뭐, 내가 창피한가? 나랑 같이 다니는 그 남자가 더 창피하겠지.’
화장도 안 하고 씻기만 했을 뿐이기에, 약속시간인 9시보다 빠르게 준비가 끝났다.
어쩔까 하다가 일단 나가기로 했다.
빌라를 나가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하루를 감쌌다.
하루는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많이 추워졌네. 이제 파카를 입고 다녀야겠어.’
하루는 기모로 된 야구점퍼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는 11월 중순의 추위를 막기에 무리가 있었다.
다시 들어가서 겉옷을 갈아입고 나오려고 했는데, 빌라 맞은편 가로등 옆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우현이었다.
언제 온 건지, 우현은 쥐색 긴 코트를 입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으아, 내가 하품하는 것도 다 본 건가?’
당황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우현을 향해 걸어갔다.
“일찍 오셨네요.”
“일찍 와야지. 보고 싶었으니까.”
“아, 네. 그러시겠죠.”
우현을 만나지 않은 요 며칠간, 그의 가슴 두근거리는 언행을 무심히 받아넘길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을 해왔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그의 보고 싶다 발언에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우현은 하루를 가슴 부근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어딜!
고개를 숙이며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려던 하루의 눈에, 색이 벗겨져가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들어왔다.
그제야 자신이 형편없는 꼴이라는 걸 떠올린 하루는 민망해졌다.
아무리 우현의 정을 떼기 위해 이렇게 입었다지만, 창피한 건 창피한 거다.
게다가 우현은 평소보다 근사한 차림새였다.
평소에는 딱 맞는 정장만 입었는데, 오늘 쥐색 롱코트 안에 입은 옷은 진한 청바지에 흰색 셔츠였다.
그 새하얀 셔츠가 우현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우현의 뒤로 빛나는 햇살보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런 차림새의 남자와 함께 걸어 다닌다면, 사람들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남자 참 착하다. 모자란 여자를 챙겨주고 있어.’
‘자원봉사자인가?’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하루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도발적으로 우현을 쏘아봤다.
차라리 잘됐다.
이 형편없는 꼴이 창피해서, 우현이 먼저 오늘의 데이트는 관두자는 말을 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홀로서기 업무도 없는 소중한 주말을 편하게 침대 위에 누워서 보낼 수 있다.
소중한 주말을 사수하기 위해, 잠깐의 창피함은 참자고 각오하는 하루를 향해, 우현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정말 예쁜데.”
“말도 안 돼…….”
우현의 비위 좋은 발언에 놀라, 그가 자신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준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말도 안 되다니. 이렇게 예쁜데.”
“저기요, 강우현 씨. 아무리 연기라도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에요.”
“흐음?”
“지난번에 저한테 예쁘다고 하신 건, 그래요. 인정. 그때는 예뻐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하루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우현과 눈을 맞췄다.
“아니잖아요, 절대. 너무너무. 너무 절대. 이럴 때는 아무리 연기라도 예쁘다고 하면 안 되죠. 너무 못 믿을 말이잖아.”
황당해서 ‘너무’라는 말만 몇 번을 사용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현은 하루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왜 못 믿지? 이렇게 예쁘면서.”
“당연히! 어우, 됐어요. 그래요. 예쁘다고 칩시다. 강우현 씨, 지금 제 손 잡고 강남 거리 걸을 수 있겠어요?”
“원한다면 공주님처럼 안고 걸을 수도 있는데.”
“…….”
말을 말자.
하루는 우현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만약 이 남자가 이 꼴을 정말로 예쁘다고 생각한다면 이 남자의 심미안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고, 연기를 하는 중이라면 이 남자의 프로 정신은 하루의 예상범위를 벗어난 수준인 것이다.
어느 쪽이라도 우현에게서 ‘끔찍한 꼴이군. 오늘 데이트는 관둬!’라는 말을 끌어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방법을 써야겠다.
“차는 가지고 왔어요?”
“응.”
“전 고급 차 아니면 안 타는 거 아시죠?”
“예를 들어?”
“벤츠라든가.”
“소박하군.”
“…….”
피식 웃으며 걸어가는 우현의 뒤를 따라 걸으며, 하루는 벤츠보다 비싼 차가 뭐가 있는지 고민하다가 외쳤다.
“비, 비엠더블유!”
“그렇군.”
“소나타?”
“알겠어.”
미동도 없는 그의 등을 노려보다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검색을 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차]
제일 위에 뜨는 게시물이 ‘부가티’였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하지만 외쳤다.
“부가티!”
아싸! 이번엔 통했다!
우현이 걸음을 멈추더니 하루를 돌아봤다.
“정말 그걸 원해?”
“네. 그 급이 아니면 못 타겠네요. 쪽팔려서.”
“그렇군. 오늘만 참아줘. 다음번 데이트 때는 그걸로 모시러 올 테니까.”
“오늘도 못 참겠는데. 쪽팔려서.”
최대한 얄미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현이 하루를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짜증난다고 때리려나?
이대로 도망쳐야 할지 고민하는데, 우현이 허리를 굽혔다.
그의 얼굴이 하루의 귓가에 닿을 듯 말듯 가까워졌다.
숨이 귓불을 간질이는 바람에, 하루는 마법에라도 걸린 듯 뻣뻣해졌다.
그런 하루의 귓가에 대고 우현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부탁해, 이하루 씨. 난 오늘을 정말 많이 기대했거든.”
하루는 숨을 멈췄다.
예쁘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입술이 이마에 닿을 뻔했을 때보다, 바로 지금이 더 심장에 큰 타격을 입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남자, 뭐야? 이 남자, 뭔데 이렇게 섹시하고 애달파? 아무리 연기라지만…… 뭔데 이렇게…….’
뜨거울까?
하루는 침을 꼴깍 삼켰다.
우현이 천천히 허리를 펴고 하루를 내려다봤다.
우현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주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그래서 하마터면 이 연애가 진심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위험해, 위험해. 눈을 마주치면 안 돼. 저 남자 얼굴을 똑바로 봐선 안 돼.
메두사는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들었는데, 이 남자에게도 비슷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눈이 마주치면 꼼짝도 못 하겠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진짜로 돌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뭐. 그러죠. 이번엔 넘어가 드릴게요.”
“그거 고맙군.”
우현은 전혀 비아냥거리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는 하루와 보폭을 맞추려는 듯 천천히 걷고 있었다.
‘대체 뭔 생각이지? 정말로 내가 자기한테 반하게 만들려는 거 아냐? 하지만 날 반하게 해서 뭘 어쩌려고? 설마…… 정말로 날 식품에 끌어들이고 싶어서?’
자기가 만들어낸 거짓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곧 그 생각을 털어냈다.
학벌 좋고 능력 좋은 직원들이 가득한 식품에서, 그쪽 일을 하나도 모르는 하루를 끌어들일 이유는 없었다.
‘이 남자, 원래 연애할 때 이렇게 다정한가? 하지만…… 항상 그런 식으로 차였잖아. 다들 이 남자를 꼴도 보기 싫어했어. 설마 그 여자들도 계약연애였나? 아니면 그 여자들은 진짜 연애였고, 나만 계약연애인가? 계약연애는 특별히 잘해주는 건가? 계약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남자가 굳이 연애하는 여자들을 막 대할 이유는 없잖아.’
우현의 달콤한 행동을 볼 때마다 혼란만 커졌다.
강우현이라는 사람이 내가 아는 ‘6번 출구’가 아닌 것 같았다.
빌라가 있는 골목에서 벗어난 길에 우현의 차가 있었다.
이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자동차는 벤츠도, BMW도 아니었지만 그 이상으로 비쌀 것이 틀림없었다.
우현이 조수석의 문을 열어줬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하루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아까 검색했던 부가티의 가격을 제대로 확인했다.
“히익!”
금액을 본 하루가 숨을 삼킬 때 우현이 운전석에 앉았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아무리 비싸도 1억 정도 할 줄 알았는데, 부가티는 100억이 넘었다.
하루가 평생 잠 안 자고 일해도 만져볼 수 없는 돈이었다.
우현은 이상하다는 듯 하루를 한 번 돌아보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조용히 운전하는 우현의 옆모습을 흘긋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응.”
“혹시…… 진짜로 다음에 데이트할 때 부가티 타고 오실 거예요?”
“그걸 바란다며?”
“진심이에요? 그거 100억이 넘던데!”
“이하루 씨와 데이트를 할 수 있다면 100억도 아깝지 않지.”
“미쳤나 봐. 아니, 강우현 씨! 여자한테 그렇게 호구 잡히는 남자였어요? 그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요구 다 들어주면 패가망신해요.”
“패가망신하면 날 떠날 건가?”
“아니, 지금은 연기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 좀 해봐요.”
“연기하는 거 아닌데.”
“……아, 됐어요. 아무튼 부가티는 됐어요.”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에이씨. 부가티는 무슨. 100억이나 있어요?”
“장기라도 팔까 했는데.”
“본인의 장기가 그렇게 비싼 가격에 거래될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그거 너무 오만한 생각이에요.”
“그렇군. 겸손하게 생각하도록 노력하지.”
“네, 그러세요.”
“…….”
“아! 부가티는 정말로 됐어요. 알겠죠?”
우현이 빙긋 웃었다.
“그래, 알겠어.”
하루는 입을 비쭉거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정 떨어뜨리는 두 번째 방법이 돈만 밝히는 여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현이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명품 백이나 신발을 사달라고 하면 바로 사다 바칠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서 조심스레 말했다.
“아, 명품 백 갖고 싶다.”
“백화점에 먼저 들를까?”
그래, 이렇게 나오신단 말이지.
하루는 한숨을 삼키며 한 마디 더 던져봤다.
“다이아 반지도 갖고 싶네. 1캐럿쯤 되는 걸로.”
“1캐럿으로 되겠어? 그거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아. 좀 더 큰 걸로 하지.”
“……됐어요. 우리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죠.”
아무래도 돈과 선물 타령으로는 안 되겠다.
다음 수를 써야겠다.
차가 멈춘 곳은 놀이공원 근처에 있는 커다란 빌딩 주차장이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도 차도 많았다.
한참을 기다려 엘리베이터에 탔다.
우현은 당연하다는 듯 귀금속 매장이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저기요, 강우현 씨. 설마…… 진짜로 보석 사러 가는 건 아니겠죠?”
작은 목소리로 묻자, 우현이 왜 아니겠냐는 듯 하루를 내려다봤다.
“갖고 싶다며, 다이아. 1캐럿보다 큰 걸로.”
우현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고, 다이아라는 말에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여자들이 하루와 우현을 돌아봤다.
그들의 반응은 완전히 똑같았다.
처음에는 우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다음에는 하루를 보고 경악했다.
‘우와, 잘생겼다. 뭐야, 저 동네 백수 같은 여자는? 저 꼴로 1캐럿보다 큰 다이아를 원한단 말이야?’
마음의 소리가 하루의 귀에도 들려오는 듯했다.
아무리 우현의 정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입은 옷이라 해도, 창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주춤주춤 움직여 우현이 누른 버튼을 취소시켰다.
“왜 취소해? 원하는 다이아, 사줄게. 오늘 부가티를 못 태워줘서 쪽팔릴 텐데, 다이아라도 사줘야지.”
부가티, 라는 말에,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안의 남자들이 이쪽을 돌아봤다.
그들 역시 여자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남자! 일부러 이러는 게 확실해!’
아주 머리 좋은 남자다.
이런 식으로 우아하게 엿을 먹이다니!
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말했다.
“됐거든요. 다이아도, 부가티도 됐으니까 밥이나 먹자고요, 쫌!”
“쪽팔리잖아. 다이아 하나도 못 끼워주는 남자랑 다니는 거.”
“안 쪽팔린다고요! 하나도. 전혀. 조금도 안 쪽팔리니까 제발 입 다물고 식당에나 갑시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씹어뱉듯이 말하는 하루를 내려다보는 우현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떠올랐다.
‘귀엽긴.’
하루가 후줄근한 차림새로 나왔을 때부터,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옷을 입고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우현을 창피하게 만들고 정을 떼기 위해 그런 차림을 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모르겠지.
그런 모습마저도 우현의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걸.
그 어떤 모습을 해도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꼭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힘들다는 걸.
그녀는 절대로 모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