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꿈처럼 설레어.
“미안해. 우리 헤어지자. 앞으로 연락하지 말아줘.”
강남역 8번 출구 앞, 8시.
하루는 세상에서 제일 서글프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 남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고객은 남자를 쓰레기라고, 형편없다고,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남자에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고객의 표현처럼 ‘쓰레기’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20대 중반의 착해 보이는 남자였다.
‘이런 남자가 왜 쓰레기라는 거지? 겉보기랑은 달리 엄청 못됐나? 막 폭력 같은 것도 사용하고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서려 할 때, 붉어진 눈으로 하루를 보고 있던 남자가 코를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옛날에요. 옛날에 봤어요.”
원래는 전할 말을 끝낸 후 곧장 돌아서지만, 뭘 봤는지 호기심이 생겨서 그대로 서 있었다.
“인터넷으로요. 이별 전문이요. 홀로서기. 그거 보면서 이런 걸 누가 이용해, 막 그런 얘기 하면서 웃었었는데. 걔가 그걸 이용하네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남자는 예상했던 이별인 듯, 눈가는 벌겠지만 행동은 차분했다.
잠시 더 서 있다가, 남자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아서 돌아서려는데 또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저기 저분은…… 절 죽이러 온 건가요? 걔가 절 죽이라던가요?”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우현이 서 있었다.
8번 출구 앞 가로등 옆, 팔짱을 끼고 이쪽을 노려보는 우현은 영화에서 나오는 킬러 같았다.
“아뇨, 모르는 사람이에요. 저희 홀로서기는 살인의뢰는 받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하루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이번에야말로 돌아섰다.
그러자마자 우현이 하루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뒀는데!
“왜 이렇게 얘기가 길어? 나한테 할 때는 할 말만 딱 하고 돌아서더니. 저런 남자 좋아해?”
“저기요, 강우현 씨. 집착 좀 하지 말아주실래요? 아무리 연기라도 집착 많은 남자는 정떨어지거든요.”
“그래? 정떨어지게 만들 수는 없지. 이하루 씨, 아주 프로답게 일을 잘하더군. 멋졌어.”
“……그렇다고 그렇게 태도를 싹 바꾸실 것도 없고요.”
“내 애인은 요구사항도 참 많군. 맞춰주기 어려운 점이 아주 매력적이야.”
“네, 네. 그러시겠죠.”
우현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아무리 계약연애의 프로라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이 달라지다니.
‘이 사람은 진짜 배우를 했어야 해. 굉장한 연기자가 됐을 거야.’
평소의 우현이 날 선 흑표범 같다면, 계약연애 중의 우현은 마치 커다란 골든래트리버 같았다.
어떻게든 하루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하라는 대로 하는 골든래트리버.
“왜 웃어?”
“지금의 강우현 씨가 골든래트리버 같아서요.”
“골든래트리버? 나, 그거 키우는데.”
“어? 진짜요?”
“응. 크고 누런 녀석.”
“와, 사진 있어요, 사진?”
“이하루 씨는 나보다 그 녀석에게 더 관심이 많은 것 같군.”
“당연하죠. 골댕이는, 아, 골든래트리버를 골댕이라고 하는 건 아시죠? 아무튼 골댕이는 귀엽잖아요. 꿈의 강아지.”
“흐음.”
“얼른 사진 좀 보여줘요.”
“저녁 먹으면서 보여주면 안 돼?”
“지금요. 빨리, 빨리.”
하루가 손을 내밀고 보채자 우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불러왔다.
휴대폰 사진을 채운 순진하고 착한 인상의 골든래트리버를 보자, 우현을 골든래트리버라고 표현한 게 미안해졌다.
우현에게가 아니라 사진 속의 골든래트리버에게!
이렇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와 비교를 하다니. 미안해, 골댕아.
“얘, 이름이 뭐예요?”
“이름? 하…….”
거기까지 말하고 우현은 입을 다물었다.
하루가 고개를 들자, 놀랍게도 난처한 표정의 우현이 눈에 들어왔다.
우현이 이런 표정을 짓다니.
대체 이 강아지의 이름이 뭐기에!
남한테 알려주기 힘든, 야하고 저렴한 이름이라도 되는 걸까?
“이름이…… 뭔데요?”
다시 한번 조심스레 물었더니, 우현이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대답했다.
“누렁이.”
“예?”
“누렁이라고.”
“설마요. 거짓말이죠?”
“내가 왜 개 이름을 가지고 거짓말을 해? 누렁이야. 누러니까.”
“진짜요?”
“진짜.”
신은 공평하다.
우현에게 굉장한 외모를 준 대신, 끔찍한 작명 센스를 얹어주었으니까.
“불쌍하네요. 이렇게 예쁜데 이름이 누렁이라니.”
“누렁이가 어때서? 세상에 누렁이들 서운할 소리를 하네.”
“이름을 바꿀 생각은?”
“없어. 누렁이는 누렁이야.”
“예, 그러시겠죠. 그 확고하고 신념에 가득 찬 정신세계, 존경합니다.”
하루가 우현에게 휴대폰을 돌려줬다.
마음 같아서는 누렁이를 보러 가고 싶다고 하고 싶지만, 그래서야 ‘나, 그쪽 집에 방문할래요.’라고 말하는 꼴이 되기에 참았다.
그런 하루의 마음을 눈치챈 건지, 어쩐 건지 우현이 말했다.
“다음에 데이트할 때 데리고 나올까?”
“어, 진짜요? 그래도 돼요?”
“왜 그렇게 자꾸 진짜냐고 물어봐? 속고만 살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의 강우현 씨는 어쩐지…… 좀 비현실적이랄까, 거짓말 같달까…….”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저녁이나 먹으러 가지.”
“뭐 먹을 거예요?”
“뭐 먹고 싶은데?”
“아무 거나요.”
“그럼 내 입술이라든가…….”
“저기요, 우리가 분명 계약연애 중이고요. 강우현 씨가 굉장히 프로정신이 뛰어난 건 알겠는데요. 제발 그런 끔찍한 농담은 하지 말아주실래요?”
“노력해보지.”
우현은 조금도 민망해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다.
우현은 식당을 찾으려는 듯 주위를 둘러봤다.
가만히 서서 두리번거릴 뿐인데도,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눈이 부셨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도 하루와 같은 생각인지, 신기한 듯 우현을 한 번씩 돌아봤다.
그림 속에나 존재할 것 같은 그 남자가 하루와 눈을 맞췄다.
“첫 데이트 때는 파스타 같은 걸 먹는다고 하더군.”
“그런 고오급 정보를 알고 계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내 애인은 비꼬는 모습도 일품이네.”
우현은 칭찬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루는 칭찬을 하면서도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이 남자, 진짜로 그렇게 개차반인가?’
첫 데이트 한정 서비스로 잘해주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홀로서기에 이별을 부탁한 여자들의 말 속에 등장하는 남자와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었다.
‘아냐, 속아 넘어가면 안 돼. 생각해봐. 처음에 내가 괜찮냐고 물었을 때의 그 반응을.’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속사정이 있으면 그쪽이 나랑 사귀어줄 건가?
입가에 가득한 조롱 섞인 미소와 아는 사이도 아닌데 멋대로 말을 놓는 대단하신 예의범절까지.
‘그래, 그런 남자라고!’
하마터면 조금은 좋은 남자라고 생각할 뻔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계약연애의 프로라고 해도, 약점을 잡힌 나한테 이 정도까지 잘해야 할 필요가 있나? 게다가…… 이렇게까지 잘한다면, 여자들에게 차일 이유도 없을 텐데.’
우현의 첫 모습을 떠올린다고 해도,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계약연애라 함은, 이유가 있어서 ‘계약’까지 해가며 연인을 만들어둬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필요할 때만 연인으로 행동해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굳이 일주일에 두 번씩 데이트라는 조건까지 붙여가며, 완벽한 연인으로서 행동하는 우현의 심리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루는 그녀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는 우현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뭐, 저러다 말겠지.’
둘은 근처에 보이는 이탈리안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넓고 손님이 많은 가게였다.
다행히 한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곳에 앉았다.
양쪽 옆 테이블은 커플인 듯했다.
우리도 커플로 보일까?
‘그렇진 않을 거야.’
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과 우현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우현이 하루 쪽으로 메뉴판을 내밀었다.
“골라봐.”
“전 봉골레요. 강우현 씨는요?”
“난 미트볼 스파게티.”
“호오.”
“왜?”
하루가 미간을 좁히고 우현의 표정을 흉내 내며 말했다.
“미트볼 스파게티는 애나 먹는 거야!”
“…….”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거든요.”
“음식에 애나 먹는 게 어디 있어? 미트볼 스파게티, 싫어하나?”
“아뇨, 좋아해요. 말씀드렸다시피, 미트볼 스파게티는 애나 먹는 거야! 그런 반응이실 줄 알아서 우아하게 봉골레를 시킨 거예요.”
“봉골레는 우아한가? 이름만 보면 전혀 우아한 느낌이 아닌데.”
“우아하죠. 봉골레. 이름도 우아한데. 되게 유럽 느낌이잖아요.”
“그래? 난 봉 자가 들어가는 건 촌스럽단 느낌이라서. 봉구. 봉식이.”
“세상 봉구, 봉식이 슬퍼할 말씀을 하시네.”
“그래서, 미트볼로 바꿀 거야?”
“아뇨. 전 그냥 우.아.하.게. 봉골레 먹을래요.”
우현은 피식 웃으며 마침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주문하는 우현을 보며, 하루는 이 데이트가 의외로 편안해서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굉장히 불편하고 어색할 할 줄 알았는데.
농담 따위는 통하지 않는, 고지식한 남자일 줄 알았는데.
우현은 의외로 농담도 통하고 대화도 통했다.
“강우현 씨.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물어.”
우현은 연애하는 연인의 모습을 열심히 연기하고는 있었지만, 때때로 튀어나오는 명령조의 어투까지 바꾸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물어, 라고 했으니 콱 물어버릴까, 라고 생각하며, 하루는 말했다.
“대체 전 여자친구들한테 어떻게 대했기에,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 이별을 당한 거예요?”
우현이 “흐음.” 하며 다리를 꼬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하루 씨랑 전 애인에 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왜요? 그녀들에게 한 짓이 창피하고 부끄럽고 후회돼서? 아니면 내가 놀라서 도망칠까 봐?”
“이하루 씨는 내가 전 애인들에 대해서 물어봐주길 바라나?”
“물어봐도 해줄 말이 없어요. 전 애인이 없어서.”
“그럴 리가.”
“진짠데요. 모쏠이거든요. 모태솔로.”
“거짓말을 잘하는군.”
“진짜거든요. 왜 사람 말을 못 믿으실까?”
“이렇게 예쁜 여자를, 남자들이 가만 놔뒀을 리가 없잖아.”
아, 진짜 저 남자가!
저 남자의 프로정신을 어찌해야 할까?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칭찬에,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당혹스럽고 두근거리는 이 마음은 어찌해야 할까?
“배우들은 말이에요.”
하루는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우현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우현은 칭찬을 할 때마다 하루와 제대로 눈을 맞췄는데, 그 눈빛이 아주 깊고 진실해서 자꾸 칭찬을 진심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굉장히 잘생기고 예쁘고, 그렇잖아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하루의 말에, 우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렇지.”
라고 대꾸했다.
“그럼 그 사람들, 로맨스 영화나 그런 거 찍을 때, 서로한테 고백하고 달달한 말 하고…… 그럴 때마다 진짜로 두근거리고 설레고 그럴까요?”
순간, 우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시선을 돌리고 있는 하루는 그걸 보지 못했다.
“이하루 씨. 지금 나한테 설레나?”
“그럴 리가요!”
하루가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는 지금 연애하는 중이니, 조금은 설레도 상관없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계약연애 중이거든요.”
“말했다시피 일주일에 두 번, 데이트를 할 때는 진심으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진짜로 설렐 수는 없죠. 강우현 씨도 진심으로 설레거나 한 건 아니잖아요.”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
“당연하죠. 어쨌든 이건 우리 둘 다 연기를 하는 거니까.”
“그래? 그런데 어쩌나.”
우현의 손이 뻗어왔다.
군살 없이 길고 큰 손이 하루의 손 위에 겹쳐졌다.
우현의 손은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손등에서 시작된 온기가 전신으로 퍼져가는 것만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우현을 쳐다봤다.
쳐다보지 말 걸 그랬다고, 하루는 곧장 후회했다.
우현은 아주 진지한 눈으로 하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검고 깊은 눈동자가 하루를 와락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금.”
우현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음악처럼 흘러나왔다.
“이하루 씨랑 이러고 있는 게 꿈처럼 설레는데.”
‘우와, 대박!’
하루는 생각했다.
‘저런 오글거리는 말이 저렇게 잘 어울리다니!’
저런 말을 현실에서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실제로 그 말을 듣게 될 줄도 몰랐다.
게다가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들은 자신이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
두근. 두근. 두근.
이렇게나 가슴 떨려 할 줄은 몰랐다.
‘우와, 이 남자. 진짜 위험하네. 아주 위험해.’
하루는 얼른 그의 손아래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손을 쑥 빼냈다.
그러나 그의 온기는 여전히 손등에 남아.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을 격동하게 만들었다.
‘와, 진짜 조심해야겠어!’
프로정신이 뛰어난 사람을 상대할 때는 이쪽도 프로가 되어주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루는 계약연애의 프로는 아니었다.
‘나는 그냥 평범한 프로그래머고…… 아, 그래. 난 이별에는 프로지.’
연애 한번 해본 적 없지만, 이별만큼은 최고로 많이 해본 여자.
그렇다면 프로답게 이별을 향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가면 될 일이다.
우현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괜찮은 여자를 찾는 한편, 우현이 계약연애를 끝내고 싶다고 원할 만큼 형편없는 여자가 되어주는 게 좋겠다.
그리고.
‘이별을 하실 때는 우리 홀로서기를 이용해주세요, 고객님.’
하고 말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하루는 이제 막 나온 봉골레를 향해 포크를 가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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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집으로 들어오는 우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하루는 절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말한 건 사실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우현에게 꿈처럼 설레는 시간이었다.
다시 보기 힘들 줄 알았던 그녀를 회사에서 발견했을 때부터, 우현은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우현이 던지는 말에 당황하는 하루의 모습을 떠올리자, 우현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전에 없이 밝은 표정으로 들어오는 주인을, 골든래트리버가 꼬리를 붕붕 흔들며 맞아주었다.
우현은 골든래트리버 옆에 쭈그리고 앉아, 녀석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하루야. 너, 당분간 누렁이로 살아야겠다.”